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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에는 종택인 석계고택 외에도 병암고택, 이원박고택, 영감댁, 백천한옥 등에서 한옥 민박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는 소설가 이문열이 어린 시절을 보낸 석간고택이다.
▲ 두들마을 30여 고택들 중 일부의 풍경 재령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에는 종택인 석계고택 외에도 병암고택, 이원박고택, 영감댁, 백천한옥 등에서 한옥 민박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진 오른쪽 아래는 소설가 이문열이 어린 시절을 보낸 석간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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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자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고시조 중 누가 지었는지 가장 궁금한 작품을 말해보라'면 나는 이 시조를 들고 싶다. 관용적으로 한자어를 많이 쓰던 시대의 작품이면서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내고 있고, 거칠 것 없이 흘러가는 운율의 곡선미 또한 나무랄 바 없이 정연한 감칠맛을 자랑한다.

게다가 속뜻으로 담겨 있는 지은이의 따뜻한 배려심과 반듯한 자연귀의 의식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물결처럼 흔든다. '꽃이 푸대접하면 어때, 잎에 들어 같이 자면 되잖아!'하고 속삭이는 작자의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이 이 경지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득한 청동기 시대 이래 '의식주'가 사람살이를 옭아매는 족쇄 노릇을 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의 물욕과 한계는 너무나 분명했다.

<어린 왕자>의 말처럼, 인간은 그것들을 수치화하여 서로를 차별하고 소외를 일으켜왔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이다. 인간은 칡과 등넝쿨처럼 뒤엉킨 사회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거래' 철학을 탄생시켰고, 나비처럼 청산으로 날아가는 꿈을 꾸며 살아왔다.

한옥 체험 민박의 멋과 여유를 잘 형상화한 '한옥 체험 민박' 안내 표지. 낮 동안만 두들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갈 계획으로 찾아온 나그네도 이런 펴지를 보면 문득 이 곳에서 한 밤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한옥 체험 민박의 멋과 여유를 잘 형상화한 '한옥 체험 민박' 안내 표지. 낮 동안만 두들마을을 둘러보고 돌아갈 계획으로 찾아온 나그네도 이런 펴지를 보면 문득 이 곳에서 한 밤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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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청산 가자'는 작자와 나비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그에 비하면 장자는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사실 장자는 나비가 되었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비는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나비로 돌아오지 못한다. 따라서 장자의 말은 자신이 사람인지 나비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는 뜻이다.

장자 이후 아득한 세월이 흘렀고, 인간의 삶은 점점 자연과 멀어졌다. 그런데 멀수록 그리움은 짙어지는 법이다. 과학문명의 세례를 잔뜩 받은 현대인들은 그 결과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고, 스스로가 나비의 변신이 아닌 줄도 확신하게 된 탓에 더욱 자연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자연 훼손의 주범인 인간이 어찌 자연의 대명사인 꽃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수 있을까마는, 자연의 모습을 닮은 잎(한옥)에서 한 밤 자는 체험을 소망하게 된 것이다.

1999년 11월 이후,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장계향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자 물질숭배에 지친 마음과 몸을 달래기 위해 두들마을을 찾는 현대인들이 늘어났다. 시멘트와 폐쇄의 상징인 아파트를 탈출하여 자연의 선과 빛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한옥에서 잠시나마 생의 시간을 누리고 싶어진 까닭이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두들마을을 개척한 이시명, 장계향 부부의 옛집 석계고택을 비롯, 병암고택, 영감댁, 이원박고택, 백천한옥 등을 손님들에게 언제든지 '꽃잎'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어찌 손님이 오는데 그에 합당한 인사가 없을까!

두들마을을 안내하는 표지. 하단에 장계향의 이름과 초상이 새겨져 있어 이 마을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들마을을 안내하는 표지. 하단에 장계향의 이름과 초상이 새겨져 있어 이 마을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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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은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이다. 김시습은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 등을 한문으로 썼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은 따로 있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이 바로 그것이다. 허균은 1569년에 태어나 1618년에 죽었다.

허균보다 약 30년 뒤인 1598년에 태어나 약 60년 뒤인 1680년에 세상을 떠난 장계향도 우리나라에 최초의 문화유산 한 가지를 남겼다. '음식의 맛을 내는 방문'이란 뜻의 저술 <음식 디미방>으로, 이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음식 조리서이자 아시아 전체에서도 여성이 쓴 최초의 음식 조리서이다(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음식조리서는 김유와 그의 손자 김령이 1491-1641년에 걸쳐 공저한 <수운잡방>). 장계향이 무려 70세가 넘은 고령에 집필한 이 책에는 146가지의 전통 음식 조리 방문이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51종의 전통주를 빚는 법도 실려 있다.

장계향, 이시명 부부가 두들마을로 입향한 때는 1640년(인조 18),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직후였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엎드려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으며 항복 의례를 치렀다.

