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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에 군사 기밀을 넘긴 장교를 처벌하라!', '동료의 분신을 부추긴 사회 운동가를 단죄하라!' 각 수사 기관은 거침이 없었다. 법원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엄벌을 택했다. 그런데 유죄의 유력한 근거가 필적 감정뿐이라니.

[판결 대 판결] 11번째 이야기는 드레퓌스와 강기훈 사건이다. 프랑스와 한국, 19세기 말과 20세기 말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이 사건들이 어떻게 닮아 있을까. 또 어떻게 전개됐고, 어떤 점이 다를까. 2차례에 걸쳐 다룬다... 기자 말

[판결 1] 1894년 드레퓌스 사건

1894년 9월, 프랑스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명세서'라는 종이 쪽지가 발견됐다. 명세서에는 프랑스군의 대포 개발 현황, 전시 포병 부대 위치도 등 일급 비밀이 담겨 있었다. 당시 프랑스와 적대 관계였던 독일에 누군가 군사 기밀을 넘겼다면 곧 반역 행위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군 참모 본부는 뒤집어졌고, 스파이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됐다. 군 당국은 전도유망한 장교 한 명을 군사 기밀 유출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의 이름은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였다.

19세기 말, 프로이센과의 전쟁(보불 전쟁)에서 패한 뒤 민족적 열등감에 빠진 프랑스는 경제가 어려웠고, 반유대계 정서도 심각했다. 군 내부에서는 가톨릭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일반 사회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독일군에 처참하게 패배한 프랑스군은 패배가 내부의 반역 행위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에 책임을 추궁할 희생양을 찾아야 했다. 군 당국은 그 독일군 스파이가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는, 독일어가 가능한 유대인'이라는 '심증'으로 사건에 접근했다.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 바로 포병 대위 드레퓌스였다.

드레퓌스가 스파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다. 군 당국은 명세서 끝에 'D'라는 서명이 있다는 점과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와 동일하다는 감정 결과를 근거로 들었다. 지휘부는 확신도 없이 드레퓌스의 체포를 승인했다. 여기에는 유대인인 드레퓌스의 출신 배경도 작용했다. 또 드레퓌스가 알자스에서도 전통적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던 지역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독일군에 포섭됐을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스파이로 몰린 장교 드레퓌스, 증거는 필적

알프레드 드레퓌스
 알프레드 드레퓌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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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과정에서 많은 감정인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명세서'의 필체가 일치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군법회의는 1894년 12월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선고했다. 그는 국가 반역죄로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악마의 섬'으로 유배됐다.

1896년 3월 참모 본부 정보부장으로 새로 오게 된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사건을 재조사한다. 그 결과, 명세서를 작성한 사람이 드레퓌스가 아니고 진범은 귀족 가문 출신 에스테라지 소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카르는 진실을 밝히려고 군 수뇌부에 보고하지만, 외면 당하고 되레 인사 발령 조치를 당한다. 범행을 강력하게 부인한 에스테라지는 1897년 조작된 증거가 제출된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재판 직후 영국으로 도피한다.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우고 정작 스파이는 도망가도록 방임한 군 수뇌부의 횡포는 양심 있는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 대표적 지식인이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그는 1898년 1월 13일 일간지 <로로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의 글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 일로 에밀 졸라는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 후에도 비판 여론이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군 수뇌부도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피할 수 없었다. 1899년 최고 재판소는 군법회의에서 이 사건을 다시 심리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드레퓌스가 외국 또는 외국 첩보 요원과 내통하고 음모를 꾸몄으며, 그들로 하여금 프랑스에 대한 적대 행위 또는 전쟁을 유발하도록 했거나, 명세서에 언급된 자료들을 넘겨줌으로써 그 방법을 제공했다"는 공소 사실은 유죄로 인정되었다.

드레퓌스는 이번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대신 정부는 열흘 뒤 드레퓌스에게 특별 사면을 내렸다. 이런 기형적인 형태의 결론은 군부의 명예를 살리고 드레퓌스의 처벌을 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다시 재심을 청구했고, 1906년 7월 12일 대법원은 그제야 무죄를 선고한다. 그 뒤 드레퓌스는 후에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군에 복귀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 때문에 희생양이 돼야 했고 13년간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 인권에 대한 각성과 지식인의 현실 참여를 고민하게 한 사건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돌아보자. 당시 필적 감정만 제대로 이뤄졌어도 드레퓌스가 반역자로 몰려 처벌받는 불상사는 일어날 수 없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형사 재판에서 왜 엄격한 증거가 필요한지를 방증하고 있다.

필적 감정 때문에 피고인이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일은 과거 먼 나라의 이야기이기만 한 걸까. 1991년, 대한민국에서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판결 2]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

1991년 5월 27일 강기훈은 분신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신 썼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명동성당으로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직접 필적을 시연했다. 사진은 1991년 5월 28일 <한겨레> 15면에 실린 김기설과 강기훈의 글씨 대조본.
 1991년 5월 27일 강기훈은 분신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신 썼다는 의혹을 부인하며 명동성당으로 찾아온 기자들 앞에서 직접 필적을 시연했다. 사진은 1991년 5월 28일 <한겨레> 15면에 실린 김기설과 강기훈의 글씨 대조본.
ⓒ 한겨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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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변혁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경,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 본관 옥상에서 한 청년이 "정권 퇴진"을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다. 그는 사회 운동 단체들의 통합 조직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사회부장 김기설씨였다. 그는 위의 내용이 포함된 유서 2통을 남겼다.

