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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살에 아이를 낳았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를 깨닫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힘겹고 외로웠다. 나란 사람이 참 미련해서 아기를 낳아 몸은 엄마가 되었지만, 마음과 머리는 그때까지 엄마가 되지 못했다.

아기를 키우며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단절감'이었다. 세상과 단절감. 나만 세상과 떨어진 거 같았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는데 내 시계는 멈춰있었다. 세상에서 나란 존재는 잊히고 없는 사람이 된 듯싶었다. 내가 오늘 여기서 없어져도 그걸 알 사람은 가족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책 속에서 배운 건조한 단어 '산후우울증'이 내 것이 되었을 땐 더는 건조한 단어가 아니었다. 산후 회복도 더뎠다. 수혈을 두통이나 받은 난산이었기에. 게다가 아이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힘들어졌다. 밥 먹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머리 감는 것도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모유먹는 아기가 떨어지지 않아서 아기를 안고 화장실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점심도 차려 먹기 힘들었다. 안아 달라고 우는 아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점심시간이 되면 내가 먼저 낮잠을 자는 거였다. 그럼 아기도 내 옆에서 놀다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자다 일어나 후다닥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빌딩 청소 일을 하는 친정엄마가 퇴근하는 시간을 기다려 친정에 전화를 했다. 친정엄마는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남편은 뭐했냐고? 남편은 남편대로 신입사원이라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나의 유일한 직장동료이자 선배 '엄마'

아이와 엄마.
 아이와 엄마.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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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게 "아기 키울 때는 남이 다 차려준 밥 먹는 것도 힘든 거야. 오늘, 밥은 어떻게 챙겨 먹었니?" 하고 물으셨다. 내 처지를 알고 위로를 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엄마밖에 없었다. '엄마'를 하나의 직업으로 보면 새내기 '엄마'인 나에게 친정엄마는 유일한 직장 동료였고 선배였다.

"옛날에 한 거지 할머니가 어느 집에 동냥을 갔대. 그런데 그 집에서 할머니한테 '할머니, 힘들게 동냥 다니지 말고 우리 집에서 아기 보면서 편히 지내세요.' 했대.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동냥 그릇도 두고 도망을 갔댄다. 아기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면 그런 말이 다 있겠냐?"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며 나를 다독여주셨다. 남편도 세상 누구도 내가 힘겨운 걸 모르지만 엄마는 육아가 얼마나 힘겨운지 알고 날 위로해 주셨다. 생각해 보니 엄마는 그 힘겨움을 견디고 나를 키워 주셨다.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는데 나도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은 나에게 의지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전화통을 부여잡고 그 시절을 버텼다.

아기가 6개월 되었을 즈음에 우리나라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곧이어 남편의 연봉이 줄었다. 다니던 회사가 없어지거나 정리해고돼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판국에 남편의 상여금이 400% 준 정도는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모은 돈도 없이 결혼을 감행한 탓에 얼마 안 되는 반지하 방 전세금도 대부분 빚이었다. 게다가 남편 월급까지 줄었으니 나도 돈벌이에 나서야겠다 싶었다. 남편의 지인 중엔 보험 영업사원으로 일자리를 옮긴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는 남편 친구가 남편을 찾아와서는 용돈을 아껴 단돈 몇 만 원짜리 보험을 들어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그런데 거절을 잘 못 하는 남편이 "나 용돈이 따로 없어" 하고 대답을 했단다. 우린 그때 남편 차비랑 점심값을 아끼겠다고 회사 코앞으로 이사를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남편이 말했다.

"친구는 내가 보험 들어 주기 싫어서 거짓말한 거라 생각하겠지? 아닌데."

사실 글을 쓰는 나도 '정말 우리가 그렇게 없이 살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일이 없었다면 그때 우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지금은 다 잊었을지 모른다.

아이가 돌이 되고 나도 취업을 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냈다. 저녁 7시가 돼서 아이를 찾으러 가면 어린이집에 남아 있는 아이는 한두 명뿐이었다. 아이는 선생님에게 코알라처럼 안겨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면 절로 크는 줄 알았다. 어린이집에 낼 돈만 내가 벌면 된다 생각했다. 순진했다.

그런데 예상도 못 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아이가 아팠다. 하루 이틀 잘 다닌다 싶으면 감기에 걸렸다. 약을 먹여도 감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감기에 걸려 있는 아이를 온종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을 친정엄마는 안타까워했다. 엄마는 아이가 나을 때까지라도 친정으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러다가 나으면 다시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리고 좀 지나면 또 감기에 걸렸다. 다시 할머니 집에 가고. 그러다 보니 어린이집에 간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

엄마는 아이에게 풀 먹인 옷을 입혔다

결국, 아이를 친정에 보냈다. 엄마는 마침 빌딩 청소일을 그만두었다. 어릴 적 못 배운 것이 한이 된 엄마는 성인 여성들이 다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바쁜데도 아이를 돌봐주셨다. 

한여름 퇴근을 해서 친정으로 달려가 보면 아이는 군인 아저씨처럼 짧은 머리에 런닝 팬티 차림으로 있었다. 런닝과 팬티엔 엄마가 풀을 먹였다. 엄마는 많지도 않은 아이 옷을 매일 빨아 햇볕에서 말렸다. 그리고 풀을 쑤어선 말린 옷을 풀물에 주물럭주물럭 한 뒤, 다시 탈수해서 햇볕에 말려 입혔다. 대학 다닐 때부터 솜이불 빨래를 했던 나는 그 수고로움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나는 한 번도 아이 옷에 풀 먹일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엄마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내 아이에게 해 주고 있었다. 사실은 나도 풀 먹인 옷을 입고 자라지 못했다. 내가 자랄 때는 먹고 살기 바빠서 옷에 정성을 쏟을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서 풀 먹인 옷이 얼마나 시원한지 몸으로 배우고 자랐다.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으로 아이를 돌봐 주었다. 여름밤 잠을 못 자는 손자를 위해서 모기장을 쳐주고 깔깔하게 풀 먹인 속옷을 입히고 풀 먹인 이불을 덮어 재웠다.

그때 번 돈으로 우리는 IMF 시기를 잘 넘겼다. 엄마 덕분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 해도 내 잘난 맛에 살았다. 내가 잘나서 내 생각이 옳아서 나는 계속 당당하게 살 줄 알았다. 아이는 낳기만 하면 어린이집에 보내면 저절로 자라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우리 부부 둘 만의 힘으로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도움 없이 직장맘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하다는 걸 나는 알게 되었다. 나를 키워주었던 엄마는 내가 아이를 키울 때도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첫 아이를 어떻게 키워내고 그 IMF 시절을 어떻게 넘겼을지 모른다. 그래서 엄마가 참 고맙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부모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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