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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혼자 사는 30대 남자다. 엄밀히 말하면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다. 펭귄 '미샤'와 함께 산다. 망해가는 동물원에서 분양받은, 요즘 말로 하면 반려 동물이다. 책 <펭귄의 우울>은 펭귄과 함께 사는 어떤 작가가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잔잔하게 적어 내려간 러시아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소설이다.

그런데 '잔잔하게' 적어 내려가는 그 에피소드가 만만치 않다. 여럿이 죽어 나간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가족이라고 착각할 만한 공동체가 형성된다. 다음 장면이 예측이 안 된다. 결론도 마찬가지다.

부고를 미리 쓰는 작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펭귄의 우울>
 <펭귄의 우울>
ⓒ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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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작가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단편도 시작하자마자 번번이 막혀버린다. 그러던 그에게 우연히 일감이 생긴다. 살아있는 사람의 부고를 미리 쓰는 것이다. 조건은 익명이라는 것뿐이고, 원고료도 두둑하다. 신문사 편집장이 그 대상을 지정해 주는데, 대상이 된 사람은 부고 완성 후 며칠 안에 곧 죽는다. 그리고 그가 미리 써 둔 부고가 그 다음날 신문에 실린다.

그렇다고 이 책이 미스터리나 판타지를 다룬 소설은 아니다. 1990년대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시대상을 직·간접적으로 그려낸다. 보이지 않는 조직이 존재하고, 그 알 수 없는 끌림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음모. '빅토르'는 그 중 어느 한 과정일 뿐이다. 자신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누군가가 맡기고 간 어린 여자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를 위해 젊은 아가씨인 유모를 구하고, 펭귄까지 합쳐 숙식과 생활을 같이 하는 그들은, 서로가 가족인지 본인들조차 헷갈리고 혼란스럽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펭귄. 말은 없지만 어찌 보면 이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생각도 든다. 나에게 저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내가 언급하는 인물들이 조만간 죽게 된다면... 소설 속 편집장은 얘기한다.

"죽어도 마땅한 자가 죽은 것이라고. 아쉬워 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말라고. 당신 아니었어도 죽을 사람이었다고."

편집장 뿐 아니라 소설 속 모든 인물은 죽음에 대해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감정이 없다.

주인공 '빅토르'는 시종일관 우유부단하다. 살인이든 테러든 자신이 작성하는 글이 살생부인데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끝까지 우왕좌왕한다. 어떤 날은 글쓰기를 두려워하지만, 또 다른 날은 글이 잘 써져 순식간에 여러 편의 부고를 타이핑하고는 흡족해하기도 한다.

부고가 익명으로 실리는 것에 안도하다가도 자신의 이름이 신문에 실리지 않는 현실에 작가로서 자존심을 상해하기도 한다. 생활을 함께 하는 이들과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별장을 장만하려는 계획까지 세우다가도, 유모의 말 한마디에 '이 여자가 왜 내 인생에 참견이람'하며 시무룩해하기도 한다. 심장 이식을 해야 하는 펭귄 '미샤'의 수술 여부에 대해서도 그저 한 마리 '동물'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가치를 고민하다가도 수술 날짜를 목놓아 기다리기도 한다.

몇 안 되는 등장 인물 안에 그 시대, 분위기가 직업을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돈 밝히는 의사, 구조 조정 당하는 공무원, 정권의 지시로 의미 없이 목숨을 잃는 경찰, 어느 정권에 붙을지 노심초사하는 언론. 그런데 그게 비단 그 시대, 그 사회의 분위기에 한하는지는 우리의 판단이다.

1996년이 시간적 배경이라는 것을 소설 속에서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대목은 신문기사의 날짜에서 보여주는 한 장면뿐이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에 보여준다. 그런데 읽는 내내 시대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책의 제목이 '우울한 펭귄'이 아니고 '펭귄의 우울'이다. '우울'이 펭귄의 것인 양 적었지만 '우울'한 것이 '펭귄'만이 아니라는 표현으로 와 닿는다. 과연 누가 펭귄이었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떠오르는 의문이다. 문체가 마치 김훈의 소설을 보는 듯하다. 작가와 옮긴 이의 개성이 그러한가 보다. 군더더기 없이 짧고 감정 없는 문장 속에 계속 곱씹을 거리가 생겨난다.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 외 옮김/ 솔/ 2006년 09월 / 9500원



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솔출판사(2006)


태그:#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미샤, #러시아 ,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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