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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에 있는 이성당(李盛堂)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알려진다. 빵은 언제 이 땅에 들어왔을까. 자료에 의하면 조선 말 선교사에 의해 처음 유입됐다. 당시 선교사들은 숯불에 빵을 구웠으며, 사람들은 모양이 우랑과 같다고 해서 '우랑떡'이라 불렀다 한다. 이것이 최초로 소개된 빵이다. 정확한 연대나 선교사 이름은 기록에 없다. 다만 일본인이 밀려오면서 널리 보급된 것으로 전해진다. 용어도 포르투갈어 '팡(pao)'이 일본을 거치면서 '빵'이 됐다고 한다.

군산은 '쌀 수탈'이라는 일제식민지 아픈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는 항구도시다. 일제는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피땀 흘리며 거둬들인 쌀을 철도와 선박을 이용해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압제와 수탈, 그 모진 세월을 견뎌온 군산. 그곳의 빵집 이성당은 2006년부터 100% 쌀가루로 빵을 만들면서 전국의 명소로 떠올랐다. 역설적인 것은 쌀빵을 전수한 곳이 일본 니가타 현에 있는 '겐리치' 제과점이라는 것. 쌀로 맺어진 군산-일본 관계, 기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기자는 관련 책자와 논문, 옛날 신문, 사진, 인터뷰 등을 통해 이성당의 100년 발자취와 양과자점이 군산에 들어온 시기, 당시 주변 상황 등을 정리했다. 그 내용을 3회로 나눠 싣는다. - 기자 말

군산에 뿌리내리는 '이즈모야'

1910년대 이즈모야 제과점(지금의 영화동 부근)
 1910년대 이즈모야 제과점(지금의 영화동 부근)
ⓒ 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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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 이성당은 100년 전통을 자랑한다. 상호는 1945년 해방과 함께 지어졌다. 이성당은 일본인 히로세 야스타로(廣瀨安太郎)가 1910년께 지금은 군산시 영화동(대화정)에 개업한 '이즈모야'(出雲屋)에서 출발한다. 야스타로는 일본 시마네 현 이즈모시(出雲市)에 살았으며 아들들의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1906년 군산 이주를 결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했다. 당시 인구는 588명(조선인 511명, 일본인 77명) 2년 후인 1901년에는 1449명(조선인 921명, 일본인 472명)으로 일본인이 6배 이상 증가한다. 그해 군산 거주 일본인들의 직업은 목수가 1위(31명), 잡화상 2위(25명), 중개인 3위(16명), 기생 4위(14명) 순으로 나타난다. 과자상과 요리점은 공동 8위(4명)를 차지했다.

직업별 일본인 구성 자료에 따르면 야스타로가 군산에 정착한 이듬해인 1907년에는 과자상이 10위(21명), 요리점이 8위(26명)에 오른다. 1909년에는 과자상이 9위(28명)로 한 계단 상승했다. 이는 개항과 함께 양과자가 군산에 유입됐으며, 야스타로가 이즈모야를 열기 전 이미 많은 과자점이 성업 중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성당의 전신 이즈모야는 찹쌀을 곱게 빻아 반죽해 약한 불에 살짝 데치거나 기름에 튀겨내는 화과자(和菓子) 일종인 아라레(あられ) 전문 과자점이었다. 향긋한 맛을 더하기 위해 새우, 해태(김) 등 해산물을 넣거나 쑥을 넣어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서 과자와 제면 기술을 익혔던 야스타로는 새우를 넣어 만든 '에비아라레'(えびあられ)를 잘 만들었다 한다.

초기 이즈모야는 대화정(大和町)에 있었다. 당시 대화정은 지금의 영화동 부근으로 군산의 중심가였다. 사진 속 이즈모야는 일본식 목조건물로 기초공사가 안 된 하꼬방(판잣집) 수준이다. 발전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때여서 가게에 전등도 밝히지 못하고, 과자도 장작불에 구워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전기'가 전기사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한 때는1912년 4월 1일이었다.

1920년대 초, 야스타로는 일을 도와주던 큰아들(겐이치)을 동경으로 유학 보낸다. 겐이치는 일본에서 단팥빵, 크림빵, 케이크와 같은 서양 제빵·제과 기술을 배워온다. 그리고 솜씨가 좋은 동생(스케지로)과 함께 다양한 빵과 과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훗날 겐이치는 이즈모야를 물려받고, 스케지로는 분점을 운영하면서 형의 사업을 돕는다.

