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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2월 22일로 창간 15주년을 맞이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마이뉴스가 헤쳐온 길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사다난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오마이뉴스 15년의 역사를 100대 기사와 사건으로 풀어 5회에 걸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1] 미국 AP통신의 '노근리 민간인 학살' 보도(1999. 9. 30)

오연호 대표가 오마이뉴스 창간의 아이디어를 실행하기로 결심한 것은 1999년 가을 무렵으로 미국 AP 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 때문이었다.

오 대표는 월간 <말> 기자 시절 노근리 사건을 심층 취재해 1994년 7월호의 커버스토리로 보도했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5년 전 침묵했던 주류 신문과 방송들이 AP통신 보도 후에야 이를 대서특필한 것이다. 1994년과 1999년 노근리 사건이 죽고 사는 과정을 직접 겪어본 그는 8(보수): 2(진보)의 언론 지형을 5:5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달 후 그는 사표를 던진다.

 2000년 2월 12일 자정 무렵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창간호 준비를 위해 직원들과 회의하고 있다.
 2000년 2월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가 창간호 준비를 위해 직원들과 회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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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창사 멤버가 된 3명의 '사회 초년생'(1999. 12. 21)

오 대표는 밀레니엄 첫해 창간을 목표로 사람들을 모았다. '채용 1호' 기자는 이병한(당시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현 사회부 법조팀장)이었다. 역시 대학교 졸업반이던 공희정과 월간 <말>에서 1년간 사진기자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종호(오마이TV 방송팀장)까지 3명이 결합했다.

창간 준비 1호를 만들 당시의 인원은 대표 겸 편집국장과 사회 초년생 3명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막연한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병한 기자는 오마이뉴스 입사를 결심한 배경에 대해 "무엇보다 나는 잃을 것이 없었다, 오 대표는 '10년 넘는 기자생활'을 베팅했지만, 나는 아직 한 학기를 남겨놓은 대학생이었다"라며 "성공하든 실패하든 길어야 1년 안에 결판이 난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3] '광화문 시대'를 열다(2000. 2. 8)

오마이뉴스의 창간준비호들은 창간주주인 심성보씨의 돌베개 I&C 사무실(서울 홍익대 앞)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오 대표의 초기 구상은 사무실 없이 온라인 공간에만 존재하는 완벽한 인터넷매체였다. 뉴스게릴라들이 오전에 시청이나 광화문 지하철역에 모였다가 취재 현장으로 산개한 뒤 전국의 PC방에서 기사를 쓰는 모델이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야전사령부'는 있어야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문제 제기에 부딪혔다. 이왕 사무실을 낼 바에야 취재하기 편하고 주요 언론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에 광화문에 20여 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했다. 1년 뒤 옮긴 두 번째 사무실도 광화문 인근의 대우빌딩이었다.

오마이뉴스의 '광화문 시대'는 2007년 말까지 계속됐다.

 2000년 2월 22일 오마이뉴스 창간일의 메인 화면
 2000년 2월 22일 오마이뉴스 창간일의 메인 화면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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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후 2시22분 오마이뉴스 창간(2000. 2. 22)

첫 기사는 오연호 대표가 쓴 창간사 '뉴스게릴라 727명의 대반란'이었다. '모든 시민은 기자다', '열린 진보' 등 오마이뉴스가 지향하는 가치들이 집약된 기사였다.

창간호 사진은 시민기자 강병록씨가 2월 21일 경상남도 창녕의 '정월대보름 화왕산 억새태우기' 현장을 찍은 것이었다.

오 대표는 4년 뒤 <아사히신문>과 한 인터뷰(2004.1.28)에서도 "그동안 오마이뉴스 기사중 최대 특종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창간일에 내놓은 창간사가 최대 특종"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했다.

[5]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원장 열린인터뷰(2000. 3. 3)

창간 첫해에 실시된 16대 국회의원 총선은 오마이뉴스에게 행운이었다. 정치권 스스로 걸러내지 못하는 부적격 정치인들에 대한 낙천·낙선운동이라는 큰 이슈가 있었고, 각 정당들도 자신들의 입장을 실시간으로 전해주는 인터넷 미디어의 등장을 환영했다. 주요 정당 선대위원장들을 연쇄 초청한 열린인터뷰, 그 중에서도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원장 인터뷰는 회사 직원들에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김미선 편집부장은 말한다.

