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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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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22일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선일섬유, 효성물산노조 간부들이 무엇에 쫓기듯 조심스럽게 청계피복노조 사무실로 쓰고 있는 평화의 집으로 왔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청계피복 노조간부들과 한 자리에 모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여기는 공개된 장소이기 때문에 보안상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정보 당국이 알고 덮칠 수도 있으니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깁시다."

손님을 맞이하는 입장인 청계노조 측에서 제안을 했다. 이에 따라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자를 따라 나섰다. 이들은 평화의 집 근처에 있는 어느 봉제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한밤중에 공장 바닥에 빙 둘러앉은 20명가량의 노조간부들은 긴장 속에서 회의를 시작했다.

"대우어패럴 자본은 올봄 임금인상 파업 투쟁을 주도한 우리 노조간부를 고소, 고발하고 정권은 이것을 빌미로 김준용 위원장을 비롯 간부 3명을 연행 구속시켰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대우어패럴 단위노조에 대한 탄압에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후 민주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우리가 그동안 공동으로 교육하고, 공동으로 임금인상투쟁을 전개했던 것처럼 공동으로 맞서 투쟁해야 합니다."

대우어패럴 노조 측의 제안을 주제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토론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그동안 청계피복노조 복구 이후 새롭게 결성된 자주적인 노동조합들 간에 긴밀한 교류와 공동투쟁을 해 왔던 노동조합들이어서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었다. 결의와 구체적인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이날 회의 결과 6월 24일 오후 2시를 기점으로 참여 가능한 사업장은 동맹파업을 하기로 했다.

구로공단 등지에서 민주노조 결성하기 시작

사실 이날 이런 결의까지 도출해 내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목적의식적인 활동이 있었다. 1984년 청계피복노조 복구에 이어 전개된 합법성쟁취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을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한테 상당한 자신감을 주었다. 특히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을 겪은 뒤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투신한 인사들과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1970년대 민주노조의 성과와 한계를 인식하면서 현장 활동을 전개 해 왔다.

이들은 1984년 4월 청계피복노조 복구에 이어 구로공단 등지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9일 대우어패럴, 6월 11일 선일섬유 노조, 효성물산 등이 결성되었다. 이들 민주노조는 서로 합동교육을 통한 교류를 했었다. 이것은 1970년대 민주노조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실천한 것이다. 즉 70년대 기업별 노조로서 각개 격파당한 것에 대해 연대의 틀을 굳건히 다지기 위한 의식적인 활동이었다.

이어 1985년 봄 임금인상투쟁은 구로공단 내 노조들이 단체교섭과 파업 시기를 맞추어 공동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대우어패럴 노조 김준용 위원장은 1970년대 말 청계피복노조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하다가 군에 입대한 뒤 제대를 하고 바로 구로공단 대우어패럴에 입사를 해 노동운동을 한 청계출신이다.

그는 이미 군 입대 전에 노조활동과 야학을 통해 의식화 되었고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구로공단 규모가 큰 공장에 취직해서 노조를 만들고, 기업별 노조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활동을 해 왔던 것이다.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진짜 목적

이번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구속은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대우어패럴 노조 하나를 깨는 게 목적이 아니라 민주노조 모두를 없애는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에 그동안 연대활동을 해 왔던 노조간부들은 동맹파업을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동맹파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조직을 투쟁체제로 전환하고 사업장별로 의견을 다시 모아 하루 만에 동맹파업에 돌입했다.

마침내 6월 24일 왔다.

"노조간부 석방하라"
"민주노조 탄압 말라"
"노동악법 개정하라"
"집시법․ 언기법을 폐지하라"
"노동부장관 물러나라"

구로공단에 이런 구호가 울려 퍼졌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오전에 먼저 파업에 들어갔다. 이어 오후 2시에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3개의 민주노조들이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청계피복노조는 영세사업장이 모여 지역으로 조직된 노조로서 파업으로 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민주 단체와 민주적인 노동단체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 내고 가두시위와 농성으로 연대투쟁을 했다.

이렇게 시작된 4개 노조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물이 끊기고 전기가 차단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6일간이나 투쟁을 했다. 투쟁은 들불처럼 확산되어 29일까지 5개 사업체 6개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벌였고, 힘이 못 미치는 가리봉전자, 부흥사, 세진전자, 롬 코리아, 남성전기, 삼성제약 등 5개 사업장에서는 잔업 거부 후 농성, 중식거부 같은 방식으로 지지투쟁을 벌였다.

구로공단 곳곳에서는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가두시위가 벌어지고 선전물이 배포되어 공단 노동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또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노동운동탄압저지투쟁위원회 같은 노동운동단체와 청년, 농민, 여성의 여러 운동세력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라도, 경상도에서 지지농성,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때 청계피복노조 '평화의 집'은 구로 동맹파업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하는 진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파업을 지지하는 농성자들, 파업으로 인해 오고 갈 곳 없는 노동자들이 대거 평화의 집으로 몰려 왔다.  이소선은 이들을 맞이하여 격려하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어머니, 저희들이 몰려와서 힘들지요."
"이거 하려고 집 산 거 아니냐. 하나도 힘 안 든다. 노동자들로 이 집이 미어터지니 기운이 솟구친다."

평화의 집으로 몰려온 노동자들은 이소선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지하여 투쟁에 나섰다. 청계피복노조도 확실하게 연대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집행부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청계피복노조를 대표할 수 있는 노조간부를 선정해 그가 파업 중인 사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 탄압의 책임이 있는 기관을 점거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부는 당시 신민당 종로 지구당을 점거하고, 일부는 청계피복노조 사무장인 김영대가 구로공단 노동자들을 이끌고 노동청 중부지방사무소를 점거했다.

6일간 2500여 명이 참가한 동맹파업

6월 29일,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학생 18명이 식량과 의약품을 갖고 진입하자, 농성을 해체시킬 준비를 하던 자본가 측은 이를 기화로 폭력단 500여 명을 동원해 농성자들을 폭력으로 해산시켰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과 다른 3곳에서 지지농성을 하던 민중운동세력들은 대우어패럴 농성이 강제 해산되자, 오후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했다. 또 6월 30일에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효성물산 조합원 36명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6일간 2500여 명이 참가한 동맹파업은 구속자가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하여 해고 15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피해가 있었다. 이 중에는 청계피복노조 김영대 사무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소선은 김영대의 구속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김영대는 아프리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에다 갓난아이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대의를 위해서 기꺼이 구속의 길에 나선 것에 대해 미안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구로동맹파업은 정치파업의 성격을 띤 투쟁으로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한 연대투쟁을 의식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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