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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올레에서 리본을 볼 때마다 제주올레가 떠오른다.
 규슈올레에서 리본을 볼 때마다 제주올레가 떠오른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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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올레 15번째 코스가 길을 열었습니다. 2012년 2월, 규슈올레 4개 코스가 길을 열면서 일본 규슈에 올레의 역사가 시작된 지 3년만입니다. 규슈올레는 잘 알려진 것처럼 제주올레가 모태가 되어 세상에 나온 길입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올레'의 모든 것을 전수해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규슈올레의 모든 길 표시는 제주올레와 같습니다.

2월 28일, 규슈올레 15번째 길 '아마쿠사 레이호쿠' 개장식에 참가하고,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규슈에 간 김에 아마쿠사 이와지마 코스와 우레시노 코스도 걸었습니다. 길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낯익은 올레 리본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규슈에서는 '올레의 여신'으로 불린다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참으로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도 더불어 했습니다. 대한민국에 도보여행 열풍이 불게하고, 제주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을 넘어서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규슈에서 '올레'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걷는다는 건 아주 단순한 것이지만, 걷다보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길을 만나면 더불어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 길에 스며든 역사를 들여다보게 되니까요. 역사란 결국 사람들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만들어낸 것이겠지요.

아마쿠사 레이호쿠 개장식에는 타지마 레이호쿠 정장(町長), 혼다 규슈운수국 구마모토 지국장, 후지키 규슈관광추진기구 본부장 등 일본 관계자들과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안은주 제주올레 사무국장 등 제주올레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올레꾼들이 함께 했습니다.

15번째 규슈올레 코스가 길을 열면서 규슈올레 전체 길이는 177.4km가 되었습니다. 길은 저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걷다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몸이 길을 걷지만, 여운은 마음에 남습니다. 규슈올레를 걸으면서 다시금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기자의 말

2월 28일,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가 길을 열었다. 레이호쿠 주민들은 멀리서 규슈올레를 걸으러 온 한국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2월 28일,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가 길을 열었다. 레이호쿠 주민들은 멀리서 규슈올레를 걸으러 온 한국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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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호쿠는 일본 구마모토 현의 남서부에 있는 아마쿠사 제도(天草 諸島)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아마쿠사시모(天草下) 섬의 북서부에 있는 정(町)이다. 정은 우리나라에서는 군(郡)에 해당한다. 가이드 혼조씨의 설명에 따르면 아마쿠사 제도에는 12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아마쿠사 지역에는 이번에 길을 연 레이호쿠 코스를 포함해 3개의 코스가 있다. 레이호쿠 코스는 토미오카 성과 시키 성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길이다. 출발지는 토미오카 항이며 도착지는 레이호쿠 온천센터로 전체길이는 11km, 소요예상시간은 4~5시간이다. 난이도는 중간 정도라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낮은 편이었다.

28일, 토미오카 항 선박대합실은 이른 아침부터 울긋불긋한 옷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날 길이 열리는 레이호쿠 코스를 걷기 위해 한국과 일본 다른 지역에서 온 올레꾼들이다. 

선박대합실 앞에는 레이호쿠 주민들이 한글로 쓴 '어서 오세요, 레이호쿠 마치에' 펼침막을 들고 서 있었다. 규슈에서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레이호쿠에서 한국 올레꾼을 반기는 한글 펼침막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규슈올레가 일본인과 한국인의 마음을 잇는 길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토미오카 항에서 토미오카 성으로 가는 길에는 이나리 신사가 있다. 붉은색 도리이가 줄 지어서 늘어선 길을 걸었다.
 토미오카 항에서 토미오카 성으로 가는 길에는 이나리 신사가 있다. 붉은색 도리이가 줄 지어서 늘어선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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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으로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늘은 이날 오래 참았다가 비를 뿌려주었다. 레이호쿠 코스를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 걷기를 마쳤을 즈음에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토미오카 항에서 토미오카 성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작은 신사가 있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도리이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대체 도리이가 몇 개인가 싶어서 세어볼까, 했더니 너무 많아 그냥 내처 걸었다.

도리이를 지나고 또 지나는 길은 토미오카 성으로 이어진다. 그냥 성을 휙 둘러보고 돌아나갈 수도 있으나, 여기까지 왔는데 길만 걷다가 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을 터. 일본 역사 공부를 조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토미오카 성은 '아마쿠사 시마바라 난'의 격전지였던 곳으로 난이 평정되면서 파괴되었다. 에도막부 시대, 천주교 신자였던 아마쿠사 시로는 가혹한 세금과 천주교 탄압에 맞서고자 난을 일으켰다. 일종의 민중봉기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아마쿠사 시로의 나이가 16세였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를 따른 이들은 3만7천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나라나 가혹한 수탈을 당하면 민중이 봉기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토미오카 성. 아마쿠사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을 때 파괴되었으나 2005년에 복원됐다.
 토미오카 성. 아마쿠사 시마바라 난이 일어났을 때 파괴되었으나 2005년에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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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되었던 토미오카 성은 2005년에 복원됐다. 깔끔하게 새로 쌓은 성벽에서 옛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세월의 더께가 묻은 돌이 드문드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토미오카 성에는 '일본의 은인'과 '아마쿠사의 은인'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일본의 은인 두 사람이 앞에, 아마쿠사의 은인 두 사람이 뒤에 서서 아마쿠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쿠사의 은인은 스즈키 시게나리와 그의 형 스즈키 쇼산이다. 스즈키 시게나리가 아마쿠사의 은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아마쿠사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아마쿠사 시마바라 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 스즈키 시게나리는 아마쿠사에 초대 대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아마쿠사로 오면서 시마바라 난 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많은 사찰을 지었으며, 25개의 불상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마쿠사에서 과중한 세금 때문에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보고 막부에 세금을 반으로 줄여달라고 호소하면서 할복자살 한다. 대단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죽은 뒤, 막부에서는 세금을 반으로 줄여주었다.

