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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추운 날씨에 시달리다 '피한'하러 떠났던 포근하고 수려한 물의 도시 전남 여수. 새해 들어 이 도시를 두 번이나 찾아간 건 다 '여수 갯가길' 때문이다. 투박하고 정다운 이름의 이 길은 우리나라 남해바다 여수반도의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다. 현재 4개의 걷기길이 이어졌고, 420km나 되는 여수반도 해안선을 따라 앞으로 총 25개의 갯가길이 조성될 예정이라니 여수 여행이 더욱 풍성해지겠다.

우리나라 남·서해안은 대표적인 리아스식 해안(육지의 침강 또는 해수면 상승으로 육지의 일부가 바다 속에 잠겨 이루어진 굴곡이 심한 해안)선이다. 특히 남해안의 다도해는 해안선이 길고 복잡하여 '한국식 해안'으로도 불린다. 그런 해안선을 걷는 여수 갯가길엔 몽돌해변, 해안가 숲길, 어촌마을, 갯바위길, 비렁길 등이 여행자를 반긴다.

여정을 더욱 풍성하게 한 여수행 남도해양열차

여수여행을 더 여유롭게 해준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
 여수여행을 더 여유롭게 해준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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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특별한 기차를 타고 여수로 향했다. 남도해양열차(S-Train)이라 불리는 관광열차로 서울-대전-전주-남원-순천을 거쳐 여수를 오가며, 지금은 사라진 경전선 기차의 코스인 부산-진주-하동-벌교-보성 사이를 다니는 기차다(기차 삯은 서울-여수 기준 3만9300원). S는 바다의 영문인 Sea(시)의 약자로 곡선 모양의 경전선과 리아스식 해안인 구불구불한 남해안 모양을 형상화했단다. 여수여행에 어울리는 기차다.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편안한 휴게실이 있고 휴대기기 사용자를 위해 좌석마다 충전 콘센트가 붙어 있다. 중간 중간 신청곡을 받아 승무원이 DJ처럼 소개말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기도 한다. 교통정체 걱정 없이 여유로운 마음으로 여정을 즐길 수 있는 기차다. 나처럼 자전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객실 한량에 자전거용 거치대를 마련해 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자전거 운송·보관비용은 따로 없다.  

종점인 여수 엑스포역에 내리면 역 앞에 관광안내센터가 보인다. 직원에게서 갯가길 안내와 함께 지도도 얻고 교통편, 숙박지 등 여수 여행에 대한 각종 정보가 있어 여행자에게 매우 유용한 곳이다. 3개의 갯가길 가운데 무술목 해변에서 방죽포 해변까지 해안선을 따라 난 2번째 코스의 갯가길을 가기로 했다. '2km에 걸쳐 이어진 비렁길'이 있어서였다. '비렁'은 벼랑(절벽의 순우리말)의 갯내음 나는 여수 사투리다. 절벽을 따라 벼랑길이 2km나 이어져 있다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수역 앞에서 111번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돌산읍을 달려 무술목 해변(여수시 돌산읍 평사리)에 혼자 내렸다. 평일에다 아직 널리 알려진 길이 아니다 보니 갯가길을 걷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7km의 해안선 길을 내내 홀로 걸었다. 몇 년 전 겨울 10km의 제주 사려니 숲길을 혼자 걸어본 이래 처음이다. 쓸쓸함과 홀가분한 기분이 걷는 두 다리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교차했다.

주민들이 갯것 하러 다니던 갯가의 길

겨울에도 포근하고 아늑했던 여수 갯가길.
 겨울에도 포근하고 아늑했던 여수 갯가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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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락 자그락' 파도소리가 아늑하게 느껴지는 무술목 해변은 몽돌 바닷가다. 파도가 수도 없이 오가며 깎은 갖가지 모양의 몽돌은 인간에겐 수석이라 불리기도 한다. 바닷가 입구에 허가 없이 돌을 가져가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경고판이 서있다.

파도 너머로 무인도 두 개가 다정하게 떠있다. 여수반도는 3백 개가 넘는 유무인도가 있단다. 작은 무인도들은 넓지만 밋밋한 바다를 정답게 만들어 주고, 홀로 갯가길을 걷는 여행자가 외로움에 빠지지 않게 벗이 돼주었다. 여수 갯가길의 상징 청색 거북이와 주황색 리본을 따라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었다.          

여수 갯가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싱싱한 회 같은 날 것의 느낌이 나는 길이다.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깎고 다듬고 꾸민 그런 길이 아니다. 걷기 편하라고 조성한 흔한 나무 데크 같은 인공 구조물을 볼 수가 없다. 오르막이 이어지는 곳은 삼을 엮어 바닥을 깔았고 벼랑 옆길 위험한 곳은 삼으로 만든 줄을 걸쳐 놓았다. 특히 바닥 매트는 흔히 쓰는 시커먼 폐타이어로 만든 것이 아니라서 더욱 맘에 들었다. 자연의 특성을 살리고 친환경 걷기 길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묻어 나왔다.

