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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는 잘 몰라도 이 말은 잘 안다. 영문 문장까지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다. 아마 중학교 영어책에서 배웠을 터. 시험에 나올지도 모르는 기출문제라며 철저히 암기해두었을 것이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 책 제목이기도 하다.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명언으로 전해진다.

로마를 생각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 이 말 또한 분명히 새겨두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그렇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리라. 대제국 로마는 건설하는 데 장구한 시간과 막대한 노력이 투자됐다. 기원전 100년경부터 600여 년 동안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까지 패권을 움켜쥔 대제국, 강대국이 로마였다. 숙명적으로 로마와 국경을 맞댄 모든 국가는 로마보다 국력이 약했다. 그 앞에서 감히 기를 펴지 못했다. 어김없이 지배당했다.

로마가 대국으로 불리는 건 물리적 군사력만 보고 평가하는 게 아니다. 로마는 문화대국이었다. 군사적, 경제적 국력에 걸맞게 문화도 융성했다. 오늘날 이탈리아 국가수입의 3분의 1이 조상이 물려준 찬란한 문화자산에서 창출될 정도다.

굳이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 등 이탈리아 전역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로마 시내만 해도 콜로세움, 산탄젤로 성, 포로 로마노, 판테온 신전, 바티칸 공화국, 스페인 광장 등 눈부신 문화자산, 관광자원이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 가쁘다. 

그런 위대한 로마제국을 건설하려니 로마는 자연스레 토건 대국이 되었다. 로마의 토건기술은 한국의 4대강 토목공사, 새만금 토목공사의 그것처럼 천박하거나 사악하지 않다. 토목과학, 토목예술이라 불러 마땅한 경지에 이르렀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당시 로마가 다스린 유럽의 도시에 가면 로마가 건설한 유적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스위스 취리히 도심 한복판에 아직 남아있는 고대 로마시대의 골목길을 약간 흥분해 걸은 적이 있다. 정작 이탈리아 로마에서보다 이국의 취리히에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문장의 진의를 실감하고 전율했다.

고대 로마의 도로는 일단 군사도로다. 로마 군단의 신속한 이동을 위한 전략적 목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유럽과 세계의 문화와 경제를 전파하고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로마는 그 허브(hub) 역할을 한 셈이다. 로마의 군사들처럼 단단한 돌로 다지고 다져진 '로마의 길'이야말로 고대 로마의 영광을 액면 그대로 증거한다.

로마는 이렇게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마술을 부리지 않고서야 하루 아침에 이런 거대한 도시와 건축물을 건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지 않고서야 로마의 도로나 보도마다 그토록 단단한 돌로 포장해 천지사방으로 사통팔달 길을 뚫어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로마의 휴일,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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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0년 된 판테온신전의 콘크리트 돔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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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공항을 빠져나와 로마 시내로 들어오면서 그 두 명문의 뜻이 비로소 충분히 숙지되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로마', '모든 길을 통하는 로마'가 차창 밖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청소년기에 영어공부를 하느라 사무적으로 익혀둔 죽은 문장들이 비로소 꿈틀거리며 살아났다. 그 말이 전혀 과장되거나 허튼 소리가 아님을 얼른 알아챘다.

공항에서 숙소 홀리데이 인(Holiday Inn) 호텔에 닿기까지 장장 2시간여 동안 '이탈리아 대중교통 체험'을 하면서 느낀 로마의 강렬한 첫인상이다. 공항터미널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테르미니(Termini)역에서 전철로 1차 환승, 코넬리아(Cornelia) 역에 내려 246번 버스로 2차 환승하고 아우렐리아(Aurelia) 정류장까지 가능 동안 내내.

현대의 로마 시내를 스치며 느낀 솔직한 감상은 '로마는 영등포나 청량리스럽다'는 것. 정류장마다 줄을 서지 않는 무질서, 길거리에 널린 담배꽁초 쓰레기와 낡은 벽의 지저분한 낙서, 러시아워의 신도림역을 방불케하는 혼잡한 지하철역, 지치고 고단해보이는 시민들의 무표정,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해보이는 초라한 행색. 이 모든 게 다 이탈리아 최고부자 기업인 출신 정치인 베를루스코니 때문인가. 잠시 동병상련의 감정이 발동했다. 

