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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승마꽃
 승마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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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민족작가대회

나는 2005년 7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 평양·백두산·묘향산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에 참석했다. 나는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가능하면 평양에 거주한다는 허형식 장군의 딸 아들 허하주·허창룡 남매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서 단단히 준비했다.

내가 쓴 <항일유적답사기>와 내가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애써 검색 수집하여 펴낸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그리고 비전향장기수의 딸과 해직기자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나의 첫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등을 가방에 챙겨 갔다. 북한 방문 첫날 만찬회가 끝난 뒤 나는 그 책들을 나의 안내 담당에게 전했다. 그는 특히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펼치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드러케 이런 사진집을 냈습니까?"
"미국에 가서 수집한 겁니다."
"아, 네!"
"북녘에 한국전쟁사진이 많습니까?"
"그런 말씀 마시라요. 조선해방전쟁 때 북조선에는 남아난 게 없었습니다."

당시 서방기자에 비친 북녘은 원시시대로 돌아갔을 만큼 미군(유엔군)의 폭격으로 온 산하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 처지에 변변한 사진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2005 남북민족작가대회, 출발에 앞서 염무웅 이사장이 인천공항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2005 남북민족작가대회, 출발에 앞서 염무웅 이사장이 인천공항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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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만 공산명월

민족작가대회 이튿날인 2005년 7월 21일 북측에서 안내한 평양 시내 관람 첫 곳은 만경대 고향집으로 김일성 주석 생가였다. 이곳 경치가 뛰어나서 '만경대'가 되었다는 안내원의 지명 유래 설명이 있었다.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1912년 4월 15일 이곳 만경대 고향집에서 태어나시어 14살 되시던 925년 1월 만경대를 떠나셔서 20년 만에 고향집에 돌아오시었는데 그때까지 살아계시던…."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왼쪽 가슴에는 김일성 배지를 단 검은 머리의 안내원이 마이크를 잡고서 속삭이듯 내뿜었다.

고향집은 지난날 우리네 농가나 다름없이 꾸며 놓았다. 그런데 나는 만경대 고향집을 둘러보면서 성지가 된 이곳과 흔적도 찾을 수 없는 허형식 장군의 생가가 견주어졌다.

연세대 신주백 교수의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에 따르면, "1942년 7월 16일, 소련은 A 야영 B 야영을 합쳐서 동북항일교도려(또는 88특별보병여단)를 조직한 바, 제1영장에 김일성 제2영장에 왕효명 제3영장에 허형식(취임 전 희생) 제4영장에 시세영 (486쪽)"을 임명했다고 한다. 소련 측에서는 허형식과 김일성 두 인물을 대등하게 평가했다.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는 일이지만, 또 다른 역사학자(강만길)는 만일 허형식 장군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이 분이 북녘 아니면 남녘에서 정권을 잡았거나 통일정부를 세웠을 거라고 높이 평가했다.

북한 방문 내내 느낀 불만은 오직 김일성 주석만 오로지 우상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만 아니라 베이징에서 만난 독립지사 원로 이명준 선생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누구나 공과가 있기 마련인데 북조선의 김일성 주석은 다른 항일동지의 공은 무시하거나 숙청, 제거하고 자기만 공산명월로 지칭한 점이 과(過)이지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 허형식 장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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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과 김책

내가 평양에서 만난 담당 안내원은, 비행장 가는 버스에서 동석한 조선작가동맹의 김병훈 위원장도 허형식 장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한결같이 말했다.

"허형식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충직한 전사로서, … 김일성 동지의 방침을 심장으로 받들고 북만의 광활한 지대에서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벌여 일제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정치군사적 타격을 주었다. …."

허웅배 선생 친필 원고
 허웅배 선생 친필 원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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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말은 조선역사사전에 나온 말을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말했다.

이에 대해 왕산의 손자(허형식의 큰집조카)인 허웅배(許雄培, 일명 許眞)는 "허형식 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충직한 전사"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고, 그의 저서 <김일성정전> 원고에서 밝혔다. 허형식과 김일성은 "활동지역이 달랐고, 부대계통도 달라 서로 대면한 일이 있을까 의심스럽다"면서 허형식과 김책의 관계는 서로 목숨을 줘도 아깝지 않는 문경지교였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허형식 동지와 김책 동지의 호상관계는 누가 누구의 상관이었느니, 누가 누구의 지도를 받았느니 하는 따위의 문제를 따질 졸렬한 감정이 끼일 자리가 없는 깨끗하고도 숭고한 혁명동지 사이의 리상적인 관계였다. 이것은 그들이 동급의 간부였고, 한 부대에서 함께 사선을 넘어 왔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깨끗하고 장한 인간들이었으며 견실하고, 참된 애국자, 혁명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순수한 혈맹관계였던 탓인지, 김책은 한국전쟁 직전 서울에 살고 있는 허형식 가족을 자기가 돌보고자 밀사를 보내 허형식의 아들을 월북시켰고, 전쟁 중 9·28 후퇴 때는 딸 하주를 북으로 데려갔다. 아마도 젊은 날 심양감옥에서 두 사람간의 혈맹 약속을 지킨 아름다운 동지애이리라.

허형식 장군의 자녀들

2005년 7월 22일 나는 북한 삼지연 공항에서 백두산을 가는 버스 안에서, 또 7월 24일에는 묘향산에서 평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 담당 안내원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허형식 장군 딸 아들이 평양에 살고 있습니까?"
"살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잠시 만나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 속담에 있지요. '첫 술에 배부르랴'."

나는 그가 하는 말의 뜻을 금세 알아채고 더 이상 보채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건넨 한국전쟁 사진집 탓인지 매우 속 깊은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대화는 각각 남과 북에서 살아온 탓으로 서로 평행선을 그었지만, 그래도 그 밑바탕에서는 같은 피가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몇 해 후 중국에 사는 한 동포가 메일을 보내왔다.

