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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에는 신라시대의 큰 사찰이었던 장연사 터가 있다. 장연동을 가자면 청도군 매전면의 면소재지인 동창에서 유천 방면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동창에서 차를 달려 약 오 분 정도 가면 지금은 폐교가 된 매전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동네에서 청도학생수련원 푯말이 보이는 왼쪽 방향으로 길을 잡아 들길을 조금 달리면 제법 큰 강이 나온다. 그 강 너머가 바로 장연동이다.

장연동에는 길명, 장싯골, 깃당, 고방 이렇게 네 개의 작은 동네가 있다. 모두 합해봐야 칠팔십 가구도 채 되지 않는 시골 동네다. 예전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젊은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 버리고 마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남아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동네에 새 집들이 자꾸 들어서고 있다.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장연동을 찾기 때문이다.

장연사로 가는 길

장연동 앞에는 동창천이 휘돌아 흐른다. 마을 뒤로는 해발 고도가 700~800미터를 오르내리는 산들이 여럿 포진해 있다. 그 산 너머로 또 더 높은 산들이 이어진다.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초입이 바로 장연동이라 볼 수 있다.

장연사 터가 있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장싯골 마을의 개울.
 장연사 터가 있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동 장싯골 마을의 개울.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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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안고 있으니 그야말로 배산임수다. 멀리 또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사오십 년 전만 해도 교통이 불편해서 살기에 그리 넉넉한 곳은 아니었다.

이웃한 큰 동네까지 가자면 강을 건너 근 칠팔 리를 걸어야 했다. 강둑을 따라 걷는 그 길은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도 또 바람막이도 하나 없다. 여름에는 땡볕이 머리 위에서 이글대었고 겨울에는 칼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댔다. 장마철에 비라도 많이 오면 아예 길이 끊겨 버렸다. 징검돌을 놓아서 만든 다리는 비가 오면 물에 잠겼고, 장마 때는 물에 쓸려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수업 중이라도 비가 많이 오면 애들을 모아서 집으로 돌려보내기에 바빴다.

어떤 해 여름에는 하도 비가 많이 와서 장연동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이 줄기를 기다리며 학교 숙직실과 친구들 집으로 흩어져서 하룻밤을 보냈다.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잔다고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그 애들의 부모님들은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돌아보니 그 시절이 아련하게 그려진다.

예전의 장연동은 이렇게 살기 불편한 산골짝 동네였다. 교통이 좋지 않으니 오지 아닌 오지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막힘없이 길이 뚫리고 강에 다리가 놓이면서 마을의 처지도 바뀌었다. 산 좋고 물 좋으니 찾는 사람이 많아 이제는 번듯한 새 집들이 한 해가 다르게 들어선다.

자두나무 꽃이 활짝 핀 4월 초의 장연사지 모습
 자두나무 꽃이 활짝 핀 4월 초의 장연사지 모습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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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초에 고향에 다니러 갔다가 이웃동네인 장연동에도 들러보았다. 그곳에 절터가 있는데 탑이 볼 만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우리 친구들이 학교까지 걸어서 오갔을 그 길을 차를 타고 달렸다. 학교가 있는 명대 동네에서 출발해서 들판길을 따라 얼마큼 달리자 강둑이 나왔다. 예전 우리 어릴 때, 비가 많이 오면 공부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바로 그 강이다. 그때는 강을 건너는 게 큰 일이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밭 가운데 있는 탑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가자 길이 양 갈래로 갈린다. 오른쪽 길로 내쳐 달리면 장연동의 길명과 깃당 그리고 고방 동네가 나오고 왼편 길로 가면 큰 산들이 뒤에 버티고 있는 장싯골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의 초입에 장연사 터가 있다.

산을 보고 걷노라니 저만큼 떨어져 있는 밭둑이 온통 환하다. 두 그루의 자두나무에 꽃이 피어 흰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꽃에 채 마음을 빼앗기기도 전에 내 눈에 또 다른 것이 들어온다. 꽃무리 사이로 탑신이 보인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있다. 아, 어릴 때부터 들었던 바로 그 탑인 게다.

어릴 때 장싯골 절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이야기들은 조금은 비현실적이었다. 절이 망해서 터만 남아 있다고 했다. 탑이 있는데 밭 속에 있다고도 했다. 아니, 절도 망한단 말인가? 그보다 더 이상한 건 탑이 밭 가운데 있다는 말이었다. 탑이라면 절에 있어야 마땅하지 밭에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장싯골 절터의 탑이 마치 귀양을 온 것처럼 여겨졌다. 탑이라면 응당 절에 있어야 마땅하고, 또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어야 하는데도 장연동의 그 탑은 농사를 짓는 밭 가운데 있다고 했다. 대체 그 탑은 어떤 죄를 지었기에 그런 처지에 빠졌을까.

