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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할미꽃
 할미꽃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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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안진

나는 하얼빈 도착 이튿날(2000년 8월 18일) 청년 허형식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맹활약했던 가판점(현, 빈현 빈안진)을 먼저 답사키로 했다. 전날 서명훈·김우종 두 선생은 김택현 기사에게 지리와 통역 등에 대하여 자세히 일러주었다. 김 기사는 빈안진은 하얼빈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하여, 오전 8시에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으로 와서 같이 출발했다.

하얼빈에서 빈현까지는 포장도로이기에 경쾌하게 달렸다. 하지만 빈현부터 빈안진까지는 비포장도로였다. 흙길인 데다가 장마 뒤끝으로 노면이 패인 탓인지 흔들림이 몹시 심했다. 도로 중간 중간에는 우마차나 소, 또는 양 떼를 몰고 가는 농부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은 자동차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를 유유자적 걸어갔다. 자동차가 알아서 그들 무리를 피해 갔다. 하긴 애초 도로는 사람이 차보다 우선이다.

 빈안진 가는 길
 빈안진 가는 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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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현 기사는 심심한지 자기 신상 얘기를 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은행원으로 복무(근무)하다가 과감히 퇴직한 후 자동차를 한 대 사서 주로 외국인 방문객들을 상대로 영업한다고 했다. 그는 전업을 한 지 3년 만에 승용차를 두 대 굴리는데 다른 차는 여러 명이 탈 수 있는 승합차라고 했다. 중국에도 개혁개방 바람이 불어 월급쟁이보다 자영업자들이 대체로 수입이 더 좋다고 했다.

나는 빈현에서 빈안진으로 가는 도중에 결혼식 행렬을 보았는데, 마치 우리나라 1960년대 풍습을 보는 듯했다. 신랑신부가 탄 승용차 앞뒤는 온통 풍선과 오색 테이프를 두르고 신랑신부 친구들이 그 뒤따르고 있었다. 하얼빈을 출발한 지 두 시간 남짓 만에 목적지 빈안진에 도착했다.

나의 답사여행 경험으로는 길을 잘 모르거나 그 고장 역사문화재에 대해 알고 싶으면 중국에서는 인민정부를 찾는 게 가장 정확했다. 나는 김 기사에게 인민정부를 찾으라고 했더니, 그는 곧 빈현 빈안진인민정부 마당에 차를 댔다. 김 기사가 그곳 인민정부 서기에게 우리의 방문 목적을 말하자 그는 곧장 빈안진인민정부 진장(鎭長)에 안내했다. 김 기사가 40대 젊은 진장에게 나를 남조선에서 온 작가라고 소개하자 그는 매우 융숭하게 맞아주었다.

 빈현빈안진인민정부 현판 앞에서(왼쪽부터 왕일 진장, 필자, 유덕춘 향토사학자, 빈안진인민정부 서기)
 빈현빈안진인민정부 현판 앞에서(왼쪽부터 왕일 진장, 필자, 유덕춘 향토사학자, 빈안진인민정부 서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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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룽장성 공산당 발상지

'진장(鎭長)'이라면 한국에서는 시골 면장에 해당하는데 자기는 그 고장 출신이 아니고, 나이도 젊어 1930년대 이 고장 일들은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기에게 고장 역사를 잘 아시는 호로(胡老, 나이 드신 중국인)을 모셔 오게 했다. 30여 분이 지나자 70대의 늙수그레한 한 호로가 도착했다.

그는 그 고을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허형식 장군 유적지를 찾아왔다고 하자, 그는 허 장군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고장의 역사를 기록한 빈현지(賓縣志)를 자기가 직접 편집했다고 하면서, 인민정부 서고에 보관된 빈현지를 가져오게 한 뒤 허형식 장군 편을 줄줄 읽었다. 그 모든 것을 김 기사가 천천히 통역했다.

그는 빈안진은 북만주 헤이룽장성의 공산당 발상지나 다름이 없었다고 대단히 자랑하며 숱한 조선인 공산당원 가운데 최용건, 김책, 허형식이 그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쳤다고 말했다. 곧 진장은 인민정부 찬청(饌廳,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날은 나를 접대하기 위한 특별한 상차림이었는지는 몰라도 진수성찬이었다. 진장은 자기 이름을 왕일(王一·48)로, 호로는 유덕춘(劉德春·72)이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식사 도중 세 차례나 건배를 제의하는 바람에 나는 세 번이나 독한 고량주를 입에 대는 곤욕을 치렀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진장이 직접 자기 승용차 핸들을 잡고 옆자리 유덕춘 호로의 안내를 받으며 관내 유적지를 보여주었다. 그들 말로는 한때 빈안진에는 3300여 명의 조선족이 살았지만, 지금은 한 가구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날 조선족들이 몰려 살았던 곳을 안내하는데, 볏짚으로 덮은 초가지붕의 낡은 집 몇 채 볼 수 있었다.