당시 군산 제과업자들은 빵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군산에서 구하고, 설탕·버터·치즈·향료 같은 부재료는 일본에 본사를 둔 메이지 제과를 통해 공급받았다. 아버지를 닮아 사업수완이 뛰어났던 겐이치는 다른 업소들 주문을 대신 해주는 중간 도매상 역할을 하면서 수수료를 챙겼다. 그리고 이즈모야에서는 메이지제과가 취급하는 캐러멜, 초콜릿, 사탕 등도 팔았다.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군산좌, 희소관 등 시내 극장에서도 화과자를 팔았다. 거리의 행상도 있었다. 행상은 주로 조선 사람이었고, 간혹 일본 소년도 있었다. 출출할 저녁 무렵이면 당고(짬짬이)나 모찌(찹쌀떡), 요깡(양갱) 등을 사라고 외치며 거리를 활보했다. 당시 행상들은 화과자가 담긴 나무상자 양쪽 귀퉁이에 광목 끈을 길게 연결해서 목에 걸고 다녔다 한다.

이즈모야의 다양한 마케팅 전략

1926년 6월 9일 자 <군산일보>에 실린 이즈모야 광고
 1926년 6월 9일 자 <군산일보>에 실린 이즈모야 광고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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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9일치 <군산일보> 광고면이 눈길을 끈다. 양복점, 인쇄소, 양조장, 백화점, 금고, 축음기 등 빽빽하게 채워진 광고 가운데 이즈모야 상호가 돋보여 흥미를 더한다. 6면으로 발행된 <군산일보>는 경성판(京城版)을 따로 배치하고 전국 각지의 사건·사고와 문화행사를 안내하고 있어 당시 군산의 경제적·사회적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상호와 전화번호가 좌우로 배치된 이즈모야 광고는 찹쌀과자와 각종 떡, 토산물 등을 취급하며 주문을 받아 납품한다고 홍보하고 있다. 당시 이즈모야는 일본에서 들여온 조리기구와 자동화 기계를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빵(식빵, 팥빵, 크림빵, 과자빵 등)과 떡, 과자를 만들었다. 그중 떡은 정월(일본 설)이나 기념일이 가까워지면 은행, 기업체 등에서 다량으로 주문이 들어왔고 배달은 삼륜차와 자전거를 이용했다.

조선 시대 대감댁 다과상을 떠오르게 하는 사각반 모양의 소반 그림은 이즈모야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여겨진다. 초기 개업시절 간판과 명치정 시절(1930년대)에 제작한 대형 간판에도 같은 모양의 소반 그림이 보인다.

신문 발행연도인 1926년은 군산항 부잔교 준공식에 참석한 사이토 총독이 부두에 산처럼 쌓인 쌀을 보고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쳤던 그해다. 이즈모야가 위치한 '명치정'과 내항을 연결하는 해망굴도 그해 개통된다. 부청(시청) 이전을 앞두고 바둑판 같은 격자형 도시 권역도 지금의 월명동, 신흥동까지 확대되는 시기다. 일본인 제과업자들 친목 모임인 '군산 과자상조합'도 있었다고 한다.

명치정(지금의 이성당) 시절 이즈모야.
 명치정(지금의 이성당) 시절 이즈모야.
ⓒ 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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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모야가 보유한 삼륜차 짐칸의 흰색 페인트 글씨가 무척 선명하다. 옆면에 인쇄된 '廣瀨商店'은 히로세 상점, '群山'은 도시 이름, '安'은 이즈모야 창업주(히로세 야스타로) 이니셜로 보인다. 이는 삼륜차를 배달에만 이용한 게 아니라 업소 홍보에도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자동차가 귀하던 시절 '움직이는 이즈모야'였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이다.

또한, 이즈모야는 점포 입구에 노렌(暖簾)을 내걸었다. 노렌은 일본 상인들이 자신의 상점 옥호와 가문 등을 새겨놓은 발(簾)을 말한다. 이는 가게의 신용이나 친절을 알리는 홍보물이자 상징물로 햇빛과 바람막이 역할도 했다. 양과자를 구경만 해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백열등에 반사돼 붉게 빛나는 진열장과 함께 좋은 눈요깃거리가 됐을 것으로 사료된다.

