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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에 군사 기밀을 넘긴 장교를 처벌하라!', '동료의 분신을 부추긴 사회 운동가를 단죄하라!' 각 수사 기관은 거침이 없었다. 법원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엄벌을 택했다. 그런데 유죄의 유력한 근거가 필적 감정뿐이라니.

[판결 대 판결] 11번째 이야기는 드레퓌스와 강기훈 사건이다. 프랑스와 한국, 19세기 말과 20세기 말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이 사건들이 어떻게 닮아 있을까. 또 어떻게 전개됐고, 어떤 점이 다를까. 두 차례에 걸쳐 다룬다... 기자 말

(1편 : "동료 자살 배후조종, 그 남자의 황당한 누명")

자살방조죄. 자살하려는 사람의 자살행위를 도와주어 용이하게 실행하도록 함으로써 성립하는 죄다. 판례는 자살방조의 방법으로 "적극적·소극적, 물질적·정신적 방법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강기훈은 왜 자살방조죄가 인정되었을까. 법원은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하는 방식, 다시 말해 "적극적, 정신적 방법"으로 김기설의 자살을 도왔다고 판단하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대필했는지는 검찰도, 법원도 밝히지 못했다. 아니 밝힐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1991년 5월 27일 강기훈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실연을 해보이고 있다.
 1991년 5월 27일 강기훈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실연을 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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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장에는 유서대필의 일시와 장소가 "1991년 4월 27일경부터 같은 해 5월 8일까지 사이의 일자 불상경 서울 이하 불상지에서"라고만 적혀 있었다. 피고인 측은 방어권 행사가 불가능하다고 항변했지만, 법원은 유서대필 여부가 쟁점이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1심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종종 확신없는 태도를 보였다. <동아일보> (1991년 12월 20일자)에 따르면 재판부는 결심공판이 끝난 뒤에도 "확실한 심증을 형성하지 못했다"며 초초해했다고 한다. 같은 날 재판장인 노원욱 판사는 "유죄를 선고했을 경우 제3가 나타나 내가 유서를 썼다고 양심선언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를 표했다(<한겨레> 12월 21일자 보도).

재판부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 이해해달라"  

이러한 태도는 판결 선고에서도 이어졌다.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번 판결이 객관적으로 절대적 진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의 증거로 볼 때 피고인이 유서를 대신 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서 "대필사실이 인정되는 이상 엄벌에 처해 마땅하지만 유서대필 경위가 적극적이었는지 여부가 불분명해 양형을 조정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재판부의 소신이 의심스러운 대목이지만, 한편으론 무죄에 따른 파장도 무시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1991년 당시 <경향신문>도 재판결과에 대해 "1심 재판부의 이번 유죄선고는 재판부의 절대적인 신념이나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무죄가 선고됐을 경우 사회전반에 미칠 엄청난 파문과 부작용을 고려한 '차선의 선택'으로 보여진다"고 분석했다.  

2심 판결(서울고법 재판장 임대화)과 대법원 판결도 1심과 별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1992년 7월 24일 상고기각 판결로 유죄를 최종 확정한다. 재판은 전적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2010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승격)의 감정결과에 기댄 판결이었다.

필적감정, 오류 가능성은 없나?

필적감정은 지문이나 혈흔, DNA 감정과 같은 수준의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 눈으로 식별하는 감정의 특성상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강기훈 사건 당시 형사사건의 필적감정은 국과수가 도맡아했고 법원은 결과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 한 해 수천 건의 감정결과가 국과수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피고인의 운명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1991년 5차례에 걸친 유서필적감정은 명의만 국과수였을 뿐 사실은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씨가 거의 전적으로 진행했다.

김씨는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와 "필적감정의 경우 감정목적물과 대조자료의 각 글자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유사비율이 70% 이상이면 동일 필적, 45% 이하이면 상이 필적이 원칙"이고 "강기훈씨 필적이 몇 % 이상 유사한지 구체적 수치자료는 없다"고 진술했다.

