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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땅콩 회항'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남 일 같지 않았다. 1년 전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당한, 이른바 '갑'의 횡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콩회항 사건이 언론을 가득 채웠을 때, 나도 같은 '을'로서 분개했다.

지난 19일 '인턴기자'가 되어 '슈퍼 갑'에 대한 법의 심판을 참관하기 위해 서울서부지방법원으로 향했다. 국민적 관심을 끌었던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한 첫 공판인 만큼, 100여석 규모의 법정은 취재진과 방청인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5시간에 걸친 재판 내내 검찰과 변호인단의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그러나 정작 조 전 부사장의 입에서는 단 한마디의 사과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날 재판에서는 조 전 부사장과 함께 유일하게 1등석에 있었던 한 승객이 '땅콩 회항' 당시 친구에게 보낸 카카오톡 내용이 처음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법원서 5년 넘게 일했지만 번호표까지 주는 건 처음 봐"

이날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한 공판은 오후 2시 30분으로 예정돼 있었지만, 법원청사 303호 앞은 1시간 전부터 기자와 방청인들로 북적였다. 법정에 입장하려면 받아야 하는 번호표는 오전 11시 반부터 배부했는데, 금세 동이 났다. 기자 64명, 일반 방청인 57명이 이미 번호표를 받아간 뒤였다. 번호표를 받지 못한 기자들과 일반 방청인들은 법정 앞에 두 줄로 섰다. 한 쪽에선 번호표를 받지 못한 사람들끼리 서로 법정에 들어가겠다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오후 2시 10분께 303호 문이 열렸다. 빠른 번호표를 가진 사람부터 앞좌석에 앉았고 뒷좌석까지 자리가 다 찼다. 번호표를 받지 못한 기자와 일반 방청인들은 서서 재판을 방청해야 했다. 개정 후에도 계속 사람들이 몰려들어 1시간 40여분을 기다려 들어간 방청인도 있었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5년 1개월을 여기서 근무했는데 번호표를 배부한 적은 처음"이라며 "오전 9시에 온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후 2시 20분께, 법정 안은 좌석 뿐만 아니라 서 있을 수 있는 자리도 빈 공간 없이 가득 찼다. 그 중에는 일본에서 온 외신 기자도 있었고,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들도 두세 명 볼 수 있었다. 짧은 머리의 젊은이도, 흰 머리의 노신사도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몇 사람은 외투를 벗고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법정 안의 온도가 높아지자 법원은 급기야 한겨울임에도 냉방기를 가동했다.

증인석 너머 오른쪽 변호인석에는 변호인단이 미리 와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맞은편 검찰 측 책상에는 천 페이지가 족히 넘어 보이는 자료들이 서너 묶음 올려져 있었다. 법정 안에는 여덟 명 남짓한 경호 인력이 배치됐다. 방청석의 양 옆에는 TV 모니터가 달려 있어 뒷줄에 앉은 방청인들도 증거자료를 볼 수 있게 했다.

오후 2시 30분, 재판이 시작됐다. 오성우 부장판사를 포함한 3명의 판사가 입장했다. 이후 조 전 부사장과 피고인인 여아무개(57) 대한항공 상무, 김아무개(53) 국토교통부 감독관이 들어와 변호인들 옆에 앉았다. 쑥색 수의를 입은 조 전 부사장은 검찰 출석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입장했다.

어깨에 채 닿지 않는 단발머리는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재판부를 향해 허리를 한 번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후로도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방청석과 거의 등을 돌리고 앉았다. 가끔 의자에 기댔다가 턱을 괴기도 하고, 휴지로 얼굴을 닦거나 종이로 입을 가리고 변호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조 전 부사장 "(하고싶은 말이) 없습니다"

'땅콩 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구속  항공보안법 위반과 업무 방해, 강요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올라타기 전 취재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 '땅콩 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구속 항공보안법 위반과 업무 방해, 강요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올라타기 전 취재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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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공판의 쟁점은 당시의 회항을 항공보안법상 위법으로 볼 수 있느냐였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판사를 중심에 두고 서로의 주장을 펼쳤다. 검찰은 "게이트까지 20m를 이동했다"며 "다른 항공기와 충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강조했다.