청거북이 따라 해안선을 느릿느릿 걷는 여수 갯가길.
 청거북이 따라 해안선을 느릿느릿 걷는 여수 갯가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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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내내 투박하고 거친 여수 해안선의 속살이 그대로 발바닥에 느껴졌다. 언젠간 이 길을 찾는 사람이 없을 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성을 했다니 그럴 만했다. '갯가'는 바닷물이 들었다 빠졌다 하는 바닷가의 가장자리를 말한다. 여수 갯가길은 주민들이 따개비, 고동, 홍합, 청각, 거북손 등 갯것 하러 다니던 갯가의 길을 복원한 것이다. 알고 보니 걷는 길이 좋아 모인 사람들의 비영리 시민단체인 사단법인 여수 갯가길에서 조성한 길이란다.

해변의 오솔길, 울창한 숲길, 오르막 산자락 길 등 다양한 길이 해안을 따라 이어졌다. 갯가는 예전부터 바닷가 주민들의 삶의 원천이었기에 갯가에 나가야만 고달픈 삶을 이어갈 수 있었고, 갯가로 나가는 길은 이처럼 숲을 헤치고 산을 넘어야만 가는 길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굽이굽이마다 작은 산 속 숲길을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고저의 차가 크지 않고 험한 길도 없어 거친 숨을 몰아쉬지 않고서도 걸을 수 있다. 산기슭을 걸으면서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 위의 밭 양식장을 오가는 어부들이 풍기는 갯내음을 맡을 수 있다.

갯가길에서 처음 만나는 반가운 어촌 동네가 계동 마을이다. 해안가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아늑한 기분이 드는 곳. 등대가 서있는 작은 방파제며 부두에 정박 중인 어선들, 바닷가 옆 정자 풍경이 내가 좋아하는 제주도 조천읍 동네와 너무 흡사해 놀랐다.

계동 마트 앞 평상에 앉아 동네를 멀거니 둘러보았다. 늦은 점심밥도 먹을 겸 마트 아주머니가 알려준 식당에 찾아갔다. 손님이 없어서 미처 준비해 놓은 게 없다는 식당 주인장에게 그럼 점심으로 드셨던 집밥이라도 달라고, 방죽포 해변까지 가야 하는데 배가 고파 더 걸을 수가 없다고 엄살을 부렸다.

다양하고 귀한 갯것이 들어간 잊지못할 여수 갯가길 비빕밥.
 다양하고 귀한 갯것이 들어간 잊지못할 여수 갯가길 비빕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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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점심 때 먹은 비빔밥이라며 뚝딱 내주셨다. 각종 나물과 야채가 주로 들어가는 보통 비빔밥과 달리 갯가길 마을의 비빔밥은 '갯것'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손님이라고 바닷가 바위 틈에 붙어 있는 따개비류인 '거북손' 같은 남해안의 귀한 해산물이 정성스럽게 밥 위에 올라와 있어 쉬이 비비지 못하고 잠시 쳐다만 봤다. 갯가길이 아니었다면 먹기 힘들었을 귀한 집밥 맛있게 감사히 먹었다.

갯바위, 비렁길이 이어지는 계동마을~두문포 구간 

어구와 그물을 다듬는 나이 지긋한 촌부와 멀리 타국에서 고향을 떠나 온 젊은 청년에게 눈인사를 하며 다시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촌 마을 인근의 갯가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땀까지 더해져서인지 더욱 진한 갯내음이 났다. 갯가길엔 갯바위를 익숙하게 넘어 다니며 여행자를 구경하는 염소들이 있다. 특유의 울음소리와 뜬 듯 감은 듯한 눈이 귀여워 가까이 다가가 한 눈을 팔다가 주황색 갯가길 리본을 놓쳐 다른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울창한 숲속 오솔길을 걷다가 갑자기 푸른 바다와 함께 사방이 탁 트이면서 흰 등대 하나가 나타났다. 위성GPS가 발달해 등대의 필요성이 약화되긴 했지만, 이 등대는 기가 막힌 전망의 위치로 보아 아직 오고가는 배들의 조타수가 되어줄 것 같다. 흰 등대는 또한 여수 갯가길 2코스의 상징이자 진수인 갯바위길, 비렁길이 시작되는 표시이기도 했다. 들쭉날쭉한 해안선을 따라 갯바위와 벼랑이 끝도 없이 펼쳐져 보였다. 느슨해진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맸다.