자살방조의 유일한 증거를 만들어 낸 전문가의 진술치고는 다소 허술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유사비율'의 판단은 전문성이나 개인적인 능력, 주관에 따라 좌우될 소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감정결과를 맹신하는 일은 위험하다. 이런 한계 때문에 유서필적 감정결과도 1991년 1심에서부터 2013년 재심 때까지 감정기관과 문서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국과수 필적 감정인 구속에 법원은 "유서대필사건과는 별개"

필적감정 자체가 갖는 한계를 감안하면 법원은 감정 결과를 신뢰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 외 다른 보강증거도 살펴야 했다. 그것으로 부족하면 여러 군데서 감정을 받아 오류가능성을 줄이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강기훈의 변호인단은 1991년 일본의 오니오 요시오라는 감정인을 통해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감정결과를 제출했지만, 법원은 한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신원불상의 재일교포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한 것으로 "감정인으로서 기본능력과 감정의 기본조건을 결한 것으로서 믿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뿐 아니다. 감정인이 외부에 영향을 받아 감정결과가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2심 재판 도중인 1992년 2월, 국과수 직원이 돈을 받고 허위감정을 했다는 사설감정인들의 폭로가 나왔는데 김형영씨도 뇌물수수 혐의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김씨는 1998년에도 토지문서를 허위감정해준 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법원이 '한국 필적감정의 최고 권위자'라고 추켜세운 김씨가 구속됐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2심 재판부(재판장 임대화)는 "김형영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그의 감정에 의심이 있을 수 있으나 유서 대필사건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김씨의 필적감정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필적감정기관의 신뢰가 흔들렸지만 법원의 유죄판결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유서대필이 곧바로 범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백번 양보하여 검사의 주장대로 유서대필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곧바로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자살방조로 보아야 하는가. 대법원은 "정신적 방법에 의한 방조"라고 해석했지만 일부 학자는 유서대필을 했더라도 살인과 유서대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죄가 성립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2006년 진실화해위 "국가 사과와 재심 권고"

사건은 의혹 속에 이대로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2006년 진실을 밝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강기훈 유서대필의혹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의결하였고, 필적 재감정결과와 관련자 증언 등 1년여의 조사를 벌인다.

진실화해위는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 김기설씨의 필적인 담긴 자료를 새로 발견하고 감정대상에 추가한다. 위원회는 1991년 국과수의 감정결과와는 별도로, 2006~2007년 7곳의 사설감정기관에 감정을 의뢰하고 2007년에는 국과수로부터 다시 한 번 감정결과를 통보받는다. 감정 결과는 1991년과 딴판이었다. 특히 국과수는 유서와 강씨의 필적이 동일하다고 감정했던 1991년과 달리, 2007년 재감정에서는 유서가 고인의 필적임을 인정했다. (자세한 사항은 표 참고).

재판 쟁점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
 재판 쟁점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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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진실화해위는 1년 반 넘게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필적감정 및 정황에 의거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한 것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을 요구하는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에 위반한 것"이라며 국가의 사과와 재심 조치 등을 권고하는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2012년 재심에서도 필적감정결과 다시 쟁점

