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을 말한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 타인들과 고통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동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공감능력에 대해 인간만이 아니라, 침팬지, 보노보 등 모든 영장류가 지닌 원초적 본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집단생활을 하는 유인원들은 여러 모로 동료들을 배려하는 행위를 한다. 예컨대 동료가 다쳤을 때, 상처 주위의 흙을 털거나 핥아주고, 빨리 걷지 못할 경우 집단 전체가 행진 속도를 늦추기도 한다. 공감의 행위가 같은 종의 영역을 초월하는 경우도 많다.

프란스 드 발의 <내 안의 유인원> 표지
 프란스 드 발의 <내 안의 유인원> 표지
ⓒ 김영사

관련사진보기

드 발은 <내 안의 유인원>에서, 새를 보살피는 보노보 이야기를 들려준다. 침팬지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진 새를 발견한다. 그는 손바닥 위에서 가볍게 날려 보지만, 새는 퍼득거리기만 할 뿐 날지 못한다. 보노보는 새를 데리고 나무 높이 올라간 후, 손으로 조심스레 날개를 펴고 공중으로 날린다. 하지만 날지 못하고 곧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새 있는 곳으로 가서 다른 동물들이 새를 해치지 못하게 지키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새는 기운을 회복하고 날아갔다.

드 발은 도덕이 사람의 창조물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덕의 기본은 공감과 배려인데, 이것은 집단생활을 하는 모든 동물 사이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공감과 배려는 자신과 타인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자연적 합의다. 드 발은 동물실험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입증하는데, 최근저서인 <공감의 시대>와 <보노보와 무신론자>에는 흥미로운 사례가 가득하다.

그중 하나는 침팬지가 '부당한 대우'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것이다. 침팬지 한 마리에게 과제를 주고, 잘 했을 경우 상으로 오이를 주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하고, 기쁘게 오이를 받아 먹었다. 이번에는 다른 침팬지를 옆에 데려와서 같은 일을 시켰다. 하지만 그에게는 오이 대신 포도를 주었다. 그것을 본 첫 침팬지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는 오이를 집어 던지고 괴성을 질렀다. 열심히 하던 일도 중단하고 '파업'으로 맞선 것은 물론, 분노에 차서 실험기구를 마구 흔들기도 했다. 드 발은 이 저항이 "99퍼센트를 위한 사회"를 외친 월스트리스 점령시위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자연과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본능인 셈이다.

우리사회에 공감능력이 있는가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침팬지의 '연대'였다. 이번에는 침팬지에게 두 가지 색의 단추를 준다. 그는 이것을 '돈'처럼 쓸 수 있는데, 단추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먹이를 받는 것이다.

어느 색 단추를 내든 본인은 같은 음식을 받는다. 하지만 색깔에 따라 옆 우리의 동료가 먹이를 받거나 받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파란 색을 내면 자기만 음식을 받고, 빨간 색을 주면 자기와 동료 모두가 음식을 받는 것이다. 침팬지는 예외없이 빨간 색을 더 많이 내밀었다.

침팬지의 교훈은 인간사회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까? 먼저 이기심이 '자연적 본능'이라는 믿음의 허구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제 이기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동물을 끌어들이고자 했으나, 그들로부터 면박을 당한 꼴이다.

보노보
 보노보
ⓒ 위키커먼스

관련사진보기


두번째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자신에 대한 배려라는 사실이다. 빨간 단추 덕에 포식을 한 옆 방의 침팬지는 유사한 상황에서 친구를 배려하는 선택을 할 것이다. 하지만 유인원들이 이런 점을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동료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혼자 먹기보다 같이 먹을 때 밥맛이 훨씬 좋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침팬지의 '연대'는 우리사회에 대해 어떤 점을 말해주고 있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공감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이코패스' 사회라는 사실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자식과 형제를 잃고 비통해 하는 세월호 유족들을 불온시하고 조롱까지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족들이 사건의 원인규명과 재발방지를 요구한 것은 명백한 이타심의 발현이었다. 다른 사람만큼은 그런 비극의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타인과 이사회를 돕기 위해 고통스러운 금식을 택했다.

이러한 노력의 수혜자가 될 사회 구성원들은 어떻게 행동했어야 옳을까? 같이 고통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폭식투쟁' 같은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말이다. 유족의 노력을 좌절시키는 것이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는 행위라는 사실은 유인원들도 알만한 일이다.

물론 유족들을 야유한 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국민들 다수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를 '사이코패스' 사회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정부의 어처구니 없는 대처실패가 드러나고, 대통령이 유족들을 회피와 무시로 일관하고, 유력 정치인들이 피해자들을 '불온세력'으로 몰았어도 여당은 별 문제 없이 선거에 승리했다. 국민들이 '세월호 사건 뭉개기'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2014년 9월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에 나타난 한 남성이 핫도그를 먹으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단식농성장에 나타나 핫도그 먹는 남성 일베 회원등이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단식농성장 앞에서 '도시락 나들이' 등 먹거리 집회를 예고한 2014년 9월 6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단식농성장에 나타난 한 남성이 핫도그를 먹으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정부-'기레기'와의 연대를 거부하기

가장 기가 막혔던 것은, 세월호 사건 당시 '기레기'라는 상서롭지 못한 별명을 얻은 무리가 사건의 책임자인 정부와 연합하는 장면이었다. 사건 후 몇 달이 지나도록 국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유족과 실종자 가족들은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정부와 언론은 '경제'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라앉아 있고, 그 안에는 10명의 실종자가 갇혀 있었으며, 가족들은 울부짖으며 해안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제 잊고 경기회복에 매진할 것'을 주문했다. 사건 후 '100일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0"이라는 숫자에 무슨 마법이라도 담겨 있어, 이 시간 후에는 모든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기라도 한다는 투였다.

<조선일보>는 "'세월호' 딛고 부강한 나라로-침체된 내수 살리자"는 특집 기사를 내어 기업규제를 대폭 풀 것을 주문했다. 규제로 인해 "생수공장서 탄산수 못 만들고, 유럽식 '절벽위 호텔' 꿈 도 못 꾼다"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세월호에 갇힌 경제"를 한탄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지금이 한국경제 다시 세울 마지막 골든타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질 세라, 종편방송 채널 A는 "아침경제 골든타임"이라는 상설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조선> 세월호 딛고 부강한 나라로 기획.
 <조선> 세월호 딛고 부강한 나라로 기획.
ⓒ 조선PDF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이들에게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골든타임"이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했다. 충분히 구할 수 있던 국민을 무능, 무책임, 오보로 살해한 후에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그 표현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보면, 이들로부터 공감능력을 찾기 어려운 것은 당연해 보인다. 경제만능주의는 일종의 페티시즘으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를 사람 앞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전이된 욕망'은 의당 지향해야 할 사람을 향하는 대신, 옷, 신발, '절벽 위 호텔' 등 엉뚱한 대체물을 찾는다.

'경제 페티시즘'에 빠진 권력이 '정신적 지주'로 신봉할 만한 사람은 아담 스미스일 것이다. 하지만 정차 그조차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공감능력'을 말했다. 그는 <도덕감정론>에 이렇게 썼다.

"인간을 아무리 이기적 존재로 보더라도,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원리가 있어,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그의 행복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요소로 삼게 된다. 비록 그 사람의 행복을 지켜보는 기쁨 이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더라도."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경쟁자'라 주입 받아온 탓에 다른 사람의 기쁨을 지켜볼 여유가 없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금 이토록 불행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태그:#세월호, #공감, #사이코패스
댓글4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