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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관순.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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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유관순은 1919년을 붉게 물들인 격렬한 소녀 투사다. 양력 3월 1일에 시작된 시위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에 좋다고 해서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에 열린 천안 아우내장터 시위에서, 헌병의 총검에 복부를 찔리고 쓰러진 뒤에도 그는 계속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런 유관순의 모습을 보고 흥분한 헌병이 머리채를 잡고 발로 배를 걷어차도 그는 여전히 '대한독립 만세'만 외칠 뿐이었다.

같은 현장에서 부모님이 순국하자, 유관순은 헌병 주재소장에게 달려들고 또 다른 헌병의 소총을 붙들었다. 또 법정에서는 판사한테 의자를 집어던지고, 서대문형무소에서는 거침없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쳐댔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유관순은 만 17세 처녀였다. 평소엔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다. 이화학당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 때도 그냥 내려오지 않고 난간 위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올 정도로 장난스러웠다. 평소 모습대로라면, 그는 시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평소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라면 그의 전투적 활약상을 듣고 설마 하고 의아해 했을지도 모른다.

유관순의 친구 남동순, 그의 이야기

그런 유관순의 평범한 면모를 가장 많이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지극히 평범했던 동네 친구는, 지난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대학로 'SH 아트홀'에서 열린 연극 <반디>의 주인공 남동순이다. 이 연극에서는 남동순이란 이름을 남봉순으로 바꾼 상태에서, 독립운동가 남동순과 유관순의 인연을 다루었다.

남동순(1903년 생)은 유관순(1902년 생)보다 한 살 어렸다.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뒤에는 고아들을 위한 사회사업에 헌신했다.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고, 2010년 작고했다. 그런 남동순도 3·1 운동 직전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만 16세 처녀였다.

남동순을 괴롭히는 남자 아이가 눈에 띄면, 연극 속의 유관순은 언제라도 달려들어 남자 아이를 혼내주었다. 그래서 남동순은 유관순과 친구가 된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함께 서울로 유학을 떠난 뒤에도 남동순은 자기 이름 대신 '관순이 친구'로 불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평범한 처녀였다.

연극 속의 남동순과 유관순이 어울려 즐겁게 지내는 장면, 이화학당에 함께 진학한 두 처녀가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장면, 3·1 운동에 참가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장면들을 본다면, 3·1운동의 주역이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동순. SH 아트홀에 걸린 연극 프로그램(팸플릿)의 내용을 찍은 사진.
 남동순. SH 아트홀에 걸린 연극 프로그램(팸플릿)의 내용을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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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남동순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3·1운동을 주도한 장면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독립기념관 이정은 책임연구위원의 <3·1운동의 얼, 유관순>에 따르면, 시위가 시작되던 날인 3월 1일 이화학당의 서양인 교장이 시위를 만류하고 학교 정문을 닫아걸자 학생들은 "선생님! 이건 우리의 조국입니다!"라며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해 나가는 것이니 비켜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다음 날인 3월 2일에는 다른 학교 학생들이 이화학당에 몰려와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이화학당 학생들에게 3월 5일 서울역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면서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동생들아, 누이들아! 다 나와라! 우리나라 찾자! 너희들, 학교에서 공부만 하지 말아라! 나라 먼저 찾고 나중에 공부해라. 그래서 너희들, 될 수 있으면 만세를 부르고 서울역으로 와라."

치밀하게 만세 시위를 준비한 평범함 10대 소녀들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이 가슴 터지는 심정으로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점은 충남 천안군 입장면의 입장 장터 시위에서도 잘 표출됐다. 유관순이 천안군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벌이기 12일 전인 3월 20일의 입장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한 사람 중 하나는 만 13세밖에 안 된 한이순(1906년 생)이었다.

한이순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광명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3월 10일부터 한이순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한 또 다른 인물은 만 14세의 민옥금(1905년 생)이었다. 당시의 공주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한이순·민옥금은 황금순이라는 또 다른 학생과 함께 열흘간 태극기를 제작하고 학생들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만세 시위를 치밀하게 준비했다.