"회사가 처음 입주한 동원빌딩에는 밤 10시 전까지 이용자들이 퇴거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때문에 창간 초기 밤늦게까지 올라오는 기사들을 편집 배치해야 하는 기자들과 건물 경비원 사이에 신경전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97년 대선에서 3위 득표를 한 유명 정치인 이인제 의원 인터뷰 뒤에 경비원들이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TV에 자주 나오는 정치인이 '듣보잡 언론사'를 직접 찾아왔다는 점이 많이 작용한 듯하다."

[6] '광주 5.18 룸살롱 술판'(2000. 5. 25)

5월 25일 오전 11시35분 출고된 '5.18기념식 참여 민주당 386의원들 광주 룸살롱에서 술판'은 오마이뉴스 홈페이지를 방문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오마이뉴스의 존재를 알린 첫 기사라고 할 수 있다.

당일 저녁 방송 뉴스부터 이튿날 아침 대부분의 신문들에서 오마이뉴스를 인용한 기사들이 쏟아졌다. 급기야 6월2일 집권 민주당 서영훈 대표가 고급음식점 이용 삼가 등 4개 항의 도덕성 실천 운동을 선언할 정도로 파장이 계속됐다.

오 대표는 창간 100일 기념 심포지엄(5.31)에서 "관련 정치인들이 오마이뉴스가 첫 보도를 내보내기 전에 국민의 눈과 누리꾼들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기존 언론의 입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초기 대응을 하고 있었다"며 "이런 언론관이야말로 기성 정치문화에 물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여겼기에 확인을 거쳐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보도 경위를 설명했다.

[7] 특별기획 : 매향리는 지금(2000. 6. 6)

 2000년 7월 1일 매향리를 찾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2000년 7월 1일 매향리를 찾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 오마이뉴스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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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경기도 화성 매향리에 마련된 쿠니 미군 사격장. 주민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소음 피해에 시달려 왔다. 2000년 5월 8일 A-10 근접지원기의 오폭으로 주민 6명이 부상 당하는 이른바 '매향리 오폭 사건'이 발생한 후 마을의 비극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는 6월 23일부터 당시 시민기자였던 최경준을 33박 34일 동안 상주시켜 현장 주민들의 투쟁을 생중계했다(http://omn.kr/bl0j). 노순택 사진기자는 7월 9일 미 공군 폭격훈련장인 농섬에 들어가 군사시설물을 촬영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이듬해 10월 22일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매향리 사격장 폐쇄 여론이 들끓자 국방부는 2000년 8월 18일 사격훈련 전면 중단 방침을 발표했다. 이후 서울지법은 2005년 1월 13일 국가가 매향리 주민 1863명에게 81억 5천여 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8] 특별기획: 삼성 3세, 이재용은 왜 출발선이 다른가(2000. 6. 7) 

삼성 이재용의 후계자 등극을 위한 그룹 차원의 은밀한 작업은 1995년부터 시작됐지만, 그 뿌리를 들여다보고 들춰내는 데는 방대한 작업이 필요했다. 천문학적인 재산 상속의 문제점을 파헤친 시리즈(http://omn.kr/bl07)가 나간 뒤 삼성이 사내에서 오마이뉴스를 접속이 불가능한 '블랙리스트 사이트'로 관리하고 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시리즈의 주 집필자였던 이병한 기자는 "'이재용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결말 지어질 지를 지켜보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읽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될 것"이라고 암시했다. 그의 불길한 직감대로 '배임' 삼성 임원들에 대한 법원 판결은 2005년 10월 4일까지 정기 인사나 '경제에 미칠 영향' 등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졌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드러난 비자금 특검에서도 이건희 삼성 회장은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대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2009.5.29).

[9] 닷컴 아빠는 지금 왕따중, 주말엔 컴퓨터를 끕시다! 캠페인(2000. 7. 1)

오마이뉴스 창간 첫해 근무자들의 일평균 노동시간은 약 12시간. 1990년대 말 불어닥친 닷컴 열풍 속에서 기자와 프로그래머, 웹디자이너 모두가 말 그대로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대표 스스로가 가족들과의 소원한 관계를 느꼈다. 그래서 7월1일부터 시작한 것이 '닷컴 아빠는 지금 왕따중, 주말엔 컴퓨터를 끕시다!'(http://omn.kr/beuu) 캠페인이었다.

이 같은 캠페인은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주말에는 취재와 편집기자들이 당직 근무를 하고 나머지 기자들은 쉬는 시스템의 토대가 마련됐다. 물론, 당직 근무자에게는 주중에 하루를 쉴 수 있는 대체휴무권이 주어졌다. 국회에서 주5일 근무제를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의 일이었다(2003.8.29).