날 것의 느낌이 그대로 발끝에 묻어나는 갯바위, 비렁길.
 날 것의 느낌이 그대로 발끝에 묻어나는 갯바위, 비렁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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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표시만 나있을 뿐 아무런 인공 산책로가 없는 갯바위 길에 쉬어가라는 듯 수십 명이 쉬어가도 될 널찍한 너럭바위가 광장처럼 나타났다. 너럭바위 위 평평한 곳에 앉아 쉬어갔다. 바다에 반사된 햇볕이 바위를 데워놔 엉덩이가 뜨뜻했다.

햇살에 눈이 부셔 염소 눈을 하고 쪽빛 남해바다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봤다. 지금이 한겨울이 맞나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곳이 여수다. 기지국이 멀어선지 휴대폰이 방전되고 말았다. 서울에서라면 휴대폰 방전은 곧 단절과 고립으로 느껴져 안절부절했을 텐데, 갯가길에선 초조하기는커녕 까맣게 잊어버렸던 갯바위 노래가 떠올랐다.

나는 나는 갯바위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파도
어느 고운 바람 불던 날
잔잔히 다가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감싸고
향기로운 입술도 내게 주었지

새찬 비바람에 내 몸이 패이고
이는 파도에 내 뜻이 부서져도
나의 생은 당신의 조각품인 것을
나는 당신으로 인해 아름다운 것을

이렇게 기억을 떠올려 보니 당시의 가요는 팝송과 함께 노랫말이 참 시적이고 아름다운 것 같다. 그래서 1980~90년대의 가요와 외국 팝송이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싶다.

갯가길은 조수 간만의 차로 걷는 길이 달라지는 묘미가 있다. 바닷물의 수위가 낮아질 때는 이 갯바위와 너럭바위를 타고 바닷가로 내려가 물속에 잠겼던 해안가를 걸을 수 있다. 바다 속에서부터 바로 솟아 오른 직절벽 옆으로 비렁길이 이어졌다. 철렁철렁 파도소리를 곁에 두고서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스릴을 즐기며 걸었다.

비렁과 나무들의 경계를 따라 만들어진 비렁길엔 경사가 가파른 절벽이 계속되지만, 완만한 일부 구간에서는 바닷물 가까이 내려설 수 있다. 낚시꾼들이 즐겨 찾겠다. 오르막 비렁길은 힘들지만 쪽빛 바다와 푸른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을 벗삼아 걸을 수 있고, 바다위로 간간히 떠있는 작은 섬들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내었다. 마음 속 한구석에 언제라도 감상할 수 있는 갯가길 미술관이 생겼다.

야자수와 빨래대신 걸어놓은 물메기가 정겨운 갯가길의 어촌마을.
 야자수와 빨래대신 걸어놓은 물메기가 정겨운 갯가길의 어촌마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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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km로 이어져 여수 최장의 비렁길이 끝나는 곳에 두문포 마을이 수고했다며 반겨주었다. 집 마당에 사는 이국적인 야자수 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마을 사람들이 옥상이나 집 담벼락에 빨래를 너는 풍경이 보였는데 다시 한 번 보니 빨래가 아니라 물메기(표준어 꼼치).

먹거리가 마땅치 않은 긴 겨울날 요긴한 식량이다 보니 이맘땐 물메기가 빨래보다 우선한다. 두문포 마을 바닷가 멸막(멸치 가공공장) 건너편에 무인도 '볼무섬'이 자리하고 있다. 여행 운이 좋다면 물이 빠져 생겨난 길을 통해 섬으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다. 섬과 멸막 사이의 목은 각종 해산물이 풍부해 주민들이 물 때마다 찾는 갯것 장소라고 한다. 

여수 갯가길 2코스의 끝인 방죽포 해변 가는 길, 왠지 갯가길과 어울리지 않는 옛 해안초소 건물들을 또 마주쳤다. 4~5명이 들어갈 수 있는 초소는 무엇보다 남해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이 참 좋다. 이렇게 방치되기보단 손질을 해서 갯가길을 걷는 갯가꾼들의 쉼터로 쓰면 좋겠다. 방죽포 마을엔 금빛 고운 모래와 200년 수령의 해송 군락이 병풍처럼 잘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 있다. 해풍을 견뎌내며 멋들어지게 서있는 소나무들이 5시간을 홀로 걸어온 여행자를 포근하게 품어주었다.  
  
* 여수 갯가길 2코스 : 무술목 해변 – 계동 마을 – 1.8km 비렁길 - 두문포 마을 – 무인도 볼무섬 - 방죽포 해변

5시간을 넘게 홀로 걸어온 여행자를 포근하게 품어준 방죽포 해변 소나무들.
 5시간을 넘게 홀로 걸어온 여행자를 포근하게 품어준 방죽포 해변 소나무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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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ㅇ 지난 1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ㅇ 갯가길 문의 : 사단법인 여수갯가 (061-920-5888)
ㅇ 누리집 : www.getga.org



태그:#여수 갯가길 2코스, #비렁길, #계동마을, #두문포, #방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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