반면 조 전 부사장의 변호를 맡은 서창희(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게이트로 돌아간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공로(하늘길)를 이용하지 않았고, 사실상 이동거리는 17m로 주기장에서 이동해야 할 거리의 1/10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방청객이 많았지만 비교적 차분하게 재판을 경청하는 분위기였으나, 가끔은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조 전 부사장과 함께 1등석을 탔던 유일한 승객의 카카오톡 내용이 그대로 공개됐기 때문이다. 검찰 측이 법정 내 TV 모니터에 띄운 카카오톡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 미쳤나봐 어떡해. 비행기 출발 안 했는데 뒤에 미친X이야."
"승무원한테 뭐 달라했는데 안줬나봐. 계속 소리지르고, 사무장 와서 완전 개난리다."
"헐 내리래 무조건 내리래. 사무장 짐 들고 내리래."
"헐 진짜 붙인다(게이트로 비행기를 붙인다는 뜻), 정말 붙여. 내가 보기엔 그리 큰 잘못 아닌데 살다살다 이런 경우 첨 봐."
"도대체 저 여자 때문에 도대체 몇 사람이 피해 보는 거야."

카카오톡 내용 때문에 방청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등 술렁이자 검찰 측은 급히 TV 모니터에 노출했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내리고, 직접 낭독하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하며 말했던 "대박" "나 이런 거 처음 봐" "완전 미친X이네" 등의 내용이 그대로 법정에 울려퍼졌다.

검찰 측은 또 대한항공 소속 직원들 사이에 주고 받은 문자메시지도 공개했다. "누가봐도 조현아가 미친X인데" 등의 내용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자신에 대한 불리한 증거들이 제출된 상황이었지만 조 전 부사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재판은 두 번 휴정을 할 만큼 길게 이어졌다. 증거 확인만 2시간 가량이 소요됐다. 두 번의 휴정 시간 동안 조 전 부사장은 자리를 비웠고, 다시 법정 안으로 들어올 때면 항상 판사를 향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방청석으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재판 중간 중간 몇몇 방청인과 기자는 조 전 부사장의 표정이 궁금한지 고개를 움직이며 그가 앉은 쪽을 바라보기도 했다.

초기 증인신문을 포함해 5시간에 걸친 재판 동안 조 전 부사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겨우 서너 마디였다. 본인이 맞냐는 판사의 질문에 "네", 현재 직업을 묻는 질문에 "무직"이라고 답했다. 그는 시종일관 매우 작은 목소리로 말해 방청석까지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장 크게 한 말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판사의 제안에 "없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변한 것이다. 다른 모든 반박과 답변은 변호인이 대신했다.

재판부는 이날 재판을 마치면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당시 조현아 전 부사장에게 견과류를 제공한 김아무개 승무원을 직권으로 증인 소환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조 전 부사장의 지시로 비행기에서 내린) 박창진 사무장의 경우 이 사건으로 인해 과연 대한항공에서 근무할 수 있을지... 재판부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라며 "박 사무장이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조양호 회장을 직권으로 신문하겠다"고 말했다. 박 사무장의 향후 거취가 판결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박 사무장은 다음 공판 검찰 측 증인으로 채택됐다.

재판은 오후 7시 50분이 지나서야 끝났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100여 명의 방청인들은 대부분 좌석을 지키고 있었다. 기자도 아닌 일반 방청인들은 무엇 때문에 끝까지 자리를 지켰을까. 재판 내내 "죄송하다" "통렬히 반성한다"는 내용이 법정에 울렸지만 사과는 당사자가 아닌 변호인의 입에서만 나왔다. 또한 변호인의 사과는 뒤이어 나오는 '법리적 해석'에 묻혔다. '슈퍼 갑'은 끝내 '을'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법정 밖으로 나갔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21기 인턴기자 이유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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