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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더덕꽃
 더덕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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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감옥

허형식은 '5·1절' 시위사건으로 동료 32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는 자기가 시위에 주모자로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 가담자라고 진술하여 허형식 외 8명을 제외한 나머지 동지들은 모두 풀려났다. 중국 경찰이 신문했다.

"너는 왜 공산당원이 되었느냐?"
"나는 조국을 빼앗긴 망국인입니다. 철천지원수 일본과 싸우고자 공산당원이 된 것입니다."

허형식은 비굴함이 없이 당당하게 맞섰다. 허형식은 이 시위사건으로 8개월간 심양(봉천, 현 선양)감옥에서 복역하고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오자 가족들은 몹시 신변을 걱정했으나 듣지 않고 농민들의 권익보호 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중국공산당 북만위원회 빈현 특별지부 최용건 서기와 긴밀한 연대로 당원 포섭과 당 조직 확장에 헌신했다.

1930년 후반, 허형식은 반제 반봉건운동 등 대중봉기를 주도하다가 중국공안당국에 공산분자라는 혐의로 검거되어 또 다시 심양감옥에 투옥되었다. 허형식이 수감되고 얼마 후중국 공산당 영안현 임시위원회 주석을 맡았던 김책(金策)도 수감되었다.

 선양(심양) 역
 선양(심양) 역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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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

 김책
 김책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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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은 1903년 함경북도 학성(현재의 김책시) 출신으로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 연길현으로 이주하여 용정의 동흥중학교를 다녔다. 중학시절부터 민족의식에 눈떠 반일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약하다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그해 10월에 체포되어 1929년까지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생활을 하였다. 그는 끝내 전향치 않고 출옥 후에 다시 북만으로 가서 공산당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반제 투쟁성을 인정받아 1930년 10월, 영안현 소비에트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31년 재차 체포되어 심양(봉천)감옥에 투옥되었다.

김책은 감옥 안에서 수형자 가운데 주먹이 가장 세고 키도 크고 당당하며 투쟁심이 좋은 허형식에 매료되어 먼저 인사를 당겼다. 김책은 허형식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허 동지, 나 김책입니다. 함경도 산골 출신입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저는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출신의 허형식입니다. 이명은 '이희산(李熙山)' '이삼룡(李三龍)'이지요."
"아, 그 이름도 유명한 이희산, 이삼룡 동지를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저도 말로만 들었던 김책 주석님을 여기서 뵙다니 영광입니다."

그들은 감옥 안에서 깊이 끌어안고 십년지기를 만난 것처럼 깊이 포옹했다. 이후 그들 두 사람은 평생 동지가 되었다.    

 선양(심양) 거리
 선양(심양) 거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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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가족을 부탁하다

"허 동지, 우리가 이 악명 높은 봉천감옥에서 이렇게 만난 건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앞으로 김책 주석님을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나도 부탁하고픈 말이 있소. 우리 혁명동지들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오. 그때 남은 가족들을 서로 보살펴 주기로 약속합시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고견입니다. 며칠 전에 면회를 온 어머니를 통해 제 아내가 딸을 해산했다고 하는데 이름을 '하주(河珠)'라고 지었답니다. 잘 부탁합니다."
"난 아들이 둘이요, 큰놈은 '정태'요, 둘째는 '국태'입니다."
"잘 기억하겠습니다."
"허 동지는 아직 젊으니까 아이를 더 낳거든 그때 마다 꼭 알려주시오."

그들은 혈맹의 약속으로 다시 깊이 포옹하였다.

조상지

 조상지
 조상지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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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심양감옥에서 또 한 사람의 평생 동지를 만났다. 그는 중국인으로 조상지(趙尙志)였다. 조상지는 마부에서 참모장, 군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1908년 요녕성 조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한 뒤 한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며 하얼빈공업학교를 다녔다.

조상지는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처음에는 말단 평당원으로 같은 고향 출신인 손조양 사령관의 마부였다. 손조양 의병부대 '조양대(朝陽隊)'는 하얼빈 동쪽 빈현과 주하지방에 본거지를 둔 가장 규모가 큰 의용부대였다.

조상지가 마부 생활하던 어느 하루, 빈현의 일본군이 손조양 의용군을 습격해 왔다. 손조양은 일천 명이 되는 일본 정규부대의 습격에 포위당했다. 그때 마부 조상지는 대장 손조양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사령님, 제가 계책을 하나 말씀드릴까요?"

조양대 손조양 부하 참모들이 보니 마부 조상지였다.

"야, 네깐 놈 마부 주제에 무슨 계책이냐?"

그들은 '으하하' 크게 비웃으며 조상지를 놀렸다. 하지만 손조양은 조상지에게 계책을 말할 것을 허락하고 귀담아 들었다.

"일찍이 손자병법에 출기불의 공기불비(出其不意 攻其不備, 적이 미처 예상치 못할 때 출격하고, 적이 미처 방비치 못한 곳을 공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일본군에게 삼면으로 포위 되었으니 정면을 과감히 돌파하여 텅 비어 있는 빈현을 쳐들어 가십시오."

마부에서 참모장으로

손조양은 그의 진언에 따라 별동대를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감행했고, 빈현 역공작전은 대성공으로 일본군 본거지를 궤멸시켰다. 손조양은 마부 조상지의 전략에 감탄했다.

"마부의 입에서 어찌 이와 같은 병법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조상지는 이 전투에서 세운 공로로 손조양의 신임을 얻어 마부에서 일약 손조양 부대의 참모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북만 항일전선에서 그의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그가 반제 활동으로 국민당 헌병대에 체포되어 봉천감옥에 수감 중일 때였다.

조상지는 감옥 내 죄수들의 우두머리로 이른바 '깡툴(죄수들의 제왕이란 은어)'로 군림했다. 그때 허형식이 봉천감옥에 들어오자 이 두 사람은 '깡툴' 자리를 두고 날마다 다퉜다. 두 사람 모두 남다른 용맹성을 가진 이들이라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조상지가 허형식보다 한 살 더 많았다. 어느 날 조상지가 허형식에게 제의했다.

"이 봐! 허 쉬따거즈(꺽다리라는 허형식의 별명), 우리 서로 싸울 게 아니라 의형제를 맺어 서로 힘을 합쳐 국민당 놈들과 일본제국주의자를 쳐부수세."

 광야,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군, 관동군, 마적들이 각축을 벌였던 곳이었다(헤이룽장성 벌판, 2000. 8. 촬영).
 광야,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항일독립군, 관동군, 마적들이 각축을 벌였던 곳이었다(헤이룽장성 벌판, 2000.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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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형제를 맺다

허 형식은 그 말에 조상지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조상지는 1908년 생으로 허형식보다 한 살 더 많았다.

"형님, 저는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허형식은 조상지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대단히 투쟁가요, 전략가라는 소문을 그전부터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허형식은 심양(봉천)감옥 생활에서 자기를 평생 이끌어주는 두 동지를 만났다. 한 동지는 조선인 김책이요, 또 다른 한 동지는 중국인 조상지였다. 그들 두 사람과 혈맹관계를 맺은 허형식은 이후 항일전선에서 순풍에 돛을 단 격으로 승승장구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실록소설 '들꽃'은 40회 내외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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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단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