이 일을 겪으면서 이시명은 세상에 뜻을 잃었고, 이윽고 경상도 영양의 석보 원리로 숨어 들어갔다. 부부는 돌[石]과 계곡물[溪] 위에 집을 짓고 택호를 석계(石溪)라 붙였다. 깊은 산골에 자리잡은 덕분에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도 불타지 않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91호로 지정될 수 있었던 석계고택에는 그렇게 외침에 대한 정신적 저항의 역사가 서려 있다.     

이시명 장계향 부부가 1640년 두들마을에 처음 들어와 지은 석계고택(경북도 민속자료 91호)의 사랑채(왼쪽)와 안채. 이 집에서도 고택 숙박체험을 할 수 있으니 나그네로서는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이시명 장계향 부부가 1640년 두들마을에 처음 들어와 지은 석계고택(경북도 민속자료 91호)의 사랑채(왼쪽)와 안채. 이 집에서도 고택 숙박체험을 할 수 있으니 나그네로서는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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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서당(경북도 문화재자료 79호)은 서계초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 탐구에 전념했던 이시명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762년-1771년에 걸쳐 건립했다.
 석천서당(경북도 문화재자료 79호)은 서계초당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 탐구에 전념했던 이시명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762년-1771년에 걸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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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고택은 장계향이 83세인 1680년에 타계할 때까지 실제로 거주했던 집이다. 남편 이시명은 그보다 6년 전인 1674년 85세를 누리던 중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홀로 남은 장계향은 넷째아들 이승일과 함께 끝까지 이 집을 지켰다.

석계고택은 각각 일자형인 사랑채와 안채가 앞뒤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두 채의 한옥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정겹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병자호란의 국치를 마음으로 참지 못해 은거에 들어간 이시명과, 살아 평생 가족과 세상사람들을 위해 헌신했던 장계향 두 사람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집짓기에 투영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석계고택은 사랑방, 사랑마루, 마구간, 창고방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뒤로 흙담이 놓여 있어 안채와 사랑채의 뜰을 단정하게 구분해준다. 그래서 두 집이 함께 아늑하면서 소박하다. 어느 날 두들마을을 찾은 나그네가 석계고택에서 하룻밤을 머문다면, 그는 병자호란의 슬픈 역사에 마음으로 항거한 이시명의 의기와, <음식 디미방>을 꼼꼼하게 집필한 장계향의 향기를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으리라.  

두들마을에는 장계향을 기려 건축된 한옥들이 많다. 장계향의 가르침에 따라 음식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관(왼쪽 위), 전시관(왼쪽 아래), 예절교육관(오른쪽 위) 등이 그들이다. 아시아 최초의 여성 집필 음식 조리서인 <음식 디미방>을 남겨 음식전문가 이미지가 강력한 장계향 관련 건물로 예절관이 세워진 것은 그녀가 자녀교육, 시와 서화 창작, 사회봉사활동 등에서 신사임당에 필적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집이 아닌 다른 하나의 사진은 그녀를 기려 세워진 비석이다.
 두들마을에는 장계향을 기려 건축된 한옥들이 많다. 장계향의 가르침에 따라 음식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관(왼쪽 위), 전시관(왼쪽 아래), 예절교육관(오른쪽 위) 등이 그들이다. 아시아 최초의 여성 집필 음식 조리서인 <음식 디미방>을 남겨 음식전문가 이미지가 강력한 장계향 관련 건물로 예절관이 세워진 것은 그녀가 자녀교육, 시와 서화 창작, 사회봉사활동 등에서 신사임당에 필적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집이 아닌 다른 하나의 사진은 그녀를 기려 세워진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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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의 이름은 '두드러지다'에서 왔다. 그러므로 이름을 듣는 순간, 어원을 해석하는 데 뛰어난 감각을 갖춘 독자는 두들마을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두들마을의 행정 명칭은 원리로, 조선 고종 때 국립병원인 광제원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한자식 동명이다. 이는 향교가 있던 마을을 교촌, 사찰이 있던 마을을 사촌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두들마을에는 30여 채의 전통 가옥이 있다. 그 중 경상북도 민속자료 91호인 석계고택, 민속자료 114호인 주곡고택, 문화재자료 285호인 유우당, 문화재자료 79호인 석천서당, 문화재자료 603호인 석간고택 등이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1675년(숙종 1)에 지어진 주곡고택은 갓 결혼한 신랑신부가 기거하는 신방에 대청쪽으로는 문을 내지 않아 독립성을 갖도록 배려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런가 하면, 두들마을에는 비지정문화재이지만 운치와 위용이 만만하지 않은 고택들도 상당수 있다. 민박 체험 한옥으로도 활용되는 병암고택 역시 그 중 한 채인데, 아궁이가 10개나 되고, 마을 안 고택 가운데서 가장 높은 대청마루를 지니고 있어 앉으면 저절로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자연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처음부터 대문없이 집을 지었기 때문에 지금도 넓은 마당은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까지 이어진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114호인 주곡고택의 모습. 왼쪽 사진은 영양군 홈페이지의 것이고, 오른쪽은 필자가 찍은 것이다. 같은 건물이 어떻게 촬영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필자는, 한옥 사진에는 담장과 마당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생각이 반영된 오른쪽 사진이 더 낫다고 믿는다. 이 글의 독자들은 어떻게 보실까?
 경상북도 민속자료 114호인 주곡고택의 모습. 왼쪽 사진은 영양군 홈페이지의 것이고, 오른쪽은 필자가 찍은 것이다. 같은 건물이 어떻게 촬영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필자는, 한옥 사진에는 담장과 마당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생각이 반영된 오른쪽 사진이 더 낫다고 믿는다. 이 글의 독자들은 어떻게 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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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에는 장계향과 고택체험 외에도 나그네들의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관광 상품'이 한 가지 더 있다. 소설가 이문열이다. 아버지가 월북한 이후 어머니와 그가 함께 남아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 석간고택이 유우당 왼쪽에 남아 있고, 직접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또한 우람한 자태를 뽐내면서 손님들을 맞이한다. 광산문학연구소 왼쪽에는 '문학 카페 <두들 책사랑>'이라는 가벼운 이름을 내건 한옥도 기역자 모습을 한 채 나그네들을 기다린다.