이에 따라 당사자인 강씨는 2008년 재심청구를 했다. 서울고법은 김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여 국과수 등이 다시 감정을 한 결과에 주목했다. 또 유죄인정의 결정적 근거가 됐던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뒤바뀌자 서울고법은 이를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법은 2009년 9월 15일 "재심사유가 인정된다"며 재심개시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검찰이 이에 불복, 항고하여 대법원이 다시 재심사유를 판단하게 되었다. 대법원은 재심사유를 인정하면서도 "진실화해위의 감정결과가 종전(1991년)의 국과수 감정결과보다 객관적으로 현저히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심에서 문서감정결과를 둘러싼 공방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은 서울고법(제10형사부 재판장 권기훈)으로 내려와 재심은 시작되었다. 쟁점은 여전히 유서의 필적이 강씨의 필적인지였다. 재판부는 1991년 국과수 감정결과에 대해 "김형영 작성 감정서의 신빙성이 없다"고 배척하면서 감정방법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먼저, 1991년 감정결과는 "유서의 필적에 나타난 희소성"을 근거로 유서가 강씨의 필적이라고 보았는데 이에 대해 재심 재판부는 "희소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유서의 필적에 일관되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항상성'이 있는 특징들이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유서와 김기설의 필적이 다르다는 1991년의 감정결과에 대해 재판부는 "유서는 속필체인데, 제출된 김기설의 필적은 정자체인 점을 지적하며 "위 문서들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필적감정의 일반원칙에 어긋나고, 대조자료로도 부적합하다"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2013년 국과수에 김씨의 필적에 대해 다시 감정을 의뢰했는데 "유서와 동일필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1991년 감정결과는 믿기 어렵고 2006~2007년 진실화해위를 통한 감정결과 등을 토대로 유서의 필적과 강씨의 필적은 서로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서울고법 "유서 필적, 강씨 아니다" 재심 무죄... 대법원은?

재판부는 전민련이 제출한 수첩, 업무일지의 조작 여부에 대해서도 "조작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설사 조작되었더라도 조작자는 적어도 강씨는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 '강씨의 행적과 발언이 수상했다'는 검찰의 지적에 대해서도 "유서와 피고인의 필적이 다른 이상, 일부 의혹이 있다는 것만으로 유서를 작성하였다고 단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일축했다.

그렇다면 유서는 김기설씨가 썼을까. 법원은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2013년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감안할 때 동일 필적일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김기설씨가 문장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서 "유서는 김씨가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유서 필적과 관련된 서울고법의 판단은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은 다르고 ▲유서와 김기설의 필적은 동일 필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결론적으로, 재심전 재판에서 유죄의 근거가 된 감정결과는 믿기 어렵고, 나머지 증거로는 자살방조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따라서 강씨는 무죄가 되었다. 이 판결에 대해 검찰은 상고를 선택했고 2015년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아있다.

*1991년 국과수 감정은 당시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의 주도하에 실시. 
*2007년 국과수 감정은 문서감정실 소속 5명이 참여하여 진행되었음.
*2006~2007년 감정은 7곳의 사설 감정기관 통해 진행됨.
▲ 시기별 김기설, 강기훈 필적 감정결과 *1991년 국과수 감정은 당시 문서분석실장 김형영의 주도하에 실시. *2007년 국과수 감정은 문서감정실 소속 5명이 참여하여 진행되었음. *2006~2007년 감정은 7곳의 사설 감정기관 통해 진행됨.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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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의 승리"

20세기 초, 프랑스의 드레퓌스는 14년 만에 반역자의 누명을 벗고 군에 복귀했다. 하지만 한국의 강기훈은 2015년 현재 여전히 재판 중이다. 강씨는 자신을 드레퓌스와 연관짓는 것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드레퓌스 사건이 오늘의 프랑스를 만든 이정표가 된 것은 맞"지만 "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무슨 영향을 줬나"고 반문하고 있다(관련기사 : "조작 가담자는 출세... 나는 '드레퓌스'가 아닙니다").

그의 곁에는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불의를 고발하고, 진실을 대변해 줄 '에밀 졸라'가 없었기 때문일까. 정말로 강씨는 헛된 청춘을 보낸 걸까.

유서대필의혹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20여 년이 흘렀고, 재심신청을 낸 지도 6년이 지났다. 강씨는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 사법부의 신중한 판단도 좋지만, 사건을 하루빨리 매듭짓는 것이 정의를 바로세우는 길일 수도 있다. 1991년 1심 판결을 앞두고 법정에서 절규하던 변호인의 외침이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피고인 강기훈의 승리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승리이다. 지금 저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은 강기훈이 아니라 '공권력의 남용'이다. 강기훈은 무죄이다."(1991년 12월 4일 , 1심 재판 변호인 최후변론 중에서)


태그:#강기훈, #유서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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