장연사지의 동탑과 서탑
 장연사지의 동탑과 서탑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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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사라진 이야기는 더 신기했다.

"절에 빈대가 많아서, 빈대 잡으려고 불을 놨는데 그만 절이 다 타버렸다 카데."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아니, 빈대 그게 뭐라고 절에 불을 다 놓았단 말인가. 장싯골 절터에 대한 이야기들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모두 의문 속에 쌓여 있었다.

감나무 밭 한가운데 탑이 있었다. 돌로 쌓은 3층탑이다. 얼추 봐도 높이가 약 4미터에 이를 것 같은 탑이 양 편으로 나란히 서있다. 어릴 때 들었던 바로 그 탑이다.

그때는 그저 그런 탑이 하나 있나 보다 했는데 실제로 보니 대단했다. 아, 저렇게 큰 탑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도 여태 모르고 있었구나. 가까운 곳에 보물을 두고도 못 알아보았다. 같이 갔던 친정 언니와 나는 왠지 모르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빈대 때문에 절에 불을 놓다니...

탑이 서있는 감나무 밭은 내 친구네 부모님이 농사를 짓는 땅이다. 농사꾼인 친구 부모님 눈에 탑은 어떻게 비춰졌을까. 조금이라도 소출을 더 내고자 하는 게 농부의 소박한 욕심일 텐데, 밭 가운데 서있는 탑은 어쩌면 농사에 방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었을까. 덩치가 작은 돌덩이라면 밭 가장자리로 옮기기라도 했겠지만 덩치가 크니 건드릴 엄두를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보통 돌무더기가 아니라 탑이었으니, 어찌 감히 손을 댈 수 있었겠는가. 그런 탑이 두 기나 있었으니 감농사를 짓는 데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감나무 밭 한가운데 탑이 서있다.
 감나무 밭 한가운데 탑이 서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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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일 뿐 실제로 내 친구 부모님도 또 그 이전의 분들에게도 탑은 신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논두렁에 앉아서도 청정한 마음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수행처고 또 도량이라고 했다. 비록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밭 가운데 있는 탑 밖에 없지만, 그곳은 청정 도량임에 틀림없다. 천 년도 넘게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케 해주었으니 탑도 또 장싯골도 이미 청정 도량이나 진배없다.

장연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아무 것도 없다. 언제 세워진 절인지 또 어느 정도 규모의 절이었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절의 족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적기도 한 줄 남아있는 게 없으니 그야말로 완벽하게 베일에 쌓여 있다.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물들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까.

어렸을 때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 한쪽 화단에는 돌로 만든 불상이 하나 있었다. 남자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한 번씩 그것을 안아보기도 했고 또 배를 쓰다듬기도 했다. 눈도 코도 다 닳아서 잘 알아볼 수 없는 불상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돌미륵도 항상 함께 떠올랐다.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졸업생들에게 그것은 그냥 돌미륵이 아니라 학교와 하나로 기억되는 존재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연사 터가 있는 장싯골 동네에서는 해마다 정초에 당제를 지냈다. 그때 당나무와 그 근처에 있던 돌기둥 사이를 새끼줄로 길게 연결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돌기둥은 장연사의 당간지주였다. 원래는 길다랗게 높았는데 어느 해인가 마을에 쓰기 위해 당간지주의 윗동을 잘라서 지금은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동탑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서탑은 무너져 있는 것을 1980년에 복원하였다.
 동탑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으나 서탑은 무너져 있는 것을 1980년에 복원하였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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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미륵과 당간지주

