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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7일 강제굴 생일 밥상. 남편이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차렸다. 생일 선물은 등하교 서비스.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
▲ 강제굴, 생일 축하해.^^ 2015년 7월 7일 강제굴 생일 밥상. 남편이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차렸다. 생일 선물은 등하교 서비스. 버스를 타지 않아도 된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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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7일, 엄마가 된 지 만 16년. 아기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던 마음은 변했다. 나는 "애들은 부족하게 키워야 해"라고 말하는 엄마. 아이들은 결핍을 느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제굴은 스마트폰이 없어서 반 '단톡방'에 뜬 공지사항을 알지 못 했다. 일곱 살 꽃차남은 '터닝메카드' 장난감이 갖고 싶어서 초여름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제 살 길을 안다. 위기에 빠지면 약한 고리를 찾아낸다. 제굴도 그랬다. 아빠가 출장가면 사오는 선물에 눈을 돌렸다. 제굴은 아빠에게 인천, 부산, 대전의 특산품이 다 똑같다고 세뇌교육을 했다. 문상(문화상품권)! 글로벌 시대, 지구촌 곳곳의 특산품도 오로지 문상! 출장 갔다가 올 때마다 남편은 큰애에게 "짠!" 하며 문상을 주었다. 

야박한 엄마도 아이 생일이 닥쳐오면 흔들린다. 무탈하게 자라는 것이 새삼 고맙다. 제굴은 "왜 나를 시험기간에 낳았어요?" 물으면서도 주말이니까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컴퓨터 게임을 했다. 자기 반에는 운동부와 미술부가 있고, 은근히 공부 안 하는 숨은 경쟁자들도 있어서 "내가 꼴등 맡아놨다고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논리적으로 말했다. 나는 물었다.

"강제굴, 갖고 싶은 것은?"
"문상이요."
"여행 가고 싶은 곳은?"
"피(시)방이요."

"받고 싶은 생선(생일선물)은?"
"문상이요."
"통 크게 말해도 되는데?"
"문상에 오븐이요. 이모가 그러는데 오븐 있으면 요리의 신세계가 열린대요."

제굴이가 즐겨 차리는 밥상. 고칼로리, 맛있다. 친구 성헌이 데려왔을 때는 실패했다고. 안타깝다.
 제굴이가 즐겨 차리는 밥상. 고칼로리, 맛있다. 친구 성헌이 데려왔을 때는 실패했다고. 안타깝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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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소유의 오븐을 갖게 된 제굴이

제굴 생일 나흘 전인 7월 3일, 제굴은 친구 성헌이를 데려왔다. 기말고사 끝난 기념으로 밥 해주겠다고. 둘은 집 앞 마트를 세 번 갔다 왔다. 제품을 쓰지 않고 만든 파스타와 리소토. 성헌은 솔직담백하게 "생각보다 별로"라고 했다. 제굴은 소스 만들 때 우유가 빠졌다며 머쓱해했다. 2시간 동안 컴퓨터 게임을 한 그 둘은 내가 사온 통닭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그날 밤, 우리 식구는 오븐을 사러 나갔다. 종류가 많고, 크기도 제각각이라서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제굴은 제일 작은 크기의 오븐을 골랐다. 남편은 소규모 주방 가전 쪽으로 갔다. 2남 3녀 중 막둥이 아들로 귀하게 자랐지만 결혼하고는 줄곧 밥을 하는 남편. 처제가 자기 생일 선물로 프라이팬을 줬다고 삐쳤던 남편은 이제 대놓고 자기 취향을 드러낸다.

"뭐 좀 만들려고 해도 우리 집은 도구가 너무 없어. 제굴이도 답답할 거야. (나를 쳐다보며) 믹서기 산다. 집에 있는 거는 작잖아."     