건강하십니까? 이미 이메일로 몇 차례 연계했던 허광입니다. 선생님의 기사를 꼭꼭 채근하는 독자이기도 하구요. 머지않아 일제가 패망한 지(조선해방) 60돌이 되는 날이기에 항일독립운동역사를 기사화하시는 박도 기자선생님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이전에 허형식 장군의 글을 잘 보았고, 선생님의 기사를 통해 허 장군의 가계가 일제의 조선침략을 반대하여 투쟁했고, 또 그 후과로 일가가 산산 흩어져 수난을 겪어야 했다는 내용도 알게 되었지요.

저도 허형식 장군의 자식들(허창룡과 그의 누나)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알아보기도 했죠. 허형식 장군은 평양의 <대성산열사릉>에 모셔져 있고, 허창룡과 그의 누나는 평양시의 만경대구역이라는 곳에 자식들과 년로한 몸으로 지내고 있다네요. 허창룡이 71살 정도이니 그의 누나는 더 년로하시겠죠. 저에게 소식을 전해주신 분은 허창룡이 이제는 년로하시니 부모님들의 사진이라도 보고 싶어 한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말을 타고 찍으신 사진으로나마 보아왔으나 어머니(성함이 김정숙이라고 함)는 사진도 없다고 하니 … 몹시 괴롭고 마음이 상하시겠지요.

하여 박도 기자 선생님이 알고계시면 허형식과 부인에 대한 사진자료, 또 근친들의 행적(허형식, 김정숙 등의 근친)등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어떠한 의도는 물론 없고, 북조선과 연계되여 무역거래를 하고 다니니 상기 내용들에 흥미를 가지고 불편해하는 유공자들을 작게나마 돕고자 할뿐입니다. 항일운동의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고, 우리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또 일제를 제일 미워하는 저였기에 힘든 부탁을 선생님께 드립니다. 열열독자 허광 드립니다.

나는 그 메일을 받고 허 장군 일가친척에게 허형식 부인 사진을 수소문했으나 유감스럽게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허형식 부인 고향인 본적지 경북 봉화군 물야면으로도 일가들이 사는지 조회해 보았으나 족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해방과 한국전쟁 공간에서 그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절박한 시기에 사진 한 장조차도 남을 수 없는, 아마도 그때까지 살아남은 가족들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가족사진조차도 불태워 버렸을 우리 현대사의 비정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긴박한 사정을 오늘의 처지로 어찌 설명하겠는가.

연재를 마치면서

지난 2014년 10월 6일 시작한 [박도 실록소설 '들꽃']은 오늘 41회 기사를 끝으로 마무리한다.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린 부끄러움과 함께 1999년부터 쓰려고 하였다가 자료 부족과 나의 무식함, 게으름 등으로 미뤄오던 일을 일단 끝냈다는 점에 마치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시원한 감도 있다. 이 글이 나중에 작가나 역사학자들이 허형식 장군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한 조각이 될 수 있다면 분외의 영광이겠다. 부족한 이 글을 쓰는 데 도와주신 분이 참으로 많다.

무엇보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장세윤 박사가 가장 많이 도와주셨다. 당신이 소장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을 뿐더러, 내가 글을 쓰다가 의문점이나 막힐 때는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뵙거나 메일로, 전화로 괴롭혔다. 그때마다 싫은 내색 한 번 하시지 않고 일일이 답해주실 뿐 아니라, 미처 챙기지 못한 자료와 일화까지도 속속들이 들려주셨다.

또, 나의 항일유적지 답사 길잡이였던 이항증(광복회경북지부장) 선생은 당신 어머니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저서를 마음대로 전재케 함은 물론이거니와 틈틈이 집안사 자문에도 흔쾌히 들어주셨다. 서울에 사는 허벽 선생은 허형식 장군의 큰집 손자인데, 온갖 자료, 심지어 임은허씨 족보까지 챙겨주셨다. 하지만 내 필력이 부족하여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치 못함을 깊이 사죄드린다.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이 원고를 다시 가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낸 뒤 고향 구미를 찾아가 금오산 아래에다 이 책을 제물로 펼치고 허형식 장군의 명복을 비는 큰 절을 드리고 싶다.

이제 이 글의 마무리로 1928년 중국 혜림진에서 왕산의 손자로 태어나 한때는 북조선 내무성 정치부 소좌로 6·25 전쟁 때 인민군으로 참전하였으나 이후 북한 정권에서 밀려난 후 타쉬겐트 국립대학, 모스크바 군사대학, 문학아카데미에서 40여 년간 교수생활을 하시다가 몇 해 전에 작고하신 허웅배 선생의 망향 2수를 읊으면서 임은허씨들의 망향 설움을 대변해 본다. 나 역시 그분처럼 고향을 그리는 같은 마음이다.

지리산의 사진작가 임소혁 선생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그분의 풋풋한 사진으로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이 많이 윤색되었을 것이다.

금오산
 금오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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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1

금오산은 아버님
어린 꿈 키우신 곳

산 타고 발돋움,
구름 타고 하늘 날던

한 평생
가슴에 키운
청운의 꿈나무

2

왕산 손자 허웅배 선생
 왕산 손자 허웅배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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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셔도 금오산
돌아가 안기고픈

포근한 금잔디에
영원히 묻히고픈

얄팍한
가슴에 지닌
임종의 꿈나무

마음의 고향

할배 고향, 엄마 고향
내 고향, 딸의 고향

유랑의 세월 속에
열 개도 넘는 고향

마음의 고향은 하나
금오산록 임은 땅
  
[마지막 회입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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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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