겐이치는 인건비 절약을 위해 조선인 20여 명을 채용한다. 조선인 종업원들은 기모노를 개조한 제복을 부서에 따라 다르게 입었다. 영업부 직원은 와이셔츠에 바지, 판매하는 사람은 양복 차림이었다. 배달하는 사람들은 '出雲屋'이 쓰인 한텐(半纏)을 입었다. 이는 단순한 노동복 외에 보는 사람에게 소비심리를 부추기면서 이즈모야를 자연스럽게 홍보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전시체제 아래에서도 으뜸 제과점 자리 지켜

 1930년대 군산시 중앙로 모습. 오른쪽으로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이 보인다.
 1930년대 군산시 중앙로 모습. 오른쪽으로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이 보인다.
ⓒ 동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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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세 야스타로 가족과 이즈모야 직원들 모습
 히로세 야스타로 가족과 이즈모야 직원들 모습
ⓒ 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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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만 아라레 전문점으로 출발한 이즈모야는 1920년대 들어 조선인 상가 밀집 지역인 영정(송방골목)에 분점을 개설한다. 가업을 이어받은 겐이치는 1930년대 초 번화가인 명치정(지금의 이성당 자리)에 있는 2층 목조건물로 확장 이전한다. 그리고 한쪽 공간을 커피숍과 레스토랑을 겸한다. 레스토랑에서는 런치 정식, 돈가스, 오므라이스 등을 팔았다.

1920~1930년대 군산에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았다. 주로 명치정과 신흥동 산수정 유곽 근처에 몰려 있었다. 주 메뉴는 맥주, 커피, 샌드위치, 오므라이스 등이었다. 카페에는 기생 출신 여급도 있었다. '히노마루 카페'는 실내에 서양 음악이 흐르고 세련된 '마담'이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중앙 언론사가 주최하는 서양요리 강습회도 열린다. 수강생은 대부분 부잣집 가정주부였다.

1930년대 명치정은 부청(府廳)을 비롯해 부영도서관, 군산의료원, 군산금융조합, 군산산업조합, 군산상공회의소, 군산심상고등소학교, 전매국 군산판매소,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사진관, 고급요리점, 카페, 가구점, 문구점, 서점, 식료품점, 양품점, 병원, 운동구점, 종묘원 등 동서양 건축양식이 혼합된 현대식 건축물이 즐비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1935년 10월 당시 군산상공회의소 회원 직업분포도는 요리점(음식점 포함) 18명, 카페 10명, 과자가게 여덟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상공회의소 회원은 그 지역의 법인이나 개인이 동종업계에서 대표성을 보이거나 거래액이 일정 수준에 달하는 상위층만 가입했던 것으로 미뤄봤을 때, 통계보다 훨씬 많은 카페와 제과업소가 난립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장을 거듭하던 이즈모야는 1930년대 후반 들어 어려움을 겪는다. 전시체제가 되면서 제과점 재료 공급을 배급제로 고쳤다가 일부 제품을 못 만들게 하는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판매용 빵까지 배급제로 바뀐다. 그러나 겐이치는 뛰어난 비즈니스로 이즈모야를 군인 식당으로 지정받는 등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군산의 으뜸 제과점 자리를 지켜낸다.

부인과 5남매를 데리고 대한해협을 건너온 히로세 야스타로. 그의 가족들은 일제 식민통치 36년 동안 이즈모야 명성만큼이나 부(富)를 누렸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함께 그들의 운명도 바뀐다. 귀국 보따리를 싸야 했던 것. 겐이치는 재산과 이즈모야 명성을 지키겠다면서 1개월여를 완강히 버티다가 먼저 귀국했던 부인이 다시 돌아와 설득하자 마지못해 귀국선에 오른다. 당시 그의 나이 쉰하나. 분노에 앞서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참고서적: <빵의 백년사, 1부 군산의 이즈모야>(함한희, 오세미나 지음), <근대 항구도시 군산의 형성과 변화>(김영정, 소순열, 이정덕, 이성호 외), 전라문화연구 제19집. 군산부 지도(1934년), 나필성(87) 전 <경향신문> 동경특파원, 고 하반영 화백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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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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