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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을 맞아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은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전날 만난 '스페인 광장'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럽인은 왜 그렇게 광장을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인에게 광장은 좀 더 넓은 의미를 가진 공간이라고 합니다. 아고라(agora)로서의 기능은 물론 문화와 예술의 공간이기도 하고, 기다림과 만남의 공간, 놀이와 축제의 공간, 시장으로서의 공간, 또 먹고 마시는 공간, 말하자면 생활의 공간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제게 광장이란 두 가지 이미지뿐이었거든요. 이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같은 대학 시절의 '민주 광장'이나 한 때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고 열정적인, 때론 간절했다고 여겼던 '시청 앞 광장'이 그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아고라적이고, 그래서 때론 그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닫혀 있는', 열린 광장인 셈이지요. 광장에 대한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이탈리아 각 도시마다 자리 잡고 있는 주요 광장을 여정에 넣긴 했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카스파 반 비텔 '로마의 나보나 광장' 개인소장 
Caspar van Wittel ? private collection? The Piazza Navona, Rome (1699)
▲ 로마의 나보나 광장 카스파 반 비텔 '로마의 나보나 광장' 개인소장 Caspar van Wittel ? private collection? The Piazza Navona, Rome (1699)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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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람들, 왜 광장을 좋아할까?

그래서일까요? 전날 만났던 '스페인 광장'과 '포폴로 광장'도 솔직히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단지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는 곳이라서가 아닙니다. 위에서 말했던 다양한 기능을 가진 광장이 실제로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눈앞에 나타난 '나보나 광장'은 그런 유럽 광장의 전형인 듯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전차 경기장 터 위에 만들어진 길쭉한 광장 한 곳에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아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 시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광장 주위를 둘러싼 오래된 카페들과 식당들엔 사람들이 느긋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곳곳에 악기를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사람들, 혼자서 책을 읽거나 휴대 전화를 보는 사람들, 물건을 파는 사람들, 피켓을 들고 자기들의 주장을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객까지. 그들 모두 광장 그 자체를 호흡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도 그들 사이에 함께 앉아 '나보나 광장'을 느낍니다.

도로를 건너야 갈 수 있는(때로는 차벽까지 넘어야 갈 수 있는) 우리네 광장과는 달리 건물들로 둘러싸여 누구나 쉽게, 걸어서 갈 수 있는 이탈리아 특유의 광장, 즉 'Piazza'가 어떤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로마의 광장에는 뛰어난 예술 작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나보나 광장'의 중심에는 베르니니가 제작한 '네 강의 분수(Fontana dei Quattro Fiume)'가 있습니다.

베르니니 '네 강의 분수' 로마 나보나 광장.
▲ 네 강의 분수 베르니니 '네 강의 분수' 로마 나보나 광장.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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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강의 분수'는 당시 세상에 알려진 커다란 네 개의 강, 즉 유럽의 다뉴브, 아프리카의 나일, 아시아의 갠지스, 남아메리카의 라플라타를 의인화한 4명의 거인상과 각 대륙을 대표하는 동식물들, 그리고 중앙의 오벨리스크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엔 팜필리 가문을 상징하는 비둘기 상이 얹혀 있습니다.

광장을 재조성했던 이가 바로 팜필리 가문 출신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앞서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에서 초상화로 만난)였으니, '네 강의 분수'는 결국 교황 자신과 가문의 권위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지요. 거기다 집집마다 수도 시설이 보급되기 전인 당시의 시민에게 분수를 통해 깨끗한 물을 공급할 수도 있었으니 교황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일석이조였을 겁니다.

비록 그런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네 강의 분수'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폄하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통한 가톨릭 권위의 부활, 그것이 바로크 미술의 본질이니까요.