마침 로마는 휴일이었다. 오드리 헵번의 그 영화 때문에 이 도시가 휴일이라는 사실은 구경꾼의 기대감을 높였다. 오드리 헵번과 그 일가의 선행 이야기도 오드리 헵번이 영화를 찍은 로마의 호감도를 늘렸다. 로마 외곽의 숙소에서 왕복 5유로 짜리 셔틀버스를 타고 시간은 현대지만 공간은 여전히 고대인 로마 시내에 무사히 입성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기죽지 않는다는 이탈리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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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대적 보수공사 중인 트레비분수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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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성 삐에트로(St. Pietro) 역 앞을 로마시내 도보답사 여행의 기점으로 정했다. 로마 안의 국가 바티칸 공화국이 멀지 않은 지점이다. 이미 하루종일 걷겠다는 작정을 하고 떠난 여행이다. 걷지 않고 차를 타면 몸은 편할지 몰라도 보이거나 느끼는 건 많지 않다. 주마간산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로마는 경주처럼 다가왔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지, 고대 신라의 고도와 비슷한 감상과 공기가 느껴졌다. 경주처럼 공사만 하면 자꾸 유적이 발굴되니 대도시인데도 지하철도 마음대로 건설하지 못한다는 유적지다. 무엇보다 가는 데마다 떼로 줄 지어 몰려다니는 단체 관광객 때문에 더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지난날 경주의 수학여행 행렬처럼 로마에 왔으니 로마의 법과 관광 행동지침을 따르는 게 상책이겠다는 판단이 금방 들었다. 굳이 지도를 보지 않더라고 관광객들이 몰려다니는 방향을 따라가다 보니 명소가 하나씩 눈앞에 나타났다.

로마가 경주와 다른 건 일단 로마는 뭐든지 크다는 점이다. 가로수나 공원의 조경수 구실을 하는 소나무 한 그루조차도. 거대하고 중후장대한 고대 건축물은 압권이다. 쳐다보는 이를 압도한다. 하늘을 떠받치거나 찌르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화강암(granite)이나 대리석(marvel) 돌기둥은 어마어마하다.

로마 시민들은, 이탈리아 국민들은 조국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만 가지고도 세계 어디를 가나 기죽지 않고 자신있게 행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몹시 부러웠던 적이 있다. 내 조국의 역사도 장구하고 문화도 풍성하고 찬란한데, 왜 국민들은 자꾸 기가 죽고 자신이 없어지는지 그 원인이 너무 분명해서 갑자기 우울하고 무기력해졌다.

판테온 신전에서 탄생한 콘크리트라는 신묘한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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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폐허 ‘포로 로마노(Foro Romano)’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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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하루 아침에 콘트리트가 건설했다."

대제국 로마는 인간의 힘으로는 하루 아침에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역사를 가능하게 한 특별한 토건 공학은 따로 있었다. 판테온(pantheon) 신전에 그 신묘한 비법이 숨어있다. 가히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바로 그 토건 공학 때문에 로마의 현존 고대 건축물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800여 년 전인 216년에 완공된 판테온 신전은 무철근 콘크리트 공법으로 직경 43m의 돔 구조를 처음 건설했다. 그 비법은 바로 '콘크리트'다. 본격적인 의미의 콘크리트는 로마인들이 발명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래서 건축학자들은 그리스가 대리석 등 돌의 건축이라면 로마건축은 콘크리트의 건축이라 대비한다.

그러니까 판테온신전은 현대적 개념의 콘크리트를 사용한 역사상 최초의 건축물인 셈이다. 오늘날 상업화된 콘크리트의 역사라고 해봤자 불과 120여년 전 영국의 한 석공이 개발한 것이라 하니 위대하고 창의적인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만리장성에 석회반죽 같은 원시적 콘트리트가 쓰인 기록이 있다고 하나 그거야 말그대로 원시적일 뿐이다.  