 빈안진 조선족 낡은 초가집
 빈안진 조선족 낡은 초가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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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일대의 호룡산(虎龍山), 빈안교(賓安橋) 등도 항일전투지였다고 말했다. 유적지 답사가 끝나자 왕일 진장은 빈안진 여러 곳을 보여주면서 공장 건설에 아주 적합한 곳이라며, 나에게 투자유치를 권유했다. 아마도 내가 남조선에서 온 대단한 유력자로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쓴 웃음을 지우며 그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오후 2시 40분에 빈안진을 출발했다. 김 기사는 돌아오는 길은 오전과는 달리 아성(阿城)을 경유, 그곳의 명소를 둘러본 뒤 오후 5시 30분에 약속장소인 하얼빈 시내 중앙대가 모던호텔에 도착했다. 그 시간에 맞추어 막 도착한 서명훈·김우종 선생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김우종 선생은 다음날 경성현 허형식 장군 희생지는 멀기에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한다고 하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김 기사를 돌려보냈다.

그런 뒤 우리 세 사람은 중국 고전음악이 은은히 흐르는 찻집 외진 곳에서 허형식 장군의 행적 이야기를 나눴다. 두 분 선생은 그새 관련 서류 복사물을 나에게 건네면서 허 장군의 항일투쟁사를 들려줬다.

일본영사관 습격사건

허형식이 북만에서 항일 명장으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1930년 5월 1일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사건' 또는 하얼빈 '5·1절 반일시위사건' 때문이었다. 중공당 만주성위원회에서는 1930년 5월 1일, 즉 메이데이(May day)를 앞두고 중공당 만주순시원 임중단(林仲丹, 중국인 본명 張浩)을 통하여 붉은 5월 투쟁계획을 세울 것을 당 조직에 하달하였다.

이 과업을 부여받은 이극화(조선인 李克和, 원명 洪南杓)는 아성에 있는 조선족소학교에서 비밀회의를 소집하여 1930년 5월 1일 '5·1절' 시위와 함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항의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허형식은 황산주자 일대의 군중을 동원하고, 취원창 일대의 군중은 박만주 동지가 책임지고 동원키로 했다.

4월 30일 허형식은 황산저자 일대의 청년 수십 명을 데리고 하얼빈에 갔다. 이날 하얼빈에 모인 농민들과 청년당원들은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인근 아성, 해구, 평방, 황산저자 등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막상 5월 1일 오전에 비가 내린 데다가 애초 참여키로 한 하얼빈시 청년학생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지방에서 올라온 일부 청년 및 농민들은 불만을 터뜨린 뒤 100여 명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분산하여 남강로 추림상점 앞에 모여 거기서 10시 정각에 항의 시위키로 하였다. 허형식은 그날 현장에서 시위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허형식은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양환준(梁煥俊)과 상의한 결과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시위한 뒤 곧장 영사관을 습격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1999. 8. 촬영으로 지금은 이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1999. 8. 촬영으로 지금은 이 모습을 볼 수 없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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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침략자를 타도하자"

'5·1절' 시위 참가자들은 추림상점 앞에서 대열을 가다듬은 뒤 붉은 깃발과 '일본 침략자를 타도하자!'라고 쓴 팻말을 추켜들고 "일본 침략자를 타도하자!", "국민당 군벌의 압박을 반대한다!",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자!", "노임을 제고하자", "군벌정부가 노동자 학생 체포를 함부로 체포하는 것을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본영사관을 향해 전진했다.

시위대는 곧장 일본영사관에 이르러 구호를 외치며 일본영사를 불러 항의문을 제출하려고 하였다. 이때 잔뜩 겁을 먹고 3층으로 대피했던 당직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에 더욱 성난 기세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중조 인민들은 단결하여 일제에 대항해야 한다"라고 부르짖으며 미리 준비한 삐라들을 뿌렸다. 그러자 당직 경찰은 총을 쏘며 시위대를 위협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들은 길가에 있는 돌과 벽돌로 영사관 유리창문 86장을 박살냈다. 허형식은 시위대 맨 앞에서 벽돌을 들고 영사관 유리창을 깨뜨리며 영사관으로 진입하여 기물들을 닥치는 대로 까부쉈다. 곧 영사관 측의 긴급지원을 받고 출동한 중국 경찰이 달려와 허형식 등 32명의 시위대를 체포했다.

이 하얼빈 '5·1절 반일대시위사건'은 국내외에 파장이 매우 컸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커다란 심리적 압박을 받았으며, 하얼빈 일대 중국인들에게는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현지 중국 언론은 물론 러시아계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조선일보> 등 국내 일간지에도 1면 톱으로 보도되었다. 허형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공산당 관계자들의 신임과 주목을 한껏 받아 이후 항일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박도 실록소설 ‘들꽃’은 40회 내외로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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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