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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얼른 형이라고 해보소!"
"……."

"이보게 사위! 형님~ 이렇게 한번 불러보라니께"
"……."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사용하는 우리 장모님이 나를 다그치는 말이다. 내 앞에서 소주 한 잔 들이키고 있는 형에게 "형~"이라고 불러보라는 것이다. 난 아무 말도 못하고 돼지고기만 씹어댔다. 참 난감한 이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2005년경 당시 형의 가족과 처가와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우리 부부가 양쪽 집을 초대하여 저녁식사로 삼겹살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우리 형제의 옛날 이야기가 나왔다. 들추고 싶지 않은 과거다. 어릴 적 내 남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다짐했던 7살 소년의 마지막 몸부림 말이다.

한 살 차이 형에게 '언니'라 부르라는 이모

왼쪽부터 필자, 한 살 터울 형, 세 살 아래 남동생
▲ 40년 가까이 된 삼형제 사진 왼쪽부터 필자, 한 살 터울 형, 세 살 아래 남동생
ⓒ 김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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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한 살 터울인 형과 3살 아래의 남동생 그리고 8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다. 3남 1녀. 남동생과 여동생은 나이 차이가 좀 있는 편이라 형이나 오빠라는 호칭이 문제되지 않았는데 형과 나 사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70년대 중후반 쯤이다. 나는 어릴 적 여섯 일곱 살 때까지 한 살 위의 형에게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야!"라고 불렀다. 형도 그런 나에게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응당해야 할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형이라 부르라 가르쳐 준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기억엔 말이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온 이모가 그 장면을 보고 내게 말해줬다.

"△△아,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 너보다 나이가 많은데 '야!'라고 하면 안 돼. 알았지?"
"네."

난 이모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우리 가족 중에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 난 이 존재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한단다. 엄마의 동생 이모가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나 역시 남자다.

"언니~"
"야, 하지 마. 무슨 언니야!"

"언니, 이모가 언니라고 부르래"
"하지 말라니까~"

그때 내 나이가 7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고 나는 형에게 '언니'라고 부르고 다녔다. 그런데 그 소리를 동네 형들과 친구들이 듣게 된 것이다. 당연히 나는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자기 형에게 '언니'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야들아, 쟤는 자기 형한테 언니라고 부른다!"
"계집애인가 봐, 언니래"
"진짜 웃긴다. 남자끼리 무슨 언니야?"

삽시간에 온 동네로 소문이 퍼졌고 나는 졸지에 이상한 놈으로 취급을 받았다. 자기 친 형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특이한 녀석! 다행히 마을 어린이 사이에 놀림감이 되었던 기간은 몇 주 되지 않았다. 따돌림이란 것을 모르는 어린애들이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현재 내 나이 40대 중반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 호칭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난 혼란에 빠졌다. '야'라고 부르면 이모나 엄마가 뭐라 하고, '언니'라 부르면 동네 애들이 놀리고. 그래도 '형'이라는 말은 입에 붙지 않았다.

형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나

형과 나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한 살 차이가 다들 그렇듯 자주 싸웠다. 서로 욕도 하며 주먹질은 물론 레슬링을 능가하는 난타전이 수시로 있었다. 거기엔 장남을 우선시하는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향도 있었고 유독 나를 못살게 구는 형에게 감정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부모님이 형에게 때리려면 다른 애들을 때리지 왜 자기 동생을 그렇게 때리느냐고 혼낸 적이 있었다. 난 이런 형에게 너무 시달리고 자주 싸웠던데다 결정적으로 '언니' 사건 이후로 다짐을 한 것이 있다.

'저 사람을 형으로 부르지도, 형으로 인정하지도 않겠다.'

나름 비장한 각오로 생각을 굳혔다. 그 이후로 내가 형을 부르는 호칭은 "야" 아니면 "저기~", 혹은 호칭 없이 필요한 말만 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다. 형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초등학교를 오롯이 지내며 난 형에게 한 번도 형이라 부른 적이 없다. 엄마에게 여러 번 등짝도 얻어터지고 회초리로 종아리도 맞았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릴 적 내 자존심에 받은 상처, 형과의 끊임없는 싸움은 7살 어린아이의 다짐을 더 굳게 만들었다.

