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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시골 어른들의 후한 인심을 직접 체험했다. 이곳은 현재 23가구가 살고 계신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아무런 연고 없이 외지에서 들어와 살면 아무래도 본래부터 살고 계신 마을 분들에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은 전적으로 들어와 사는 외지인들의 몫이다.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마을 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집을 짓기 전 마을회관에서 한 번 점심을 모시고,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할 때 이장님을 통해 수건과 떡을 조금 돌렸다. 붙박이로 살지도 않고, 가끔 강아지들이 목줄을 풀고 이웃 집 밭까지 진출해 배추와 무밭을 돌아다니는 죄도 있을 뿐 아니라 아무래도 어른들이 살고 계셔서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하루는 이장님이 마을 어른들께 점심을 모시는 날이라며 함께 식사하게 내려오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별일도 없을 뿐더러 노인들도 뵙고 싶어서 염치불구고하고 갔다.

마을 어른들이 왁자하게 앉아계셨고, 게다가 점심 초대를 받은 면사무소 직원 몇 분까지 함께 한 자리였다. 맛있게 먹었다. 예로부터 어른들이 주는 음식은 맛있게, 많이 먹어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날 아침 이웃집 할머니께서 "내가 오늘 밥하는 사람이어, 긍께 꼭 와야 써이"라고 하신 걸 기억해 내고는 그 할머니께도 밥이 참 맛있게 지어졌다고 공치사도 올렸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고 과일이 후식으로 나올 무렵, 이장님이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다.​

"어른들께서 맨날 얻어먹고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하셔서 봉투를 만들었어요, 작지만 성의이니 받아 주세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로서는 마을에 들어와 살게 해주신 것도 감사한 데다가, 마을 분들의 도움 없이는 생활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오히려 미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살고 있는 데 이 무슨 환대신가. 봉투에는 '축 준공 ㅇㅇ동 주민일동'이라고 씌어 있었다.

이 봉투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 일부러 나를 부르셨구나. 전기가 통하듯 감동이 일었다. 고맙고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었다. 더 열심히 살면서 어른들께 조금이라도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몇 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드렸다. 아, 이제 너는 이 마을에서 살아도 좋다, 라는 허가장을 받은 느낌이 이런 것 아닐까. 막걸리도 한 잔 한데다가 기분까지 우쭐해져서 돌아오는 발길이 허방을 걷는 기분이었다. ​

그런데 내 피보다 귀한 그 돈을 눈앞에서 놓쳐 버렸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백수가 된 뒤로 아내로부터 급여 형식으로 얼마간의 용돈을 받고 있다. 그 중 일부를 쓰고 나머지를 그 봉투에 같이 넣었다. 마을 분들이 주신 금일봉과 용돈 나머지를 보태 얼마간을 만들었고 그 돈을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가 어른들의 귀한 뜻을 떠올리고는 나중,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관할 곳을 찾다가 책장 뒤편의 빈틈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틈에 봉투를 넣었는데 아뿔싸, 바닥이 비어 있어 방바닥까지 툭, 떨어지는 게 아닌가. ​

책장이 두꺼운 원목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책까지 있어 내 힘만으로는 들기는커녕 끌 수도 없었다. 숨기려 한 건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돼 버렸으니 누구에겐가 진실을 말하고 도움을 청해야겠는데 이 시골에서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에끼, 그대로 두자, 나중에 누군가 오면 도움을 청하자, 생각하다가 아들 둘을 떠올렸다. 그래, 이놈들이 오면 힘 좀 쓰고 가지라고 할까? 아니, 그러지 말고 그놈들이 손주를 낳아 크면 그놈들에게 가지라고 하자, 그래, 그게 좋겠다. 혼잣말로 중얼대며 한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장가들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이지만 머, 상상은 내 자유 아닌가. 때가 되면 나는 죽고 없을 것이고, 그래서 내 자식과 손주들이 모여 나를 얘기할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애비의 유언을 떠올린 자식들이 제 자식들에게 할아버지의 책장을 옮겨라, 얘기하고 그 말을 듣고 손주들이 누렇게 변한 봉투를 찾아내지 않겠는가.

이쯤의 생각에서 낮잠이 들었나 보다. 그래, 이 녀석들, 돈은 가져라. 그래도 꼭 봉투의 내력을 잘 살피고 너희도 그런 아름다움을 실천해라, 그게 할애비의 소망이다. 그런 얘기를 하며 벙긋거리는 나를 내려 보다가 설핏 깨보니 꿈속이었다. 허허. 깼어도 행복의 여운은 오래 남았다. 오랜만에 꿈다운 꿈을 꿨다. 

덧붙이는 글 | 전남새뜸(도정신문)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산골일기, #낮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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