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로 격리된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남편은 육성으로 편지를 썼다. 목이 멘 간호사 5명이 돌아가며 눈물로 남편 대신 편지를 읽었다. 5시간 뒤 아내는 눈을 감았다.

메르스로 사망한 남편을 병간호하다 메르스에 감염된 아내도 있다. 그 아내는 격리된 병실에서 수화기 너머로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는 사이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이 동대문 시장에서 쇼핑한 원피스와 브로치, 머리끈 등을 찍은 사진을 보란 듯이 공개했다.

'메르스보다 대통령이 더 무섭다.'

최근 서울과 부산 시내 일대에 뿌려진 전단의 제목이다. 이 전단에는 "세월호로 아이들이 죽고 메르스로 어른들이 죽어도 대통령은 책임지려 하지 않고 국민은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이라는 내용 등이 담겼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야 할 정부가 실종됐다.

'또 다른 세월호' 메르스, '유체이탈'은 계속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26회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26회 국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청와대

관련사진보기


지난 1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메르스 초기 대응에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치권의 국회법 개정을 비판한 직후였다. 환자 발생 2주 만에 나온 첫 언급이었지만, 사과나 유감 표명은 없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histopian)는 자신의 트위터에 "지도자란, 질타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수장인 박 대통령이 정부기관과 거리를 두는 특유의 화법은 '유체이탈'을 연상하게 한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유체처럼, 박 대통령은 모든 사태 위에 둥둥 떠다니면서 남의 일 보듯 무관심하다. 3인칭으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책임지는 모습은 좀체 보기 힘들다.

간혹 자기 편의에 따라서 '피해자'와 '심판자', '관찰자'를 마구 오가는 '변칙적인' 역할 놀이에 심취한다. '윤창중 성추행' 사건 때 고위 관료들은 피해 당사자가 아닌 박 대통령에게 '셀프 사과'했다. 세월호 참사 때 '선장=살인자'라고 심판한 것도 박 대통령이다. 메르스 사태가 확산하자, 삼성서울병원장에게 사과받은 것도 박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위기 때마다 핑곗거리를 대고 희생양을 찾아 나선다. 세월호 참사는 유병언 탓이고, 메르스는 삼성서울병원 탓인 셈이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해야 할 사과마저 삼성에 '외주화'하느냐고 비아냥거린다.

모든 국민이 아는 사실, 박 대통령만 모른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5일 오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에 대한 규탄 회견을 하고 있다.
▲ 새정치연합, 박 대통령 거부권 행사 규탄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25일 오후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에 대한 규탄 회견을 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메르스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침묵'은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로 이어졌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과 같이 입법 취지를 위배한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이 헌법상 삼권분립 원칙을 위배했다는 것이다. 

국회는 국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행정부는 국회가 만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정부가 법의 의도와 다른 시행령을 제정했다면 국회가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국회의 헌법상 권한이다. 모든 국민이 아는 사실을 박 대통령만 모른 '척' 한다.

지난해 4월 16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7시간 만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방문해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메르스 사태 초기에는 환자의 숫자를 틀리게 말하는 초보적인 실수를 범했다. 세월호 참사 때 해양수산부는 청와대에 실시간 상황을 보고했다고 했다. 이번 메르스 사태의 진척 상황도 청와대에 보고가 됐을 것이다.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사실을 박 대통령만 모른다. 실수가 반복되면 실수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잘하고 싶은 사안'에만 관심을 보인다. 지난 3월 5일 마크 리퍼트 대사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동 순방 중이던 박 대통령은 사건 발생 33분 만인 새벽 3시 13분(현지시각) 보고를 받았다. 곧바로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직접 마크 리퍼트 대사에게 전화까지 걸었다.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지 15일 지나서야 청와대에서 긴급회의를 주재한 것과 대비된다.

지난 2004년 7월 김선일씨 피랍 사건 당시 박 대통령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 우리 국민 한 사람을 못 지켜낸 대통령은 자격이 없으며 나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 뒤, 실제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위태로울 때 국가와 대통령은 없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아직 진행 중인 메르스 사태가 또 그랬다. 강력한 초동대처와 지도력이 요구될 때 대통령은 무능의 바닥을 보이며 국민을 외면했다.

'부패청산'을 입버릇처럼 외치더니, 정작 대통령의 최측근 등 여권 8인방의 불법정치자금 수수 의혹에 관한 수사는 흐지부지되고 있다. 대신 공안총리를 내세워 공포정치를 예고했다. 세월호나 메르스에 무관심했던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 저지를 통한 자신의 권력유지에 집중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선거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이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25일 국무회의 발언)를 하고 있는 게 누구인가? 다시 한 번 '유체이탈'의 정점을 찍는다.

국민이 대통령을 믿지 못한다. 이것이 정부인가?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메르스, #박근혜, #유체이탈, #세월호
댓글4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