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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호 사고 유족들이 사조산업 앞에서 노숙 농성 중이다.
 오룡호 사고 유족들이 사조산업 앞에서 노숙 농성 중이다.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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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오후 2시, 서울 서대문구 사조산업 본사 앞. 이날 이곳에서는 오룡호 사망 실종자 수색 촉구 행진 및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사조산업 앞에는 유가족 네 명이 콘크리트 바닥에 스티로폼과 이불을 깔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집회가 예고됐음에도 기자 한 명, 경찰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사람 키 높이로 걸린 현수막과 피켓들도 지나가는 시민들의 시선을 채 3초도 끌지 못했다. 한 쪽에 자리한 스피커만이 '분향소를 설치하라! 사조회장 처벌하라!'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고가 난 지) 며칠이나 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유가족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64일"이라고 대답했다. 유가족은 "사람이 없어 집회를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거리 행진을 하기 위해선 적어도 행진에 서너 명, 짐을 지키는 데 한두 명이 필요하지만 그만한 인원이 없다는 것이다. 오룡호 침몰사고로 실종 및 사망한 선원 11명 중 다섯 유가족이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이곳을 떠났다. 현재 사조산업 앞을 지키는 유가족은 단 여섯 가족이다.

위로해 줄 분향소만이라도... 64일째 이어진 싸움

지난해 12월 1일 오후 2시경 러시아 베링 해에서 사조산업의 원양어선 '501오룡호'가 좌초돼 침몰했다. 침몰 당시 오룡호에는 한국인 11명, 인도네시아인 35명, 필리핀인 13명과 러시아 감독관 1명을 포함해 총 60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 중 러시아 감독관 등 외국인 7명이 구조됐고, 27구의 시신이 인양됐으며 26명은 아직 실종 상태다. 한국인 11명 중 6구의 시신만 발견됐고 5명은 실종됐다.

그러나 지난 1월 6일 외교부는 기상 상황 악화, 해당 해역에서의 조업허가 만료를 이유로 2014년 12월 31일 일몰을 기해 수색 활동을 중단했다고 전했다. 수사에서 발견된 정황은 세월호 사건과 다르지 않았다. 무리한 조업, 노후된 선박, 자격 미달 항해사 탑승, 늦은 퇴선 명령 등으로 분노한 유족들은 1월 5일 급기야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후 사조산업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던 유족들은 지난 1월 30일 그마저도 통보 없이 거리로 내쫓겼다고 했다. 62세의 한 유가족은 그 날을 회상하며 언성을 높였다.

"쫓아내면 쫓아낸다고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옷도 안 챙겨 입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추위에(내쫓겼다). 이 이불도 저 쓰레기통에서 그날 찾아와서 덮었어. 짐만 갖고 나온다고 해도 문을 안 열어줘. 경찰이 와서 보다 못해 얇은 걸칠 거 하나라도 주라고 하니까 그 때 (겉옷을) 주더라고."

농성장에는 여러 피켓과 생필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유족들은 스티로폼과 이불로 추위를 견디고 있다.
 농성장에는 여러 피켓과 생필품들이 놓여져 있었다. 유족들은 스티로폼과 이불로 추위를 견디고 있다.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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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온 가족들은 모두 일을 쉬거나 관둔 채 올라와야 했다. 집회를 위해 퇴사한 유가족부터 휴가를 내고 올라온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회사에서 편의를 봐줘 휴가를 쓸 수 있었던 유가족도 "편의도 한두 달이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농성이 더 길어지면 회사를 관둘 것이라고 했다. '언제 끝이 날지 몰라 답답하다'는 반응은 어느 유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추위와 숙식도 노숙 농성을 힘들게 하는 악조건이었다. 유족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이불을 덮고 핫팩으로 손을 녹이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한 편에는 일회용 수저와 쇠젓가락들이 꽂혀 있는 수저통과 버너, 냄비 등이 보였다. "방금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유족은 그 자리에서 밥을 종종 먹는다고 했다. 모든 생필품은 유족들 자비로 마련했다. 잠 역시 차 안, 인근 찜질방에서 쪽잠으로 해결한다고 말했다. 현장에는 62세, 61세의 유족들도 예외 없이 노숙 농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족들이 입을 모아 원하는 건 '편한 잠자리와 따뜻한 밥'이 아닌 '분향소'였다. 그들은 유가족과 친지들이 고인을 위로할 수 있게 사조산업 측에서 분향소를 만들어주길 원했다. 지난 1월 18일에는 유족들 각자가 집 가까운 곳에서 49제를 지냈다고 한다.