그러다 형과의 사이가 더 멀어지는 시기가 다가왔다. 이전까지는 매일같이 싸워도 밥 먹을 때나 어디 놀러 갈 때는 가족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형이 사춘기로 접어들며 나와의 사이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키가 크지 않아 땅바닥에 붙어 다녔고 몸도 왜소해서 교실에 들어가면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형은 중학교 2학년을 넘어가며 몸집이 갑작스레 커지기 시작했다. 반에서도 키가 제일 큰 쪽에 속하고 힘도 세졌다. 이제 나와는 싸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형과 나의 마지막 몸싸움은 내가 중학교 1학년, 형이 2학년 때였다. 자존심을 걸고 온몸을 던져 싸웠지만, 그 모습은 골리앗과 다윗의 모습 같았다. 키가 10cm 이상, 몸무게도 20kg 가량 차이가 나니 싸운답시고 젖 먹던 힘까지 내봤지만 결국 형 가랑이 밑에 깔려버리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난 형에게 말을 걸지도 싸울 생각도 안 했다. 내게 물어보면 대답만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자존심이 뭐라고. 40대 중반이 된 나는 지금도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어릴 적부터 10대 말까지 형과 싸우며 부딪힌 기억은 감정적으로 무게가 더해가며 자존심 문제로 다가왔다. 형과 나는 항상 서먹한 사이였다.

호칭이라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오는 대화는 말을 건네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친밀도나 신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 준다. 그러나 형에게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나는 형에게서 가족 구성원으로 가지는 소속감이나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여러 번 사고 치며 엄마, 아빠를 힘들게 했던 형이 미웠다.

20대를 넘어 집에서 독립을 하고 사회생활을 할 때 형과의 전화통화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였다. 그나마 그것도 명절이 되어서야 서로 살아있나 확인하는 정도다. 남들은 이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한두 번 전화로 안부 물어보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전화한다 해도 할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형도 나이가 들어 아이가 생기고 나니 점점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쩌다 나와 술 한 잔할 때면 '외롭다, 나에겐 너랑 동생들 밖에 없다'라는 얘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결혼 후 아파트로 이사하자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아래 위로 함께 살자는 것이다.

조금 의외였고 당황스러웠다. 어쩌면 엄마가 88년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풍비박산이 난 우리 집 가정사로 비추어 볼 때, 뿔뿔이 흩어져 있는 핏줄의 뜨거움이 더욱 간절해지기 때문이었을까? 형은 4남매가 가까이 사는 것을 원했다.

형의 때늦은 결혼식! 동생과 합동결혼식으로

2005년 당시 결혼을 앞둔 나는 형에게 합동결혼식을 제안했다. 당시 형은 집안의 반대로 식을 올리지 못하고 형수님과 살며 딸 하나, 아들 하나 이렇게 두 아이를 키우고 있을 때였다. 우리의 제안에 형도 형수님도 동의하고 드디어 결혼식을 치렀다. 신랑과 신부가 두 팀인 흔치 않은 결혼식으로.

이런 과정을 계기로 형에 대한 나의 묵은 감정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핏줄이란 게 뭔지….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해체 직전의 가정에서 십수 년의 시간  동안 억눌린 채 긁히고 베인 상처는 너무나 깊고 아팠다. 4남매가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떨어져 살고 있으니 장남으로서 책임감도 느낄 뿐더러 형제들 간의 정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처가도 우리 아파트도 이사를 오게 되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다 보니 처가와 형도 자주 보며 가끔 포장마차에서 술 한 잔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서 다 같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하자고 했던 것. 그리하여 아래층의 형네 가족과 옆 동의 처가 식구도 함께 불렀다. 돼지고기가 적당히 익어가고 소주가 서너 잔씩 돌자 형이 옛날 얘기를 꺼냈다. 바로 이 글의 도입 부분에서 얘기했던 상황이다.

"어르신, 제 동생은요 저에게 형이라고 안 불러요. 어릴 때부터 저한테 형이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러자 장모님이 놀라시며,

"자네 정말인가? 아니, 형에게 형이라고 한 부르면 뭐라고 부르나? 얼른 형이라고 불러보소!"
"……."

난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어디론가 숨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형이 보란 듯이 말한다.

"보세요, 정말이죠? 쟤는 저한테 절대로 형이라고 안 부를 거예요. 제가 어릴 때 많이 때려서 그런가봐요. 지금 생각하면 많이 미안해요."
"사위, 자네 그러면 안 되네. 어릴 때는 형제들끼리 싸우면서 크는 거지. 그렇다고 형이라고 부르지 않는게 말이 되나? 벌 받네 자네! 나중에 애들 다 크면 형제밖에 없어."

어릴 적 형에 대한 미움과 원망은 내 자존심을 어그러지게 만들었고 십대를 거치며 그 맹랑한 자존심은 더욱 굳어졌다. 중학교 때 형과의 마지막 싸움, 그 시절로부터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못난 자존심이 굳어져 맨살을 덮고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었다. 부르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빠는 왜 큰 오빠한테 형이라고 안 해?"

몇 년 전 막내 여동생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자기 딴에도 정말 궁금한가 보다. 난 앞으로도 형이라 부르기 어려울 것 같다. 자신이 없다. 창피하기도 하다. 형은 형이되 말로는 할 수 없는 형이다.

덧붙이는 글 | <자존심 때문에> 응모글



태그:#자존심, #핏줄,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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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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