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4월 6일, 연극 <만주전선>을 연출한 박근형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박근형 선생님을 인터뷰하게 하게 된 계기는 지난 3월 말, 일본 도쿄 신주쿠의 '타이니 앨리스 페스티벌'을 현장 취재하면서 느낀 감동 때문이었습니다.(관련 기사 : <만주전선> 21세기, 우리에게 묻는 정체성)

일본인들은 대체로 자국 내의 연극뿐만 아니라 외국의 연극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이 작품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폭소와 눈물이 공존했던 '타이니 앨리스'에서의 공연은 그 자체로 신기원이었습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말입니다. 

박근형 선생님과 출연 배우들 그리고 모든 스태프가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고 할 정도로 의외였습니다. 그 '힘'을 우리나라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제36회 서울 연극제 개막작이라는 것도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 식민지 출신의 배우들이, 피식민지인의 정서를 건드린 작품으로 일본에서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하필이면 이들이 귀국하자마자, 제36회가 되는 서울연극제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우연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모든 필연에 대한 관심과 집중으로, '연극 한류'의 실체를 탐험해 보고 싶습니다.

아래는 지난 6일, 대학로 수현재 5층 연습실에서 박근형 선생님과 나눈 일문일답입니다.

"만주에서 당구 150 쳤다"는 아버지의 말에 시작된 연극

수현재에서 인터뷰 중에 한 컷
▲ 박근형 극단 '골목길' 대표 수현재에서 인터뷰 중에 한 컷
ⓒ 이형석

관련사진보기


- 지난 3월 도쿄 신주쿠에 있는 타이니 앨리스 극장에서 <만주전선>을 공연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몇 년 전부터 일본에 공연을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의사소통은 안 되지만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스토어 하우스(일본 도쿄 우에노를 대표하는 소극장)의 기무라 신고(일본극단 온천 드래곤의 예술감독)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전 그분의 연극 태도에 매료되었습니다. 에고다라고 하는 도쿄 외곽에 있는 소극장에서 만난 인연입니다.

다시 소극장을 하신다고 하셔서 저희도 한번 가서 놀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기꺼이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3년간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타이니 앨리스를 운영하시는 니시무라 히로코 선생님이 극장이 폐관되니 한번 오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마침 저도 거기에 가보고 싶었던 차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오태석 선생님과 이윤택 선생님이 작업하셨던 곳으로 한국 연극인들과 인연이 오래된 극장이기에, 저도 전부터 작업을 해보고 싶었답니다."

- 그럼 이번에 타이니 앨리스에서 공연하신 것은 처음인가요?
"네 처음입니다. 그전에는 좌담회 때 한번 갔습니다. 15~16년 전에 <청춘예찬>을 초청해주셨는데, 10명(출연배우 포함 전체 스태프의 규모)이 넘는다고 하니 묘하게 작품이 바뀌면서 저는 못 가게 됐습니다."

- <만주전선>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는 아니고요. 이런 얘기는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희 아버지한테 얼핏 들었는데 젊은 시절에 아버님이 만주에 계셨답니다. 어느 날 매형과 함께 당구장에 가는데 인사치레로 '아버님도 같이 가실래요?'하고 말씀드렸더니 '내레 만주에서 당구 150을 쳤디' 그러시는 겁니다.

도대체 그 당시 1940년대 만주에 당구장이 몇 개나 있었을 것이고 거기서 150을 쳤다면 우리 아버지는 대체 만주에서 무슨 일을 하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니 당시 조선의 엘리트들이 만주에 많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거기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런저런 질문이 쌓여서 하게 됐습니다."

- 극작으로 완성하신 것은 언제입니까?
"제가 원래 대본을 미리 써 놓고 공연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큰 줄거리 가지고 배우들한테, '내가 이런 연극을 할 건데 같이 한 번 해보겠습니까'합니다. 그래서 만난 게 공연 한 달 전이죠. 매일 '쪽 대본'이 나오고, 이걸 발전시키고 그랬습니다. 그게 작년 봄, 5월이었습니다."

- 그럼 혹시 세월호와 맞물려서 방향을 선회했나요? 시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는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거나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으로나 정치의식이나 아직도 참 멀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묘하게 공연 올라가고 며칠 있다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 얘기 나오고... (그래서) 공교롭게 됐어요."

연극의 모든 메시지 있던 하이라이트, 조마조마했다

- 일본 공연에서 아메리카 민트향 대사가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건 삭제한 게 아니라 배우가 깜빡한 겁니다."

- 저는 그것이 1943년, 양국이 교류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기에 고증상의 문제로 누군가 지적해서 빠진 줄 알았습니다.
"가수 현미 선생님께서 개성 출신으로 집이 부자셨답니다. 6·25 즈음에 '아메리카 민트껌'을 사려면 쌀 한 가마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우리보다 서구 문물이 일찍 들어왔지만, (일본에서도) 껌은 상당히 귀한 물건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만주에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쉽게 몇 백 원이면 사는 껌이지만 당시에는 껌이라는 것이 그렇게 귀한 것이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나서 집어넣은 부분입니다."

- 김은우 배우가 맡은 주인공 이름이 '아스카'인데 일본에서도 흔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대 일본 문화에서 백제계 후손이 주도한 문명이 '아스카'인데요.
"배우들한테 각자 맡은 배역의 이름을 지어오라고 했습니다. (웃음) 대부분 지어온 대로 했는데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

- 극에 보면 "아스카 너는 조선의 별, 북두칠성이 되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상징성이 큰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북두칠성에 대한 개념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나요?
"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북두칠성이라고 하면 좀 그럴듯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습니다. (웃음) 우연입니다."

- 특정 성씨의 종파가 나오는데 '국당공파'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족보가 없는 사람이라서 잘 모르지만, 가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희 단원 가운데 한 사람이 국당공파 37대손입니다. 그래서 얘기를 들었죠. 대표적인 경우가 전 대통령인 이명박입니다. 국당공파의 조상 섬김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훌륭한 가문 중의 하나입니다."

- 성극을 이용한 극 중 극이 인상이 깊었는데 개신교와 성서의 인용이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전매특허 같은 이러한 연출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유달리 기독교 신자가 많잖아요? 한국사회에서 기독교는 영향력이 크지 않습니까? 특히 대형교회의 권력이 어마어마하지요. 저도 어머니 따라서 교회에 가면 선거 때마다 유력인사들이 목사님 설교 후 신도들한테 인사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일종의 풍자죠. 종교와 성서 자체에 대한 알레르기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가 왜곡된 것에 대한 간접적인 얘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 극 중 극의 두 번째 극에서, 아스카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연출자의 메시지가 전달된 하이라이트가 아닌가 하는데, 처음부터 계획한 것입니까?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두 번째 성극 역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상식선에서 끝난다면 식상할 것 같았습니다. 조금 극단적일 수 있지만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종말이 날 것 같더라고요. 그들이 생각하는 성서에 따른 해석이, 첫 번째 성극에서는 성서의 말씀대로 나왔다면 두 번째 성극에서는 비극적 엔딩으로 결론을 내릴 것 같았습니다."

일본 현지에서 그 부분을 보고 관객이나 일본 연극 관계자가 혹시 항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굉장히 떨렸습니다. '연극의 모든 메시지가 여기에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풍자 이상의 것으로 다가왔으니까요."

①-2편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후아이엠>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근형, #골목길, #만주전선, #인터뷰, #이형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