"사람 목숨을 그냥 돈벌이로만 생각하잖아. 그래도 회사를 위해 일하다 죽은 사람들인데, 선박 구하려고 하기 전에 선원들만 다른 배에 태웠어도 구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억울해...죽을 수야 있지. 태어나면 다 죽긴 하지만 억울하게 죽었잖아... 53명이나 죽었는데 이게 참사가 아닙니까? 분향소 차리는 게 '요구 조건'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맞는 상황이냐고... 기자 양반, 이게 맞는 거요? 진정성만 보였어도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겠냐고."

사조산업 측 법무 담당자는 "6가구를 제외하면 외국인 선원 유족을 포함한 나머지 유족들과 합의가 끝난 상황인데 남은 유족들은 53명 전체에 대한 분향소를 설치해 달라는 입장"이라며 "이미 과반수 이상이 마무리가 됐는데 전체에 대해 다시 이슈화시키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2월 2일 오룡호 사고 유족들의 노숙 농성장 모습.
 2월 2일 오룡호 사고 유족들의 노숙 농성장 모습.
ⓒ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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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도 무관심... 우린 내동댕이쳐졌다

유족들은 가장 힘든 점으로 '무관심'을 꼽았다. 한 유가족은 "사람들도 식상해하는 듯하다"며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게 제일 힘들죠. 회사로부터, 정부로부터... 이런 사고를 안 당했으면 나도 먹고 살기 바빠서, 쳇바퀴 돌 듯 매일 일하면 이런 일 신경 못 썼겠죠... 문건 파동이니 뭐니 다른 일들이 많이 터진 후로 유명 언론사들은 잘 오지도 않고."

시민들 중에는 "안 됐다" "안타깝다"는 반응을 전하는 이들도 있지만 곱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취재하는 동안 농성장에 경찰이 와 "스피커 소리를 낮춰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경찰은 "맞은 편 병원 환자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왔다"며 이유를 설명하곤 스피커 음량을 쟀다. 측정 결과 기준 미달로 스피커 사용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스피커 소리도 집회 기준 맞춰서 그보다 작게 해 놔요. 그래도 이 사조산업 건물 안에 임대해서 쓰는 다른 사무실이나 근처 회사들에서 업무 못 본다고 민원이 들어와요. 이해 못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 아닌데... 조금 서운하긴 하죠."

유족들 역시 세월호 사건 당시에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룡호 사고를 접한 후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한 유족은 "세월호든 오룡호든 특정 여객선과 원양어선의 문제가 아니다"며 "큰 사고가 연이어 난 이후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를 비롯해 남은 여섯 가족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 위해 끝까지 해보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오룡호 사건 아냐고 물어보면 (시민들 중에) 1%나 안다고 할까? 다들 잘 몰라요. 집회 할 때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초창기에는 우리 얘기 듣고 울었던 분들도 요새는 '어, 그거 아직 안 끝났습니까?' 하시면 참... 나도 세월호 사건 때는 그냥 언론만 보고 처음엔 안쓰러웠다가 좀 길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겪어 보니 생각이 완전 달라졌지. 나도 참 잘못 살았지. 아픈 사람을 이해 못하고..."

덧붙이는 글 | 이유진 기자는 21기 오마이뉴스 인턴 기자입니다.



태그:#오룡호, #오룡호 사고, #오룡호 노숙 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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