원래 당간지주는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거는 막대를 세우는 곳으로 어찌 보면 지금의 국기 게양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절이 사라지고 아무 소용도 없이 서있던 당간지주를 마을 사람들은 당제를 지낼 때 이용했다. 어쩌면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쓸모없이 내버려져 있던 당간지주가 어느 때부터인가 당제를 지낼 때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장연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되는 석물들이 몇 개 더 있다. 모두 절과 상관이 없는 곳에 놓여 있다. 돌을 네모나게 파서 만든 물을 담는 커다란 석조는 인근의 어느 재실 마당에 놓여 있다. 원래 석조는 논두렁에 엎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동네 사람들이 새끼줄로 얽어매어 끌고 당겨서 재실 마당으로 옮겼다고 그랬다. 사람들이 보기에도 석조가 크고 특별해서 재실로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인근의 길명이라는 동네에도 장연사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비석이 하나 서있다. 연꽃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 그것은 절의 법당 앞에 있던 배례석이다. 또 어느 집 마당에도 석물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 역시 장연사 터에서 나온 것일 터이다.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 화단에는 돌미륵 외에도 다른 석물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 중에도 장연사와 연관이 있는 것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서로 나란히 쌍탑이 있고 당간지주가 있을 정도였으면 장연사는 분명 큰 절이었을 것이다. 절이 한창 흥했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쯤에는 스님들과 절을 찾는 사람들로 이 골짜기는 꽤 번잡하고 분주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전설도 내려온다.

"절에서 쌀을 씻은 쌀뜨물 물이 그랑(강)을 따라 유천까지 뿌옇게 내려갔다 카더라."

탑이 있는 건너편 밭에 윗동이 부러져나간 당간지주가 있다.
 탑이 있는 건너편 밭에 윗동이 부러져나간 당간지주가 있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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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이라면 장연동에서 강을 따라 삼사십 리는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곳까지 쌀뜨물 물이 뿌옇게 흘러내려갔을 정도로 절에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이리라.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런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절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컸던 절이 사라졌다. 절에 빈대가 많아서 망했다고 한다.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도대체 빈대가 뭐라고 절에 불을 다 질렀다는 말인가.

빈대가 많아서 절이 망해 버렸다는 장연사의 전설은 그 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빈대를 잡으려고 절에 불을 놓았다'라고 하는 전설은 그 시대를 빗대어서 말하고 있다. '빈대절터'에 전해 내려오는 빈대들은 사람 빈대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속에 절들은 탄압을 받았다. 근처의 유림들이 절을 핍박하고 업신여겼으리라. 그래서 견디다 못한 스님들은 하나둘 절을 떠나 버렸고, 마침내 절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장연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잊고 있었던 우리 것, 다시 보니 아름답네

어릴 때 말로만 들었던 탑을 직접 보니 놀라웠다. 그저 그런 작은 절이 하나 있었나 보다 그랬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훌륭한 탑이고 절터였다. 만만하게 봤던 장연동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대단하게 보였다.

이웃 동네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제야 장연사 터를 와보았다. 별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던 장연사를 이제야 알아봤다. 이것이 어찌 나 혼자만의 일일까.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걸어왔던 길이었다.

장연사 터에서 바라본 모습
 장연사 터에서 바라본 모습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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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랐던 시대에는 우리 것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았다. 그때는 어떻게 하던지 도시로 나가 성공을 하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머리가 조금만 굵어지면 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공부하느라 집을 떠났고, 돈 버느라 외지로 나가기 바빴다. 도시로 나가는 게 성공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고, 고향은 당연히 떠나는 곳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했던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소중했던 것들이 우리 곁을 시나브로 떠나갔다. 크고 화려하고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세태 앞에서 이름 없는 것들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사라졌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모두가 그립고 소중하다.

장연사 폐사지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본다. 잘 모르고 지냈던 옛 것의 소중함을 느낀다. 천 년도 더 넘게 우리 곁에 있었던 장연사였다. 비록 지금은 빈 터만 남아 허무하지만, 그렇게라도 버티어왔으니 대단하다.

수수께끼에 쌓여 있다고 생각했던 장연사 빈 터는 사실 무엇을 감추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단지 우리가 잘 몰랐을 뿐이다.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오랜 세월 동안 장연사 빈 터는 우리들을 기다려 주었다. 무심한 세월이었지만 탑은 무던하게 버티어 왔다.

장연사의 삼층석탑은 내 것의 소중함을 말없이 가르쳐준다. 탑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천 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그 길은 미래로도 가는 길이다. 과거와 미래로 가는 길, 그 길이 장연사 빈 터에 있었다.

○ 편집ㅣ박순옥 기자

덧붙이는 글 | 장연사지 3층 석탑은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되며, 삼층석탑이 있는 이곳은 장연사라는 큰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동탑(東塔)과 서탑(西塔)의 2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쌍탑(雙塔)인데, 서탑은 무너져있는 것을 1980년에 복원하였다. 1984년에 동탑 보수 공사 중에 사리합과 사리병이 발견되었다. 탑의 높이는 동탑 4.6m, 서탑 4.84m이고 1980년 9월 16일에 보물 제677호로 지정되었다.



태그:#청도, #장연사지, #장연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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