오븐은 토요일 오후에 집으로 배달되었다. 열일곱 살에 자기 소유의 오븐을 가진 '대부호' 제굴은 아침에 친구 집에 가서 감감무소식. 더구나 저녁에는 아파트 단지의 변전소가 터지는 바람에 동네 전체가 정전. 게임도,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안 되는 집은 제굴에게는 안 즐거운 곳. 대부호 청소년은 자전거 탄다고 다시 나갔다. 우리 부부도 모임 있어서 외출하고.

우리는 토요일 오후 10시에야 집에 모였다. 제굴은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다리가 아프다면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랩을 하는 가수들이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볼륨을 크게 켜 놓았다. 듣기 싫었다. 나는 "강제굴, 요리 하겠다는 사람이 오븐 새로 왔는데 그러고 있냐"고 짜증을 냈다. 제굴은 텔레비전을 끄고 부엌으로 갔다. 오븐 속에 뭔가를 집어넣고 왔다.

"엄마, 기대하세요. 3시간 뒤에는 완전 바삭한 감자 칩을 먹을 수 있어요."
"지금 밤 11시야. 정신 좀 차려. 새벽 2시에 누가 그걸 먹냐고?"

제굴이표 샌드위치. 고칼로리, 사육되는 기분도 든다.^^
 제굴이표 샌드위치. 고칼로리, 사육되는 기분도 든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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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제굴은 일어나자마자 식빵에 양파와 치즈, 카야 잼을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맛있었다. 많이 느끼했다. 우리는 생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제굴이의 지시에 따라서 영화 <아메리칸 셰프>를 봤다. 나는 영화 속에서 통마늘을 보지 못 했다. 제굴은 "엄마, 나 대신 마늘 까준다고 하지 마요. 내 실력 안 늘어. 자세히 보세요. 다 통마늘이잖아요"라고 했다.

제굴이가 본격적으로 밥하기 전, 우리 집에는 따로 놓고 쓰는 버터가 없었다. 굴 소스 없이 굴 소스 맛내는 조리법이 있는 줄 몰랐다. 제굴의 친이모인 지현이 가루로 된 바질과 파슬리 가루, 북유럽의 그릇들을 우리 집으로 사다 나르지도 않았다. 남편이 실리콘으로 된 조리 기구를 종류별로 사오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그릇에다가 집 밥을 먹었다.

"뭔가 개운하고 칼칼한 것 먹고 싶지 않아? 김치찌개 같은 것. 내가 밥 할게."

남편은 제굴이가 부엌으로 가기 전에 먼저 낮밥 준비를 했다. 김치찌개와 마파두부, 그리고 쌈 채소를 차렸다. 저녁에 남편은 매운탕을 올리고, 더 많은 쌈 채소를 씻어서 밥상에 놓았다. 제굴은 새로 산 오븐의 기능을 익히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로 트집을 잡았다. <개그 콘서트>를 보고 자겠다는 아이를 일찍 자라고 방으로 쫓아 보냈다.

10분이나 지났나. 제굴은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얼굴 보고는 차마 말을 못 하겠다면서 "헤헤~ 엄마가 읽으라는 책 <한국이 싫어서>도 다 읽었어요. 그러니까 개콘 조금만 볼게요"라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나갔다. 제굴은 "엄마, 많이 사랑해요.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했다. 아휴, 내가 졌다. 그래, 봐라. 개콘 봐!

제굴이가 오븐으로 한 첫 요리. 이 음식 만들 때, 제굴이와 나는 몹시 냉랭했다. 한 10분 정도.
 제굴이가 오븐으로 한 첫 요리. 이 음식 만들 때, 제굴이와 나는 몹시 냉랭했다. 한 10분 정도.
ⓒ 강성옥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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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구이 때문에 아들과의 사이 '급속냉동'

제굴 생일 하루 전인 7월 6일 월요일. 학교 갔다 온 제굴은 시장에 가서 생닭을 사왔다. 고기 누린내 없애는 밑간을 했다. 오븐 예열도 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우리 집 오븐은 최고 온도가 200도. 제굴이 따라하는 레시피에는 220도에 맞춰야 한다고 나와 있었다. 온도조절 기능을 눌렀다가 취소하기를 되풀이 하던 제굴은 나한테 와서 좀 보라고 했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설명서 보고 공부했어야지. 엄마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설명서가 없다고요. (버리는 거 좋아하는) 엄마가 버린 거 아니에요?"

