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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기자말

수용소 내에서는 서서히 편갈림이 생기고 친공과 반공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수용소 내에서는 서서히 편갈림이 생기고 친공과 반공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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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에게 빨간 옷을 입혔다가 거부 투쟁이 발생했던 그 날 이후부터 수용소 안에서는 좌익 우익이 나뉘어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수용소 안에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면 우익 수용소,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잡으면 좌익수용소가 되었다. 내가 있던 76 포로수용소는 좌익이 가장 득세한 곳으로 유명했다.

수용소에서 좌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우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죽였다. 이를 눈치 챈 우익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좌익과 피할 수 없는 싸움이 계속돼 하룻밤에도 수십 명씩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제네바 포로협정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포로수용소 안으로 절대로 무기를 들고 들어오지 않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하지도 않았다.

좌우익의 이전투구... 사람 죽어나간 포로 수용소

76 수용소에서 처음 예배를 볼 때 교인들이 천명 이상씩 모이던 것이 좌익이 주도권을 잡으며 차츰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오십여 명, 신교 신자는 백여 명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끝까지 남은 신도들 중 한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CIE '유엔민간공보교육처'에서 발행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책을 가지고 하는 강의를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서구와 일본, 미국과 남미 등 여러 나라의 제도와 생활 등을 배웠는데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사상을 전환 시키려는 세뇌 공작이라고 반대하며 이 교육을 거부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교육은 중도에 중지되었다.

어느 날 수용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친공포로들이 국군 보초병과 말다툼을 하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보초가 총을 발사해 포로 몇 사람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소요가 확산되자 미군들이 장갑차를 몰고 와 포로들을 전부 천막 속으로 들여보내고 진압에 나섰다.

내 동료 한 사람은 변소 안에서 대변을 보다 총에 맞았는데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피를 흘리는 그를 보고 "야 너 총 맞았어!" 했더니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는 정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숨졌다. 나는 몹시 애통했다. 그 후부터 수용소 안은 점점 소란해졌다.

나는 미국인 '보켈' 선교사의 말을 들으며 성경 공부도 했다. 그러는 동안 8월 하순경이 되었는데 드디어 새로운 옷이 나왔다. 우리는 다시 옷을 입었다. 의복이 다시 나오고 가을이 되자 인민군 복장을 하고 인민군 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인민군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녔다.

9월 중순이 되었다. 보켈 선교사가 급히 전하길 신자들은 빨리 모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담요를 들고 갔더니 천주교 신자 오십여 명과 기독교 신자 백여 명이 모두 모였다. 우리는 그날 전격적으로 좌익인 76 수용소에서 우익인 82 수용소로 자리를 옮겨 가게 되었다. 나는 82 수용소에서 신자소대로 들어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 공부를 했는데 김건호 목사님의 사도행전 강의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다시 '유엔민간공보교육처'에서 가르치는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나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민주주의란 다 옳은 말과 옳은 사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신자소대는 예수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여서 참 재미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 예배를 보고 낮에는 성경공부를 하고 오후엔 쉬며 자유 시간을 가졌다. 저녁에는 암거래 시장인 '사바사바' 시장으로 가곤 했는데 거기에는 서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 가서 주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는데 없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구두 밑창 쇠로 칼을 만들기도 하고 반지도 만들었으며, 심지어 수저도 만들었다. 옷이나 천도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뜨개질도 하였고 천막 끈으로 뜬 양말도 있었다. 나는 반지를 가지고 가서 양말로 바꿔 신기도 했다. 사바사바 시장의 물건들은 보면 볼수록 그 기술들이 놀랍기만 했다. 때때로 자유 담배가 지급되었지만 나는 담배를 안 피워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오징어로 바꿔 먹기도 했다.

가을이 되자 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데 때는 10월 하순경이 되었다. 나는 이북 우리 고향보다 '철이 매우 늦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고향에선 9월 하순이면 단풍이 들고 서리가 내려 9월 20일경이면 벼의 수확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수용소에 '리지웨이' 장군이 왔는데 나는 이 때 미군 장군을 처음 보았다. 여흥시간에 한국 아가씨와 사귀던 미군들이 아리랑을 마치 한국 사람이 부르는 것처럼 잘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우리 82 수용소와 81, 83, 74 수용소는 우익수용소였지만 76 수용소와 78, 77 수용소는 좌익 세력권 안에 있어서 매일 좌우익 싸움이 벌어졌다. 우리 82 수용소에서는 좌익운동을 하면 그들을 색출해서 따로 가두고 감시를 하다 좌익 수용소에 넘겨주었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왔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모두 성탄 준비를 했다. 성탄절에는 밥을 곱이나 먹을 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우리는 서로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인사를 한 후 성탄예배를 드렸고 낮에도 대예배를 보았다.

벽보판에는 신문이 붙어 있는데 철원 평강 김화에서 전투가 심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사상자의 수가 매일 늘고 있다는 보도를 보았다. 나는 전투소식을 보며 '언제 전쟁이 끝나 통일이 되어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고향을 그리워했다.

