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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드라마 <추노> 포스터.
 KBS 드라마 <추노> 포스터.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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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진사께서 횡계 변을 당하니 이 거주에 양난이 올습니다. …이제 생을 거하여 활로가 요원하니 매사마골에 우를 범하지는 마십시다."

KBS 드라마 <추노>에서 양반 김 진사는 이처럼 다른 양반과 대화를 나눈다. 당연히 시청자들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작가는 쉬운 우리말로 번역한 자막을 화면으로 보여줬다.

이러던 김 진사가 낫을 들고 찾아온 업복이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다. 이어 그는 다음처럼 자막 또는 '한자병기'가 필요 없는 말을 던진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친 현대판 김 진사들

우리나라에서 한자로 돈 버는 일은 죽어가는 사업이 되고 있다. 1970년 이후 초중고 교과서에서 한자병기가 사라진 뒤 공문서도 신문도 사실상 한글전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려주세요"를 외치던 한자산업이 요즘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고 있다. 새로운 '임금'을 만났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지난해 9월 초중고 교과서 한자병기 방안을 내놨다. 2018년부터 적용되는 교과서부터 한글과 함께 한자도 같이 쓰겠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는 필수학습한자도 새로 제공하기로 했다.(관련기사 : "한자병기 추진 교육부, 주시경 선생 우롱 말라")

당연히 한자 사교육업체들은 남몰래 웃고 있다. 살길이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 한자급수·자격증 업체들이 신났다. (관련기사 : 교과서 '한자병기' 추진 전후로 한자자격시험 급증) 전국 초중고 학생과 일반인 대상으로 이런 시험을 실시하는 곳은 사실 이름만 그럴듯할 뿐 사교육 업체이거나 준(準)사교육 업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한자급수·자격증 시험은 올해 5월 현재 83종이다. 이 가운데 국가공인은 12종이며 나머지는 민간자격시험이다. 문제는 현 정부가 '한자병기' 움직임을 보인 뒤 이런 한자시험이 '먹이를 앞에 둔 자라가 머리 내밀 듯' 재빠르게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머리를 내민 시험은 전체의 36.1%인 30종에 이른다. 올해에만 벌써 6개가 새로 생겼다.

그런데 이런 한자시험을 만든 업체들이 한쪽에서는 돈 벌이를 하면서, 한쪽에서는 한자병기운동을 벌이고 있으니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현재 초중고 교과서 한자병기 운동의 몸통은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회장 이한동 전 국무총리)다. 이 단체 상임공동대표를 김아무개 한국어문회 이사장이 맡고 있는데, 한국어문회는 전국 최대 규모의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을 주관하고 있다. 이 단체 부설 한국어문교육원은 한자지도사자격검정시험과 함께 전국 사설 한문학원을 대상으로 인정학원제도까지 운영하고 있다.(관련기사 : 한자병기 요구 단체들, 한자로 '돈벌이'?)

한국어문회는 오는 5월 23일 제69회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을 치른다. 검정료는 급수별로 1만5000원∼4만 원이다. 전국 수백만 명의 초중고생들이 응시한 것으로 추산되는 이 시험은 한자 사교육 유발 지적을 받아왔다. 네이버 책 사이트에서 검색한 결과 제목에 '전국한자능력검정시험'이라고 쓰인 시험 대비서만 161권에 이르렀다.

유아 대상 유료 강좌까지 함께하는 한자병기 주도 단체

한자병기를 앞장서 외친 <조선일보>의 자회사인 조선에듀케이션도 유료 한국한자어능력인증시험을 주최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디 이뿐인가?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 자체가 한자 통신판매업을 겸하는 단체인 전통문화연구회와 손잡고 한자 사교육을 벌이는 사실 또한 들통 났다. 이들은 유료 한자 사교육 사업인 '사이버 서당'을 열어놓고 초등학생은 물론 유아 대상 강좌까지 진행했다.(관련기사 : '한자병기' 주도 최대 조직, 사교육업체와 손잡아)

어디 이뿐인가? 이한동 전 총리가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이 전통문화연구회는 한자자격시험인 한자한문능력검정을 새로 만들어 올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등록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국제성취도비교평가(PISA) 결과 글자 읽기 능력이 세계 최고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에게 한자 '병기' 교과서는 '흉기'가 될 것이 뻔하다. 눈을 어지럽혀 읽기능력을 가차 없이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 이 흉기를 벼르는 곳은 교육부지만 배후조종세력은 한자 업체들일 가능성이 크다. 한자 업체들은 왜 한자병기 운동에 뛰어들었나? 한자 '병기'는 돈 벌이를 위한 '호기'인데 누가 나서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교육>(www.uriedu.co.kr)에 쓴 칼럼을 깁고 더한 것입니다.



태그:#한자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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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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