보로미니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Chiesa di Santa Agnese in Agone)’, 로마 나보나 광장. 보로미니의 아그세스 성당과 베르니니의 네 강의 분수가 함께 있습니다.
▲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 보로미니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Chiesa di Santa Agnese in Agone)’, 로마 나보나 광장. 보로미니의 아그세스 성당과 베르니니의 네 강의 분수가 함께 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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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강의 분수' 맞은 편엔 베르니니의 라이벌 보로미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Chiesa di Santa Agnese in Agone)'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알몸으로 순교를 당할 위기에 기적적으로 머리카락이 길어져 온몸을 감쌌다는 성녀 아그네스. 그녀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성 아그네스 성당'은 오목하고 볼록한 곡선들과 수직의 기둥들, 그리고 중앙의 둥근 돔이 조화를 이뤄 '참 예쁘게 생긴 성당'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마침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 성당 내부를 보진 못했지만, 로마인의 일상 속에 분수와 성당으로 살아있는 바로크의 두 거장, 베르니니와 보로미니. 그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길게 쭉 뻗은 '나보나 광장'을 한 바퀴 돌아 '넵튠의 분수'와 '모로의 분수'를 훑어보고 발길을 옮깁니다. 원래 일정과 달리 다시 베르니니를 만나러 갑니다. 유유히 흐르는 테베레 강을 따라 강변을 걷습니다. 멀리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이 보입니다.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끼고 아껴둬야 할 곳들입니다. 오늘은 테베레 강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산탄젤로 다리(Ponte Sant'Angelo)'까지입니다.

산탄젤로 다리에서 본 테베레강의 모습입니다.
▲ 테베레강 산탄젤로 다리에서 본 테베레강의 모습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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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였던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과 로마의 중심부를 잇기 위해 만들었던 '산탄젤로 다리'는 원래 이름이 '하드리아누스의 다리'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7세기경 영묘 지붕에 천사가 나타나 로마에 창궐했던 흑사병을 끝냈다는 전설과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영묘와 다리에 '산탄젤로', 즉 '성 천사'라는 이름을 하사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베르니니의 천사상들이 서 있는 산탄젤로다리를 건너가면 산탄젤로 성이 나타납니다.
▲ 산탄젤로성과 산탄젤로 다리 베르니니의 천사상들이 서 있는 산탄젤로다리를 건너가면 산탄젤로 성이 나타납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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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 건널 수 있는 '산탄젤로 다리'에는 세계인의 물결이 이어집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테베레강과 '산탄젤로 성'과 '산탄젤로 다리'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파란 하늘과 구름 아래 흐르는 회색빛 강, 그 위에 그림처럼 놓여 있는 다리와 성까지... 누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여기, 베르니니가 있습니다. 그의 천사들이 있습니다.

'산탄젤로 다리' 위에 빛마저 환상적인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춤추듯 서 있는 천사들. 그들은 모두 베르니니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천사들은 모두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도구들(십자가, 면류관, 못, 채찍, 창 등)을 들고 있는데, 특히 '면류관을 든 천사'와 '두루마리를 든 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베르니니가 제작했다고 합니다(현재 다리 위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산탄드레아 델라 프라체 성당'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베르니니를 확인하기엔 충분합니다).

베르니니 '면류관을 든 천사' 로마, 산탄젤로 다리 - 원본은 ‘산탄드레아 델라 프라체 성당’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면류관을 든 천사 베르니니 '면류관을 든 천사' 로마, 산탄젤로 다리 - 원본은 ‘산탄드레아 델라 프라체 성당’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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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구이디 '창을 든 천사'(베르니니 디자인) 로마, 산탄젤로 다리
▲ 창을 든 천사 도메니코 구이디 '창을 든 천사'(베르니니 디자인) 로마, 산탄젤로 다리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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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니의 조각 예술... 정말 아름답다

한 명 한 명, 천천히 베르니니의 천사들을 놓치지 않고 감상합니다. 미술관이나 성당이 아닌 사방이 트인 장소에서, 그것도 눈부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만나는 베르니니의 천사들. 그들은 정말 소름돋는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실제 천사가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릅니다. 전날 '보르게세 미술관'과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서 만났던 베르니니는 조각 예술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보여줬다면, 오늘 이곳 '산탄젤로 다리'에서 만난 베르니니는 '나보나 광장'의 분수에 이어 사람들 속에 살아 있는 조각 예술의 숨결을 보여줍니다. 비현실에서 현실로, 다시 비현실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정말 바로크의 향연입니다.

산탄젤로 성에서 바라본 산탄젤로 다리의 천사상들입니다. 비현실적인 현실입니다.
▲ 산탄젤로 다리의 천사상들 산탄젤로 성에서 바라본 산탄젤로 다리의 천사상들입니다. 비현실적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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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니의 천사들과 멀리 보이는 '성 베드로 성당'을 뒤로 하고 오늘의 마지막 일정, '예수 성당(Chiesa del Gesu)'으로 향합니다.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피하며 길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길을 잘못 잡은 탓일까요? 어떤 골목을 지나는데 갑자기 시장통이 나타납니다.