[10] 성매매집결지 화재의 이면 들춰낸 기자 근성(2000. 9. 22) 

2000년 9월 19일 전북 군산시 대명동의 속칭 '쉬파리 골목'에 위치한 성매매 업소에서 일어난 화재로 성매매 여성 5명이 질식사했다. 경찰은 '화재예방시설 미비'에 사건의 초점을 맞췄지만, 시민기자 최경준이 3일 뒤 희생자의 일기장을 찾아내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http://omn.kr/bl09). 그러나 지역 경찰은 "성매매는 필요악"이라는 식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로부터 2년 도 채 안 된 2002년 1월 29일, 이번에는 군산시 인근 개복동 윤락가 화재로 여성 14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제주에서 정치권 취재를 하던 최 기자는 "2년 전과 엇비슷한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군산으로 날아갔는데, 사고 다음날 성매매 여성들을 가두는 데 쓰인 특수 잠금장치를 찾아내 전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http://omn.kr/blkd). 오마이뉴스의 연속 보도는 성매매 단속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일으켰고, 이는 2004년 9월 23일 성매매특별법 발효라는 결실을 맺었다.

[11] YS 고대앞 14시간 '농성' 1-25신(2000. 10. 13)

 2000년 10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첫 강연을 하기 위해 고려대를 방문했다가 학생들의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학생들은 교문을 닫고 '나라살림 거덜내고 통일염원 재뿌리는 김영삼은 입닥쳐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김 전 대통령은 고대앞 도로에 세운 차안에서 사복경찰에 둘러싸인 채 14시간동안 농성을 벌이다 다음날인 14일 새벽 1시 7분 상도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2000년 10월 1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첫 강연을 하기 위해 고려대를 방문했다가 학생들의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학생들은 교문을 닫고 '나라살림 거덜내고 통일염원 재뿌리는 김영삼은 입닥쳐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김 전 대통령은 고대앞 도로에 세운 차안에서 사복경찰에 둘러싸인 채 14시간동안 농성을 벌이다 다음날인 14일 새벽 1시 7분 상도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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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9일 공희정 기자는 사내 게시판에 다음과 같은 정보보고를 올렸다.

"YS가 퇴임 후 첫 강연을 13일 오후 고려대학교에서 갖는답니다. 무지하게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될 것이 예상."

상근기자가 10여 명에 불과했던 오마이뉴스는 당일 오전 8시부터 고대 앞 상황 중계에 인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이날 학생들의 저지 시위와 김영삼 전 대통령 특유의 고집이 부딪히면서 공희정 기자 말 그대로 '무지하게 재미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30분마다 현장 기자의 휴대폰 중계로 만들어진 블랙코미디는 고려대 재단 이사장이었던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찬조출연'으로 완성도를 더했다(http://omn.kr/bepn).

고대 앞 농성 생중계는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사건을 정리해 보도하는 언론계의 관행을 깬 사건이었다. 시시각각 전개되는 현장 상황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해 속보에 충실했다. 또 종이매체와 달리 기사 길이의 제한이 없었고, 신마다 기사 형식이 다르고 사진과 동영상이 결합됐다. 게다가 독자들이 궁금한 점을 댓글로 물어보면 현장기자가 확인 취재하는 인터랙티브한 구성 등은 지금까지도 언론계에 회자된다. 이후 거의 모든 언론 매체들이 실시간 현장'을 보도하는 기준으로 '오마이뉴스 모델'을 채택하게 된다.

[12]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 취중 발언 파문(2000. 11. 2)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서로 포옹할 일이 있었는데 안아보니 가슴이 탱탱하더라", "토론할 때 졸릴 때마다 방청객으로 나온 여공들의 짧은 스커트 속 팬티를 보면서 잠을 깼다"

오마이뉴스의 취중 발언 보도 이후 이정빈 외통부 장관은 공개석상에서 "부덕의 소치"라고 사과했다. 장관의 술자리 안주거리가 된 올브라이트 국방장관은 훗날 그를 만날 기회가 있어도 포옹 대신 악수만 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http://omn.kr/bepp).

오마이뉴스는 "공직자의 사석 발언은 어느 선까지 독자들에게 알려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언론계에 던졌다. 당시 주류 사회와 언론인들은 "기자와는 술도 마시면 안 된다", "오마이뉴스를 조심해야 한다"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냈다.

심지어 <한겨레> 편집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고 한다. 한겨레는 인용 보도조차 하지 않았는데, "사석에서 한 그 정도의 발언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훗날 편집국장을 지낸 권태선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대표는 10년 뒤 쓴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연희 의원, 우근민 제주 지사, 이명박 대통령 그리고 최근의 강용석 한나라당 의원과 고창 군수에 이르기까지. 남녀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에서 성희롱을 금지한 지가 1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데는 음주문화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러나 꼭 술 탓만은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남성중심 사회라는 점일 게다."