영양군청은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문향의 고장 영양'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문향은 '글의 향기'라는 뜻이다. 주실마을의 조지훈, 감천마을의 오일도, 그리고 두들마을의 이문열이 영양 출생이니 그렇게 자부심을 곧추세울 만도 하다. 게다가 이문열의 집안 선대인 장계향 역시 어린 나이에 지은 한시 외에도 가사 작품, 서예, 그림 등을 남긴 예술인이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보태어 말하랴.

이문열이 자신의 고향에 세운 광산문학연구소(왼쪽)는 그가 집필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수시로 세미나, 학술토론회, 문학캠프 등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른쪽 집은 광산문학연구소 오른쪽에 새로 건립된 '문학 카페'이다.
 이문열이 자신의 고향에 세운 광산문학연구소(왼쪽)는 그가 집필을 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수시로 세미나, 학술토론회, 문학캠프 등이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오른쪽 집은 광산문학연구소 오른쪽에 새로 건립된 '문학 카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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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주차를 하면 바로 '음식디미방 체험관'이 눈앞에 있다. 흔히 하는 말로 으리으리한 기와 저택이다. 체험관을 등지고 정면으로 걸으면 두들마을 입향조인 이시명 장계향 부부가 짓고 살았던 석계고택이 나온다. 다시 석계고택을 등지고 걸으면 마을 쉼터가 있고, 장계향을 기려 세워진 유적비가 기다린다.

유적비 앞에 병암고택이 있고, 그 오른쪽에 석천서당이 지난날 유생들과 아이들의 책읽는 소리를 간직한 채 고즈넉히 서 있다. 서당 마당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면 이문열의 유년기가 서려 있는 석간고택이 맞은편에 서 있다. 석간고택 오른쪽 집이 유우당이고, 유우당 뒤로 '정부인 안동장씨 예절관'이 있으며, 되돌아나와 다시 왼쪽으로 걸으면 석계고택 바로 뒤편 지점에 세워져 있는 이문열의 광산문학연구소와 북카페 <두들 책사랑> 한옥을 보게 된다.

북카페를 오른쪽으로 감고 돌아서서 걸으면 두들마을을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두들광장에 닿는다. 여기서 보면 두들마을이 한반도 전체의 지형처럼 동고서저(東高西低)라는 말이 대뜸 이해된다. 그렇지 않아도 평지 중 우뚝 두드러진 곳에 형성된 두들마을을 재삼 더 높은 곳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두들광장에서 주곡고택까지 대략 2천 걸음가량 이어지는 이 산책로는 야생화와 소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로 가득하다. 길 안내판을 보니 '슬로우 걷기 체험'이라 적혀 있다.    

음식디미방 체험관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에 햇살이 가득하다.
 음식디미방 체험관으로 들어가는 열린 문에 햇살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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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장계향이 전수해준 전통음식과 그녀가 창안한 음식을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을 하고 싶은 분은 경상북도 영양군청 문화관광과(054-680-6101,6102)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불쑥 찾아간다고 먹을거리를 내놓는 식당이 아니기 때문에 예약은 필수입니다. 홈페이지는 <음식디미방>, <영양군청>을 참조하면 된다. 나그네가 되어 두들마을에서 고택체험을 하고자 하시면 <두들마을> 홈페이지를 참조 바랍니다.



태그:#두들마을, #장계향, #이문열, #석계고택, #한옥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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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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