예열이 끝난 오븐 온도는 200도. 나와 제굴 사이는 급속냉동 상태인 영하 18도쯤. 그때 남편이 퇴근했다. 제굴과 나는 서로 하소연했다. 남편은 나를 보고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짜증을 삭이라는 뜻이겠지. 남편은 오븐을 들여다보면서 "색깔 보니까 잘 익고 있어"라고 했다. 땡! 음식이 다 됐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꽃차남이 빨리 먹고 싶다고 식탁에 앉았다. 

남편은 접시에 닭구이를 세팅했다. "별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찍어?" 하는 남편의 잔소리가 싫어서 나는 재빠르게 제굴이가 한 요리를 찍었다. 늘 그러는 것처럼 스마트폰으로. 웬걸! 남편은 DSLR 카메라까지 꺼냈다. 꽃차남 아기 시절에 쓰고 안 썼는데 망원렌즈까지 꺼냈다. 감격한 걸까. 남편은 각도를 돌려가면서 공들여 사진을 찍었다.

만날 "특별한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찍어?" 잔소리 하던 남편이 아들 음식은 정성을 들여서 찍었다.
 만날 "특별한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찍어?" 잔소리 하던 남편이 아들 음식은 정성을 들여서 찍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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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호들갑, 우리 부부가 젊었을 적에는 일상이었다. 아기 제굴이가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웃었을 때, 목을 가눴을 때, 뒤집었을 때, 기었을 때, 첫 발을 떼었을 때, "맘마"라고 말했을 때, 변기에 오줌을 누었을 때, 배시시 웃어줄 때에 참 좋았더랬다. 지금처럼 인상 쓰면서 샤워 짧게 하라고, 동생 때리지 말라고, 책 좀 읽으라고 잔소리 하는 엄마가 될 줄 몰랐다. 

7월 7일, 제굴의 열일곱 번째 생일 날. 남편은 오전 6시에 일어나서 상을 차렸다. 생일선물은 등하교 서비스. 제굴은 버스를 안 타도 됐다. 저녁에 다시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구끼리 밥 먹으면서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 나는 제굴에게 레시피 노트를 쓰라고 잔소리 했다. 남편은 재료 넣는 순서를 바꿔도 음식 맛이 달라진다며 그걸 써 보라고 했다.  

제굴은 좋아보였다. 저녁밥 먹었는데도 생일이 5시간 남아 있었다. 제굴은 평일인데도 당당하게 와이파이를 켜고(주로 주말에만 켠다) '하스스톤' 게임을 했다. 이모와 경열이 삼촌, 꽃차남 돌봐주는 베이비시터한테 받은 특산품(문상)과 현금을 합치면 10만 원. 당분간 게임 실컷 할 수 있는 재력이 생긴 셈이다. 나도 좋았다. 밥상이 느끼하지 않아서. 남편은 말했다.

"배지영이 제굴이 낳느라고 고생한 날이니까 쌈 채소에 샐러드까지 차린 거야. 맘에 들지?"   

남편이 차린 제굴 생일 날의 저녁 밥상. 아기 낳느라  고생한 아내를 위한 밥상. 야채가 많아서 느끼하지 않다. 그래서 더 좋다.
 남편이 차린 제굴 생일 날의 저녁 밥상. 아기 낳느라 고생한 아내를 위한 밥상. 야채가 많아서 느끼하지 않다. 그래서 더 좋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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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열일곱 살 생일 , #오븐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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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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