여기가 어딜까 확인하려고 아이패드를 꺼내는 순간, 눈 앞에 바로 '그'가 떡하니 서 있습니다. 브루노! 모든 자유인의 선구자, 사상의 자유를 위해 화형 당한 그 브루노 말입니다. 갑자기 온몸이 전율합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숙연한 감동 때문에 말 그대로 모골이 송연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는 이성적인 인간의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창조적인 사고를 온몸으로 실천하다가 이단 혐의로 한 세기가 변하는 시점에 화형 당한 인물입니다.

브루노의 말에 따르면,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통치하는 수단이 종교라면 철학은 스스로 행동하는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학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신앙보다 존엄하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서로 간의 이해와 자유로운 토론이 전제된다면 모든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우주는 무한하고 태양계와 비슷한 수 많은 세계로 이뤄져 있으며, 성경은 천문학적 함의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에도 가장 진보적인 종교 철학자들이나 주장할 만한 관념들을 지금부터 400여 년 전,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장했으니 그는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겠죠. 결국 브루노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명령에 따라 "선고를 받는 나보다 선고를 내리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로마, 피오리 광장(꽃의 광장) 중심에는 브루노의 아름다운 정신이 살아있습니다.
▲ 브루노 상 로마, 피오리 광장(꽃의 광장) 중심에는 브루노의 아름다운 정신이 살아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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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00년이 지난 1899년, 브루노가 화형 당한 자리, '캄포 데 피오리(Compo de Fiori)', 즉 '꽃의 광장' 중앙에 빅토르 위고와 입센, 바쿠닌 등이 자유로운 사상을 위해 순교한 그를 기려 가장 음울하고, 가장 아름다운 동상을 건립합니다. 동상 건립에 반대해 당시 여든 살 고령이었던 교황 레오 13세가 성 베드로 광장에서 무언의 금식기도까지 올렸다고 하니 사상의 자유를 쟁취하는 길이 얼마나 지난한 여정인지 알 수 있습니다.

브루노의 죽음 300년 후 빅토르 위고와 입센, 바쿠닌 등이 주도하여 건립한 브루노의 동상. 자유로운 사상을 위해 순교한 그의 정신이 느껴집니다.
▲ 브루노 상 브루노의 죽음 300년 후 빅토르 위고와 입센, 바쿠닌 등이 주도하여 건립한 브루노의 동상. 자유로운 사상을 위해 순교한 그의 정신이 느껴집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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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이 '피오리 광장'과 브루노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든 탓에 너무 일찍 그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찍 울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상 아래서, 그를 찾아온 어른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그대가 불에 태워짐으로써 그 시대가 성스러워졌노라"는 글귀를 보고 말입니다.

신의 영광을 아름답게 묘사한 베르니니의 천사상과 음울하지만 아름다운 정신을 형상화한 브루노의 동상. 두 극단의 아름다움을 연이어 만나고 나니 왠지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제 다시 인파를 헤치고 원래의 마지막 일정, '예수 성당(Chiesa del Gesu)'으로 향합니다. 반종교 개혁의 첫 번째 성당이며, 바로크 성당들의 모델인 이 '예수 성당'에서는 종일 이어졌던 바로크 미술의 또 다른 걸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거둔 승리',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가 그린 대형 천장화입니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예수 이름으로 거둔 승리' 로마, 예수 성당 - 건물 장식과 절묘한 입체감을 이루는 바로크 양식 특유의 대형 천장화입니다.
▲ 예수 이름으로 거둔 승리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예수 이름으로 거둔 승리' 로마, 예수 성당 - 건물 장식과 절묘한 입체감을 이루는 바로크 양식 특유의 대형 천장화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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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명암 대비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시 효과, 천장의 틀을 부수고 튀어나올 것 같은 역동적인 인물 묘사. 앞서 '성 이그나치오 디 로욜라 성당'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다른 느낌입니다. 놀랍도록 화려하지만 브루노를 만난 후라 그런지 감흥보단 시각적 아름다움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끝내고 호텔에 들어서자 나는 마치 신병을 앓은 것처럼 온몸에서 땀이 납니다. 땀을 식히려고 샤워를 하는데 그제야 발뒤꿈치에 커다란 물집이 잡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정신없이 걸었던지 발이 아픈지도 몰랐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2014년 12월 7일은 소름과 고름이 함께 한 하루였습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덧붙이는 글 | (3편으로 이어집니다)
필자는 2014년 12월 5일부터 2015년 1월 4일까지 이탈리아 미술 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나보나광장, #산탄젤로, #피오리광장, #로마,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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