아마쿠사의 은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스즈키 시게나리와 그의 형 스즈키 쇼산.
 아마쿠사의 은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스즈키 시게나리와 그의 형 스즈키 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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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아마쿠사 사람들을 살리는 계기가 됐고, 그는 아마쿠사의 은인으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아마쿠사 곳곳에는 스즈키 시게나리를 기리는 크고 작은 신사들과 공양탑, 공양비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흔적이 레이호쿠 코스 곳곳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핏빛으로 붉은 동백은 언제나 마음을 붉게 물들인다. 이제 막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동백나무가 줄 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걷는다. 밭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길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지만, 마음이 분주한 농부는 벌써부터 밭에 불을 놓기 시작하나보다. 농부가 일하는 밭 한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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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돌에도 역사가 스며있다

토미오카 해수욕장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한 것은 키가 아주 큰 야자수였다. 레이호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도석(陶石)이란다. 이 도석이 토미오카 해변에 잔뜩 널려 있다. 도석은 도자기 원료가 되는 돌인데, 이게 자연이 아닌 인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나.

100여 년 이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는 깨끗한 원료로 잘 만들어진 도자기가 아닌 불순물이 들어간 도자기는 전부 내다버렸다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산업폐기물인데 자연에서 온 것이니 자연에 버리자고 해서 우리가 걸었던 해안에 다 갖다 버렸습니다. 그게 1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파도에 갈리고 마모되면서 둥근 자갈처럼 된 것이죠. 이걸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도자기 원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규슈올레 전문가이드인 혼조씨의 설명이다. 레이호쿠 지역 해변의 돌들은 그냥 돌이 아니라 도공의 흔적이 스며있는 '도석'이었던 것이다. 해변에 나뒹구는 돌 하나하나에 역사가 스며져 있는 길이 바로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였다.

하지만 길 위에서 과거의 흔적을 너무 오래 찾고 있으면 영원히 길을 벗어날 수 없다. 걸음을 옮기고 또 옮겨야지.

140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구로세 화과자점 내부. 일본 전통과자를 만든다.
 140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구로세 화과자점 내부. 일본 전통과자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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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가 훌쩍 넘어 도착한 마을회관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눈길을 잡아끄는 작은 건물이 있어 다가갔더니 작은 식당이었다. 파란색 프라이팬을 건물 벽에 붙여 놓은 식당에는 3월 4일까지 휴업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 길을 걸을 때 미처 점심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여기서 먹어도 되겠구나, 생각했다.

길은 즈이린지(瑞林寺)로 이어진다. 절을 벗어나니 길은 숲으로 이어지고, 작은 도리이가 몇 개인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도리이가 있는 것을 보니 신사인 것 같은데,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신사는 작년 연말에 규슈올레를 걸으면서 몇 번이나 보았고 들렀지만 여전히 낯설다.

구로세 화과자 가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죄다 올레꾼들이다. 작은 마을의 작은 가게인데 140년이나 된 가게로 일본에서도 아주 유명하단다. 대를 이어서 운영하는 화과자 가게인데 값은 제법 비싼 편이다. 한국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일본 전통과자를 만들어 판다니, 이 길을 지나면 꼭 한 번은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가게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번잡스러웠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가게 안을 둘러본 뒤 서둘러 나왔다.

레이호쿠 주민들이 따뜻한 간식을 준비해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를 걷는 올레꾼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레이호쿠 주민들이 따뜻한 간식을 준비해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를 걷는 올레꾼들에게 대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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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지나고, 바닷가도 지났다. 바다 풍경이 물릴 때쯤이었다. 어디선가 음식 냄새가 솔솔 난다. 레이호쿠 마을 사람들이 레이호쿠 코스를 걷는 올레꾼들을 위해 간식을 마련한 것이다. 된장국물에 야채와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음식이었다. 국물 맛은 담백했고 구수했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앉아 따끈한 국물을 마시고 있으니 온몸이 따뜻해진다.

이럴 때 저절로 나오는 말은 "걷기를 정말 잘했어".

길은 온천센터에서 끝났다. 레이호쿠 코스는 난이도가 낮아 11km는 조금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기왕에 온천센터에 왔으니, 온천욕까지 하고 가면 더 좋으리라.

아마쿠사 레이호쿠의 도석은 도자기 원료가 된다. 후치다 사라야마 도자기 가게에서 도석으로 만든 도자기를 볼 수 있다.
 아마쿠사 레이호쿠의 도석은 도자기 원료가 된다. 후치다 사라야마 도자기 가게에서 도석으로 만든 도자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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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호쿠를 떠나기 전, 우리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우치다 사라야마 도자기 가게였다. 레이호쿠 해변 도석으로 만든 도자기는 사지 않아도 한 번쯤은 구경할 만하다. 300여 년 전에 도자기 가마가 있었다는 레이호쿠는 그 전통이 끊어졌다가 120여 년 전부터 다시 도자기 생산을 시작했다고 한다.

레이호쿠에는 현재 10여 개의 도자기 가마가 있으며, 8개의 가마에서 옛 아마쿠사 도자기를 복원하고 부흥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게 가이드 혼조 씨의 설명이다.


태그:#규슈올레, #제주올레, #아마쿠사, #레이호쿠, #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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