그는 왜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까.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 말기로 여당이 수세에 몰리자 1990년 3당 합당을 추진하고, 그것도 모자라 공안 통치와 각종 비리로 정권을 향한 불만이 높았던 시기였다. 1991년 4월 26일에는 명지대 1학년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다. 전국에서는 연일 수십만 명이 정부 규탄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젊은이들의 죽음이 잇따랐다. 그해 6월까지 총 13명의 희생자가 나왔는데 대부분은 분신, 투신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정권에 항거한 청년들이었다. 김기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이른바 '분신 정국'이 조성되자 시민 운동 원로들은 청년들을 향해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고 호소하는 일이 잦아졌다.  

1991년 대한민국 검찰 "분신한 동료의 유서를 작성해줬다"

그 가운데 그해 5월 시인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고 호통을 치는 글을 기고하고, 박홍 서강대 총장 역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배후 세력이 있다"고 기자회견을 연다. 이에 호응하듯 '분신 배후 세력을 찾는다'는 황당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이 황당한 수사는 이내 현실을 지배해 갔다. 김기설씨 사망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지검 강력부는 1991년 5월 18일 김씨의 유서가 대필됐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강신욱 부장검사는 "유서의 필적이 김씨의 친필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김씨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를 편 결과, 유서를 대신 써준 용의자를 1명으로 압축했다"고 발표했다. 그 용의자는 바로 전민련 동료 강기훈씨였다.

사실 학생운동, 시민운동 내부를 이해한다면 '동료의 죽음을 부추겨서 투쟁을 선동한다'는 지적은 황당무계했다. 특히 도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운동 진영에서 동료에게 자살을 권유하거나 유도하는 사건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서 대필 논란은 수세에 몰린 정권의 엄포나 운동권 흠집 내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단적인 예로 1991년 5월 25일 <동아일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김기설씨 유서 자필 확실'이었다. <동아일보>는 "김씨의 유서 대필 여부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김씨 수첩의 필적인 감정결과 김씨의 유서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25일 전해졌다"며 "그동안 검찰과 전민련 사이에 벌어진 대필, 자필 공방전은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1991년 7월 18일 한국기독교협의회 김기설씨분신사건진상조사위 박형규 위원장(오른쪽)은 회견을 갖고 일본에서 감정한 김기설씨 유서대필 관련 문서를 내보이며 강기훈씨의 필적과 김씨의 필적은 상이한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1991년 7월 18일 한국기독교협의회 김기설씨분신사건진상조사위 박형규 위원장(오른쪽)은 회견을 갖고 일본에서 감정한 김기설씨 유서대필 관련 문서를 내보이며 강기훈씨의 필적과 김씨의 필적은 상이한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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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후 검찰은 김씨 수첩이 조작된 것이라고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한다. 검찰은 전민련이 증거로 제출한 서류들의 진위 공방에 더해, 김씨의 여자친구 홍아무개씨가 검찰에게 유리하게 진술한 부분과, 사건 직후 강씨의 행적이 수상하다는 점을 내세워 다시 반격에 나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를 내세워 "유서는 대필해 준 것"이라며 1991년 7월 구속 기소하기에 이른다. 검사의 공소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피고인 강기훈은 김기설이 반정부 투쟁 분위기를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분신 자살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결행을 용이하게 할 의도로, 서울 모처에서 2장의 유서를 작성하여 줌으로써 분실 자살 결심과 결행을 용이하게 도와주어 자살을 방조하였다.

공소장에는 심지어 김씨가 고등학교를 중퇴해 "지식과 문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고인의 지식과 문장력을 이용"해서 유서를 썼다는 언급도 있다. 기소 자체가 민주화 운동에 미친 타격은 컸다. 운동가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동료의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로 인식됐다.

법원,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 신뢰 "자살 방조죄 인정"

드레퓌스 사건 vs. 강기훈 사건
 드레퓌스 사건 vs. 강기훈 사건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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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대필해서 자살을 배후 조종했다"는 사상 초유의 사건에 대해 재판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12회 공판이 진행됐고, 21명이 증인으로 출석한 가운데 피고인과 검찰이 유·무죄 공방을 펼쳤지만, 재판은 검찰의 완승으로 끝난다. 1심인 서울형사지법(제25부 재판장 노원욱)은 자살 방조와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 가입) 혐의를 모두 인정, 강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 정지 1년 6월을 선고한다. 재판부는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를 받아들여 유서를 강씨가 대필해 준 것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종종 확신 없는 태도,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여왔고 판결 선고 후에는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재판부가 유죄를 확신하지 못했다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무죄를 선고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 의심을 국과수에 대한 무한 신뢰로 지우려 했다.

정말로 강기훈은 유서를 대필해 줬을까. 국과수의 필적 감정은 한 치의 오류도 없는 과학 수사의 결과물이었을까.

(2편에서 이어집니다)


태그:#드레퓌스, #강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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