입장 장터 시위에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금광에 근무하는 광부들도 대거 참여했다. 10대 여학생과 광부들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시위는 700명 정도가 참여하는 규모 있는 시위로 발전했다. 읍 단위에서 700명 정도가 참여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런 일을 주도한 두 그룹 중 하나가 평범한 10대 소녀들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때는 이런 일이 아주 흔했다. 

3월 27일 충북 옥천군 이내면에서 벌어진 이원장터 시위에서는 면사무소에 가려고 집을 나선 농민이 우연히 시위대를 지도한 일도 있었다. 주인공은 공재익이라는 42세 농민이었다. 공주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면사무소에 가다가 우연히 가담한 그는 시위 참가자가 헌병대의 발포로 사망하는 모습에 격분했다. 그래서 어느새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를 파괴하고 헌병들을 제압하는 데 앞장섰다.

총·칼 들고 진압했는데도, 200만 명이 '만세운동'

 3·1 운동 당시의 만세 시위.
 3·1 운동 당시의 만세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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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3·1 운동 현장에서는 수많은 소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시위를 주도했다. 그들은 시위 현장이나 법정에서는 전투적인 투사였지만, 평소에는 시위 현장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것 같은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일본 측은 한국인의 5%인 110만 명 정도가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고 했지만, 한국측 통계에 따르면 참가자는 전체 인구의 10%인 200만 명 정도였다. 이런 대규모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유관순·남동순·한이순·민옥금·황금순·공재익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 헌병대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아대며 개중에는 말을 타고 진압하는 상황에서도 200만 명 정도의 한국인들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무기를 들지 않은 그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태극기 하나만 들고 무장 병력에 달려들었는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이 저항한 것은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수탈로 삶의 수단인 농토를 빼앗겼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이 시기 한국인들이 느꼈을 민족적 치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고종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든 것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당시의 한국인들도 지금의 한국인들처럼 고도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자기 토지를 빼앗겼다는 개인적 이유만으로 일본에 저항한 게 아니다. 그들을 뭉치게 한 것은 그들에게 민족적 치욕을 안긴 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임오군란(서민·하급군인들의 시장개방 반대투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인천에 상륙한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기지를 세운 뒤로, 조선인들은 외국 군대가 수도 코앞에 주둔하는 현실에 치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884년에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청나라 군대와 싸운 데에는 그 같은 치욕을 갚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용산 점령군에 대한 한국 서민들의 저항

용산에 주둔한 청나라군을 보며 치욕을 느낀 한국인들은, 청나라군이 물러간 뒤에 일본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또다시 목격했다. 그래서 그들은 청나라에 대해 가졌던 분노를 일본에 대해서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청나라가 주둔기지를 만들 당시, 한성 사대문 주변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곳이 바로 용산이었다. 철로나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이므로 수로를 통해 청나라-인천-한성을 가장 빨리 연결하는 동시에 언제라도 궁궐을 제압할 수 있는 위치는 한강에서 가까운 남대문 밖 용산이었다. 그래서 용산만큼 외국군이 주둔하기 좋은 곳은 없었다.

그런 이유가 어느 정도 작용하여, 1900년에 세워진 경성역(서울역)도 용산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바다를 통해 인천에 들어온 외국군이 철로를 거쳐 한성 코앞에 도착한 뒤 언제라도 궁궐을 제압하기 좋은 곳에 한국 제1의 철도역이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요지(要地)의 근처에 있는 주둔기지를, 청나라군에 이어 일본군이 차지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서울역과 용산기지가 이웃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당시의 한국인들도 치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민족적 치욕에 대한 자각이 토지 수탈 등으로 인한 경제적 상실감과 겹쳐지면서 3·1운동이라는 거대한 저항운동이 발생하고, 그런 저항을 평범한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다. 한마디로, 3·1 운동은 용산 점령군에 대한 한국 서민들의 저항이었다.

따라서 '대한독립 만세'는 일제강점기에만 유효한 구호가 아니다. 수도 서울 근처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그 외국군이 한민족의 경제·정치적 주권을 훼손하는 한, '대한독립 만세'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치욕이 제거되지 않는 한, 유관순·남동순·한이순·민옥금·황금순·공재익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일은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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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