[13] 올해의 인물과 뉴스게릴라 선정(2000. 12. 21)

오마이뉴스는 창간 첫 해부터 매년 올해의 인물(http://omn.kr/bl8d)과 올해의 뉴스게릴라(http://omn.kr/bl0m)를 선정했다.

첫 해의 주인공은 매향리 사격장 폐쇄 투쟁을 한 문정현 신부였다. 문 신부는 그 후에도 핵 폐기장 반대와 용산 철거민 참사, 4대강 건설 반대 투쟁에 섰다. 당시 오마이뉴스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뉴스는 땀에 찌들고 때론 피가 튀었다. 그래서 어둡고 무거운 뉴스였다. 하지만 그 뉴스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뉴스였다. 오마이뉴스는 문정현 신부의 인생 자체가 뉴스였음을 잘 알고 있다."

올해의 뉴스게릴라 뉴스 부문에는 파주 미군부대를 향한 지역농민들의 투쟁을 신속하게 소개한 김준회 기자, 사는 이야기 부문에는 이봉렬 기자가 선정됐다.

[14] 창간 1주년 기념 특별인터뷰 : 김대중 대통령(2001. 2. 19)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마이뉴스가 태어난 해에는 정중히 인터뷰를 고사했지만, 창간 1주년이 되는 해에는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2000년 2월 19일의 인터뷰로, 그는 인터넷 미디어와 처음 인터뷰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http://omn.kr/bepu).

퇴임 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오마이뉴스와 네 차례 인터뷰를 했다. 특히 17대 대선을 불과 한 달 앞둔 2007년 11월 13일 인터뷰에서는 '국내정치 불개입'이라는 지론을 깨고 "지금은 (구여권이) 당대당 통합보다는 후보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훈수를 두기도 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인터뷰도 오마이뉴스와 했다(2009.6.27).

[15] 인천공항 출입기자실 사건(2001. 3. 28)

 지난 2001년 3월 29일 인천공항 기자실을 방문한 <오마이뉴스> 최경준 기자에게 공보실 직원이 "등록된 기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며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 2001년 3월 29일 인천공항 기자실을 방문한 <오마이뉴스> 최경준 기자에게 공보실 직원이 "등록된 기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며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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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모토에는 사실 매우 공격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류언론, 제도권 언론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비주류의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를 '희한한 후배' 정도로 여기던 주류 언론들도 어느덧 경쟁자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갈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인천공항 기자실 사건이었다. 시민기자 최경준이 인천공항공사 이필원 부사장의 브리핑을 취재하던 중 등록된 출입기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자단 간사에 의해 기자실에서 쫓겨났다는 보도(http://omn.kr/bev9)에 독자들은 공분했다.

오마이뉴스는 이 사건에 대해 "출입기자 기자실을 새 소식 샘터로!"라는 입장문을 발표하고 출입기자실 개방 캠페인을 전개했다.

7월 24일 인천지법 민사3부 권순일 판사(현 대법관)는 출입 금지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오마이뉴스의 가처분 신청에 대해 "인천공항공사와 출입기자단 간사는 기자실 출입을 방해하거나 취재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오마이뉴스는 이듬해에도 화투짝이 굴러다니는 지자체 기자실을 취재하는 등 폐쇄적인 기자사회를 감시하는 작업을 늦추지 않았다.

[16] '김일성 보천보전투 순금 호외' 김정일에 선물한 동아일보(2001. 8. 23)

 동아일보사가 평양을 방문할 때 순금으로 제작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출했던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동아일보사가 평양을 방문할 때 순금으로 제작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제출했던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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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15일 평양에서 열린 민족통일대축전은 분단 후 최초의 남북공동 광복절 행사였다. 하지만,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정신' 방명록이 문제가 되어 민주당과 자민련의 연정이 깨지는 등 파장을 낳았다.

이때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취재차 방문한 노순택 기자의 눈에 1998년 동아일보 대표단이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준 선물이 띄었다.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를 보도한 1937년 6월 5일자 호외를 새긴 순금판이었다.

오마이뉴스가 이를 보도(http://omn.kr/blf8)하자 방북단 일각에서는 "보천보 정신에 대한 순금 신문원판 선물은 문제가 안되고 '만경대 정신' 방명록만 문제삼냐"는 불평이 터져나왔다.

