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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월이 되면 조급해진다. 깔끔하게 끝내지 못한 작년 일들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야 하면서 올해 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또 시작해야만 한다는 마음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두루 살펴보니 조급해한다고 더 괜찮은 한 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올해는 조금 천천히 한 해를 시작해보고자 한다. 느긋하게. 조이스 럽의 <느긋하게 걸어라>를 읽으면서.

우리 집에는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가 꽤 많다. 내 부모님의 오랜 꿈이 바로 '순례자'가 되는 거였다. 천주교 교인이기도 해서이지만, 인생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바람이 두 분에게는 있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두 분은 책을 통해 그 꿈을 대신 이루고 있으셨던 거다.

몇 년 전부터 엄마 쪽에서 먼저 이 꿈을 내려놓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꿈을 꾸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가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며 엄마는 안타까워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순례자의 길을 걷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일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기만 할까. 조이스 럽도 그녀 나이 예순일 때 순례자의 길에 올랐다.

<느긋하게 걸어라>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녀인 조이스 럽이 그녀의 20년 지기 친구인 반쯤 은퇴한 (그러나 여전히 바쁜) 목사 톰 페퍼와 함께 '카미노 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Camino de Santiago de Compostela)를 36일간 걸은 여정을 담고 있는 순례기이다. 우리에게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잘 알려진 이 길은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 시의 성 야고보 성당에 이르는 순례자의 길을 일컫는다.

순례길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담과 깨달음, 통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느긋하게 사는 삶'에 대해 정말이지 느긋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길을 걷는 기분으로 내 삶을 돌아보기도 했다.

인생을 길이라 하는데, 그 길 중 가장 깨달음을 많이 준다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조이스는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그중 가장 큰 교훈은 역시나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는 거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들은 집과 업무로부터 이역만리 떨어져 있었고 7주 동안 "할 일"이나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없었다. 조이스와 톰은 마치 경쟁을 하듯 남보다 빨리 가기 위해 기진맥진한 일주일을 보냈다. 누가 그들보다 앞서가면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고, 젊은이들의 활력을 보면 본인들의 나이가 생각나 또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였다. 지지 않기 위해,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빨리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걷는다고 하여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었다. 본인들의 의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들의 통제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상태가 되고 만다.

"첫 주를 속도의 압박감 속에서 보낸 후 둘 다 피로가 쌓이고 풀이 죽어 있었다."

중간 없는 전진, 그것이 우리의 무언의 구호였다. 전진, 전진, 전진. 빨리, 빨리, 빨리. 급히 서두르는 통에 걷기 자체의 즐거움을 잃고 있음을 우리는 곧 깨달았다. 우리가 집을 떠나온 것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였건만 우리는 그 긴장을 모양만 바꾸어 그대로 가지고 왔다.

스트레스의 장소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성취와 성과의 욕심과 기대에 짓눌려 계속 긴장하고 끙끙댔다. 성취야말로 우리 문화의 발전 기반이자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문화가 우리 안에 심어 준 목표가 아니던가.

하지만 조이스가 말하는 성취를 향한 목표는 순례길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순례길의 목표는 이루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례길의 목표는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그리고 무엇보다 걷는 것 그 자체에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걷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삶을 바라보고, 또 그 삶을 살아내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그래서 그들은 여행을 오기 전 친구 버나드를 통해 알게 된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느긋하게 걸어라."

순례길에 오른 경험이 있던 버나드는 그들처럼 바삐 걷다가 발에 물집이 생겨 큰 고생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대피소에서 만난 한 노인이 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물을 더 많이 마시고, 느긋하게 걸으시오."

노인의 말대로 정말 물을 많이 마시고 느긋하게 걸으니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고 버나드는 말했다. 그래서 버나드는 그들에게 해줄 조언이란 이 말뿐이 없다고 했다.

버나드의 조언대로 그들은 느긋하게 걷기 위해 '노력'했다. 평생에 걸쳐 습관이 든 염려증과 조급증을 한 번에 털어낼 수는 없었지만 둘은 번갈아 가며 상대의 서두름을 저지했고, 서서히 느긋해져 갔다. 그러자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한다.

"걷는 속도를 늦추는 외적인 행동이 우리 내면의 속도에도 영향을 미침을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는 마음이 더 평화로웠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느긋해지는 방법은 무엇일 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기도 잠깐, 그들이 이 방법까지 일러주는 것이 아닌가. 지금 여기에서 느긋해지는 방법은 바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거였다. 전진만 하지 말고, 잠시 서서, 지나온 여정을 돌아보는 것이다.

멈추어 지난 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이 순례에 방해가 되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것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땅과 사람들의 아름다움, 순례의 선물, 동행의 기쁨에 대한 감사기도에 가까웠다. 이미 경험한 일을 그렇게 시간을 내서 돌아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쳤을 것이다.

카미노에서는 그저 전진만으로는 부족했다. 우리는 과거를 아무렇게나 두고 갈 수 없었다. 가장 좋았던 과거는 기억되기를 원하며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되돌아봄의 교훈이 나에게 그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었다.

긴 한 해를 앞에 두고 있는 지금, 느긋하게 한 해를 시작하는 방법이 그들의 말처럼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시간을 가져야만 과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또 그 속에서 앞으로의 삶을 위한 교훈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사실 뭐, 교훈을 꼭 얻어야 할까. 그저 돌아보는 시간을 내는 것 그 자체, 그 여유, 그 느긋함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느긋하게 걸어라 - 산티아고 가는 길| 조이스 럽 (지은이), 윤종석 (옮긴이) | 복있는사람 | 2008년 5월

독서 에세이입니다.



느긋하게 걸어라 - 산티아고 가는 길

조이스 럽 지음, 윤종석 옮김, 복있는사람(2008)


태그:#독서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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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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