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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성적소수자를 위한 공익재단, 비온뒤무지개 재단 이사장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저를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최초라는 영예가 자랑스러워서가 아닙니다. 성적소수자를 위한 재단이 존재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저를 당당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제 소개를 다시 해야겠군요. 지난해 1월부터 2015년 2월 현재까지 서울시, 국가인권위원회 그리고 법무부에 성적소수자를 위한 사단법인 설립을 신청했으나 모두 퇴짜 맞은, 비온뒤무지개 재단의 이사장입니다. 설립허가도 받지 못했는데 재단이란 명칭을 쓴다고 시비 거는 사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네요.

성적소수자를 위한 재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모은 것은 2년 전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성적소수자 인권운동이 시작된 지 2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차별 속에 고통스러운 일상을 살아가는 성적소수자들을 위해 뭔가 다른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성적소수자의 부모와 오랫동안 그들의 인권을 위해 일해 온 활동가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성적소수자들에게 공익적 차원의 사회안전망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편견 없는 기부문화 확산을 통해서 의미 있고 다양한 인권증진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재단이라는 틀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했습니다. 재단이 되면 관청의 감독을 받아 예산집행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고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재단 설립, 서울시에 문의했더니...

비온뒤무지개재단 사무실 입구에 있는 올해 퀴어문화페스티벌 슬로건.
▲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비온뒤무지개재단 사무실 입구에 있는 올해 퀴어문화페스티벌 슬로건.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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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적소수자의 부모로서 재단 설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 문제를 개인적인 불운이며 알아서 해결해야할 문제로 보았지만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지켜보면서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인식에 도달했습니다.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이 없었다면 수많은 성적소수자들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가족에게서 내몰리지 않았을 테니까요.

뜻을 함께 한 뒤 1년에 걸쳐 재단 설립과 운영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창립을 준비했고 저희 뜻에 동참하는 343명의 창립회원과 1억 원의 기금을 모았습니다. 드디어 지난해 1월에 창립총회를 열고 주소지인 서울시에 법인등록을 하고자 문의를 했지요.

"미풍양속에 저해되는 사안이라 등록이 안 될 것입니다."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격려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인권이 살아 숨 쉬는' 도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내보인 서울시에서 이런 식으로 박대를 당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밥 한 술이라도 먹여 보내는 게 우리의 미풍양속 아니었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법인등록을 하려하자 이번에는 '성적소수자 문제는 인권 관련된 사안이므로 우리에게 위임된 업무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로 가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서울시에는 수많은 성적소수자들이 시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시에는 시민들의 복지, 인권, 경제, 안전, 건강, 행정, 문화, 환경, 여성 등을 담당하는 많은 부서가 있지요.

그런데 그 수많은 부서 중에 성적소수자를 담당해 줄만한 부서는 없네요. 담당부서가 없다는 건 서울시가 시민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반증임을 그들은 모르나 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지요.

인권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곳인가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로 갔습니다. 인권위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곳이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모든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하는 일을 하는 곳이니 이곳에서는 받아주겠지 싶었습니다.

인권위를 방문해 담당공무원에게 사단법인 등록 서류를 제출하려 했지요. 하지만 만류 당했습니다. 상임위원회가 보수적이어서 내봤자 통과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제출하려 하자 서류에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서 수정해서 다시 가져오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더군요.

"이런 식으로 계속 수정을 요구하면서 1년 이상 끌 수 있으며 그럼에도 통과는 안 될 것입니다."

인권위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곳일까요? 작은 불빛에 의지한 채 간신히 어둠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밝은 곳으로 나오게 해주는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예 그 작은 불빛마저 꺼버리는 곳이네요. 차라리 '인권'이라는 말을 달고 있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요건 모두 충족한 뒤 찾아간 법무부, 그러나

'퀴어락'. 비온뒤무지개재단 부설 기관으로, 성적소수자의 역사적 기록물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퀴어락'. 비온뒤무지개재단 부설 기관으로, 성적소수자의 역사적 기록물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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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세 번째로 법인 등록을 시도한 곳은 법무부입니다. 정부조직법에 법무부는 인권옹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설립목적과 사업이 실현가능하고 목적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재정적 기초가 있으면 법인 설립을 허가해주도록 되어 있지요. 저희는 그 모든 요건을 충족했기에 이번에는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보편적 인권을 다루는 곳이므로 한쪽에 치우친 주제를 허가하기 어렵'다는 답을 들었지요.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문제라는 거였지요. 인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인데 보편에서 제외되는 인권이란 게 있을 수 있느냐, 사회적 인식이 문제라면 그걸 바꾸는 일을 우리가 하겠다는데 왜 안 되냐고 물었지만 서류를 접수한 지 3개월이 넘은 현재까지 아무런 답이 없습니다.

설립 허가 신청을 받은 관청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20일 내에 허가 또는 불허 처분을 하여 신청인에게 통지해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들이 내세우는 특별한 사유가 있지요. 연말이라 바쁘다, 검토와 논의가 더 필요하다, 인사이동이 있어서 윗분이 공석이다... LTE 시대에 이렇게 느려터진 행정이라니요. 국장님이 안계시면 국민의 인권은 보류되는 것이었군요.

모험을 떠난 옛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보통 세 번의 시련을 겪으면 집으로 돌아오지요. 저희에게는 아직도 거쳐야 할 모험과 난관이 많이 남아있나 봅니다. 서울시, 인권위, 법무부 모두 법인 허가에 난색을 보인 이유는 달랐지만 저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귀찮음과 두려움을 봤습니다. 언젠가는 될 일이겠지만 이 번거로운 일을 왜 내가 지금 맡아야 하는가? 다수의 힘과 정치적 논리를 절대 무시할 수 없어!

제가 견문이 좁아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상에는 마땅히 해야 할 일과 꼭 지켜야할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행해지고 지켜질 때 그 토대 위에서 좀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진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보듬어주는 세상 만들고 싶어요

저는 성적소수자의 엄마입니다. 저희 아이는 조금 특별한 아이죠. 아이 덕분에 저도 조금 특별한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특별한 삶을 살게 되었지요. 저는 이 특별함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그들만의 특별함을 지닌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꿈과 그가 지닌 가장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것, 우스운 것, 더 나아가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얼마나 비극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비온뒤무지개 재단은 사회적 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성적소수자들에게 꼭 필요한 '손'을 내밀어 주는 역할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조금씩 다른 의미로 특별한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특별함을 보듬어주고 격려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 일이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일이라면 새로운 미풍양속을 만들어가겠습니다. 그 일이 치우치는 일이라면 기꺼이 치우치겠습니다. 그 일이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특별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양식 있는 공무원들이,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들이, 사려 깊은 종교인들이, 다양성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겠지요. 그때까지 저희는 관용과 연민과 사랑의 긍정적 에너지를 세상에 내뿜겠습니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는 걸 믿으니까요!


태그:#비온뒤무지개재단,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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