로마인들은 이른바 '로만 콘크리트(Roman Concrete)'를 개발했다. 화산재와 석회를 반죽해 모르타르(회반죽)를 만들고 여기에 자갈이나 돌을 섞은 콘크리트 형태의 신물질을 창조한 것이다. 현대의 콘트리트와 거의 유사한 형태와 성분이었다. 뛰어난 내구성이 자랑할 만하다.아직도 멀쩡한 판테온 신전의 콘트리트 돔을 보면 확인된다.

최근 미국의 과학자들이 2천년간 나폴리만 바닷물에 잠긴 콘크리트 방파제를 연구한 결과 는 놀랍다. 화산재 등 재료 배합과 가열 방식 떄문에 내구성과 친환경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오히려 현대의 콘크리트보다 우수해 '인간이 만든 가장 견고한 콘크리트'로 평가할 만하다는 것이다. 

로마를 건설한 로마 장인들의 신묘한 토건기술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판테온신전 돔의 천장에는 둥근 구멍이 하나 크게 뚫려있다. 태양을 상징하듯 쏟아져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 그런데 이곳에서 비가 오면 신기한 현상이 벌어진다. 뚫린 구멍으로 빗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강하려는 빗물의 무게보다 상승하려는 신전 내부의 더운 공기 압력이 더 높아 그렇다는 것이다. 과학은 신성하다. 

감탄과 감흥의 정점,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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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건축물’ 콜로세움 -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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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토건기술에 탐닉하는 도보답사는 천사의 성이라 불리는 산탄젤로 성(Castel Sant'Angelo), 나일 강·갠지스 강·다뉴브 강·라플라타 강 등 4대 강을 상징하는 '4대강 분수'로 유명한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는 트레비 분수로 이어졌다. 감탄과 감흥의 정점은 포로 로마노와 콜로세움을 향해 달려갔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는 고대 로마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지난날의 아픈 역사의 상흔이 그대로 노출된 폐허에 불과하다. 이민족의 약탈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토사 아래 묻혀버린 유적을 발굴해낸 것이다. 그런데 아름답다. 보는 이로 하여금 폐허조차 아름답게 느껴지게 만드는 토건기술이다. 고대 로마인의 위대한 토건기술은 기술이 아니라 '토건예술'로 불러야 마땅하다.

콜로세움(Colosseum)은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고대 로마시대 검투사들이 싸우던 원형 경기장으로, 로마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다. 너무 유명해서 상투적일 수 있는 관광명소는 가급적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이곳만은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이나 영화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크다. 아니 거대하다.

높이 48m, 둘레 500m, 경기장 내부 길이 87m, 폭 55m라는 숫자로는 얼른 실감나지 않는다. 고대 로마 시대의 최대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름의 어원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그런 거대한 건축물을 인간의 힘으로 건설하기 위해 로마 토건기술의 총아 '로만 콘크리트'가 요긴하게 사용됐음은 물론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건설한 세계적 역사문화 관광도시 로마. 로마의 영화는 이렇게 내구성과 친환경성이 뛰어난 '로만 콘크리트'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로마를 건설한 '로만 콘크리트'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사 보고 싶은 책이 하나 떠올랐다. 환경운동 하는 목사인 최병성 작가가 지은 <대한민국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이다(관련기사: '발암물질' 쓰레기 시멘트, 한국 아파트가 위험한 이유). 읽고 나면 로마가 더 그리워질 것이다.

○ 편집ㅣ이준호 기자

덧붙이는 글 | ※ 사람이 행복한, 유럽 : 문화와 예술, 자유와 평화, 협동과 연대, 자주와 자립, 이타심과 공동체의식, 신뢰와 질서, 생태주의와 생명사상 등 역사적 자산과 사회적 자본이 바탕이 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패러다임과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유럽의 '7개국(영국, 체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일상체험 여행기'



태그:#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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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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