[17] 10원에 팔아넘긴 이문열 책 733권(2001. 11. 3)

2001년은 김대중 정부의 신문사 세무조사(6월 29일)로 인해 정부와 보수신문들의 갈등이 어느 때보다 고조됐다. 중견 소설가 이문열은 7월 2일자 조선일보 기고 <'신문없는 정부' 원하나?>로 '참전'을 선언하며 "요즘 시민운동에서 이따금씩 홍위병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부산시민 화덕헌씨는 누리꾼들과 함께 11월 3일 이씨의 작업실 앞에서 '책 장례식'을 결행했다(http://omn.kr/bl7g). 오마이뉴스는 그해 화씨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작가의 '책 장례식'이 너무 가혹한 퍼포먼스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씨도 한동안 글 발표를 미룰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이문열은 6년 뒤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http://omn.kr/bkb7)에서 "그때 당뇨도 올라가고 혈압도 올라갔다. 나도 모르게 내상을 입은 것"이라며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제왕이 해도 폭거로 이야기된다. 내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악당이었고 잘못했냐"고 항변했다.

[18] 정운현 편집국장 취임(2002. 1. 10)

오마이뉴스는 2대 편집국장으로 친일 문제 전문가인 대한매일 정운현 기자를 영입했다(http://omn.kr/bev0). 정 국장은 이후 4년 3개월 동안 오마이뉴스의 최장수 편집국장으로 재임했다. 특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의 양대 선거를 관통하는 '격동의 시기'에 오마이뉴스의 사령탑을 맡았다. 정 국장의 영입은 경영과 편집의 분리를 의미했다. 이로써 오연호 대표가 편집에서 손을 떼고 경영에만 전념하게 됐다.

[19] 선관위 오마이뉴스 인터뷰 저지 사건(2002. 2. 5)

 대선을 앞둔 2002년 2월 5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오마이뉴스> 편집국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상임고문 초청 열린토론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선관위 직원들이 '<오마이뉴스>는 정기간행물법에 등록된 언론이 아니다"라며 인터뷰를 막았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노무현 후보가 선관위 직원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대선을 앞둔 2002년 2월 5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오마이뉴스> 편집국에서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상임고문 초청 열린토론회가 열릴 예정인 가운데, 선관위 직원들이 '<오마이뉴스>는 정기간행물법에 등록된 언론이 아니다"라며 인터뷰를 막았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 노무현 후보가 선관위 직원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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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선거관리위원회와 '세게' 붙은 사건이었다.

선관위가 오마이뉴스는 정기간행물법에 등록된 언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5일 노무현 민주당 후보부터 시작되는 대선주자 초청 열린인터뷰를 할 수 없다며 당일 직원들을 보내 물리적으로 인터뷰를 막았다(http://omn.kr/bl8j).

정기간행물로 등록된 방송사와 일간지만이 후보자 토론회를 열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신문법에는 오마이뉴스같은 인터넷 언론이나 방송에 대한 정의 자체가 없었다.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생긴 해프닝이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은 "한국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며 "법이 최소한의 상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법의 이름으로 몰상식이 자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언론 주무부처였던 문화관광부는 4일 뒤 "오마이뉴스는 현행 정기간행물법 상의 언론은 아니지만, 사실상 언론의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형태의 언론"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중앙선관위도 "인터넷 언론도 오프라인 언론사처럼 후보 초청 대담·토론회를 할 수 있도록 국회가 관련법을 빨리 개정해 달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결국 오마이뉴스는 2월 19일 오후 문광부에 오프라인 시사종합지 '주간 오마이뉴스'를 등록하는 형태로 열린인터뷰를 재개했다. 2004년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국회는 신문법에 인터넷신문에 대한 관련 조항을 신설했다.

[20] 창간 2주년 기념 특별인터뷰: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2002. 2.21)

2002년 2월을 기준으로 할 때, 현재의 권력은 김대중 대통령이었지만 미래의 권력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였다.

그러나 이 총재는 인터넷 미디어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이 총재뿐만 아니라 그를 보좌하는 그룹들도 그랬다. 인터뷰가 성사된 후에도 사전질문을 미리 입수하려는 한나라당과 '날 것 그대로의 이회창'을 원하는 오마이뉴스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인터뷰가 1997년 국세청 대선자금 모금 사건이 집중되자 배석한 특보들이 "이제 그 이슈는 그만 좀 하자"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http://omn.kr/beq3).

오히려 이 총재가 "오마이뉴스는 이래야 하는 것 아니야?", "우리 당은 인터넷매체가 당당히 언론으로서 위상을 확립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여유를 보였다.

(* 2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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