거제도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 겨울이 되자 따뜻한 옷이 배급되어 우리들은 좋은 겨울옷을 입을 수 있었다. 나는 동료들과 '거제도는 겨울에 눈이 오나 안 오나?' 하는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거제도엔 눈이 안 온다'라고 했고 나도 '눈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2월초가 되자 거제도엔 눈이 많이 왔다. 우리는 그때서야 '한반도엔 어디나 눈이 오는구나'하고 신기한 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송반대 시위... "저는 이남에 남겠습니다"

3월 1일이 다가오자 우리는 '기미년 3월 1일 정오'라는 삼일절 노래를 배웠다. 남한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운 노래다. 그리고 '전우가'를 비롯해서 많은 군가도 배우게 됐다. 3월 1일에는 처음으로 영내에서 기념행사를 가졌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판문점에서 정전회담 때 포로교환 문제가 큰 의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 포로 가운데에는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고 북송반대 시위를 크게 벌였다. 그날 나는 지붕 위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사다리를 딛고 내려오다 사다리가 넘어져 땅에 떨어졌다. 그때 가슴에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정신은 멀쩡하였지만 심장이 잠시 멎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위생병이 나를 흔들며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들이 또렷이 보이고 하는 말도 들을 수는 있었으나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몇 분이 지난 후 하늘이 노래지고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 때 위생병이 내 가슴을 두들겨주고 막 문지르니 심장이 움직이고 조금 후 내 호흡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의 모습.
ⓒ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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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경 거제도 포로수용소중 제일 먼저 우리 82 수용소에서 북으로 송환을 원하는 사람과 송환을 반대하는 사람을 구별하는 개인별 심사가 열렸다.

포로 전원이 자기의 소지품을 갖고 심사 장소로 갔는데 천막이 대여섯 개 쳐 있는 곳으로 가서 오륙 명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 차례가 되면 한 사람씩 천막 안으로 들어가 헌병이 한 사람씩 심사대로  보냈다. 책상에 앉은 심사원은 "고향으로 가길 원하십니까? 이남에 남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북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카드에 'G'라고 써줘서 내보내고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카드를 주며 나가라고 하였다. 심사원은 "되도록 고향으로 가서 부모형제를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가야 되지 않겠냐는 말을 하였다. 나는 이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했다. "왜 남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어 "공산주의는 자유가 없기 때문에 이남에 남겠습니다" 했더니 그냥 나가라고 하였다.

천막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오면 거기에는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북으로, 하나는 남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나오자마자 헌병에게 빈 카드를 보여주었더니 남으로 가는 길로 가라고 하였다. 나는 자유를 택했다. 나의 운명을 결정한 길이었다.

심사를 마친 사람들이 심사를 아직 안한 사람과 섞이지 않게 하려고 우리를 이중 철조망 안으로 분리 수용하였다.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결정한 친구들을 보며 "야! 잘 가거라"하고 손을 들어 인사도 하고 서로 이별하게 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줄을 세워 놓았다가 즉시즉시 트럭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보였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묘한 일이 벌어졌다. 고향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소리쳐 욕을 하였다.

"미제의 앞잡이들아! 양키새끼들아! 고향으로 가면 네 부모 형제들을 그냥 둘 것 같으냐? 반동 놈들아! 너희 부모들을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두고 봐라. 인민을 배반한 놈들아!" 

이 말을 들은 반공포로들은 고향의 부모를 생각하며 '저 놈들이 고향으로 가 우리 부모 형제들을 처단하면 어쩌나?'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눈에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는 북으로 가는 사람들이 탄 차가 지나가면 돌을 들어 마구 던지고 때리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송환되는 포로들이 원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이북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이북으로 가기를 거절한 것은 이남이 이북보다 살기 좋아서도 아니고 남한이 북한보다 더 잘 살아서도 아니었다. 인간에게 주는 자유, 이 자유가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향을 버리고 남을 택한 것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 형수, 여동생들을 언제 만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생이별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나는 마음속으로 '부모님을 배반한 게 결코 아닙니다. 북한의 동포를 배반한 게 아닙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배반했습니다. 부모님 용서하세요'하고 되뇌이며 몇 번이나 울었다. 83 수용소에 형님과 한 동창생인 '김 아무개'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큰 소리로 "거기 이천군 사람들이 있느냐?"하고 물었더니 "이천군 유대포리 사람들이 많이 있다"라는 대답이 왔다.

82 수용소 안에서 고향 친구 '박 아무개'와 석정동에 사는 '김 아무개'를 만났다. 북으로의 송환을 거부하자고 굳게 결의했던 고향 용포리에 사는 '김 아무개'는 결국 북을 선택했다고 했다. 남에 남는다고 하더니 끝내 북으로 간 것이었다. 북으로 간 친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이 그리워서 북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남에 남기로 한 것이 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북으로 송환되더라도 "포로가 되어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하고 위로하며 우릴 가족의 품으로 절대 돌려보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피 한 방울 남지 않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인민군 군인선서를 했는데 거기에 보면 조국과 인민을 위해 싸우지 않을 때는 인민의 심판을 달게 받겠다는 선서를 했기 때문에 인민군을 이탈하여 귀순한 나를 그냥 놔 둘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예 돌아가지 않으면 그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재판에 회부되면 어떤 심판이 닥칠 것이 분명하였고 우리 가족에게도 결국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 틀림없었다.

내 몸은 예전에 맞은 상처가 깨끗이 낫지 않아 계속 좋지 않았다. 우리 수용소에 대한 포로 송환심사가 끝나자 81 수용소의 심사가 시작되었다. 또 다시 동료들이 갈라지고 북으로 가는 동료들이 탄 차들은 돌팔매를 맞았다.

81 다음은 83 수용소였다. 등에 '반공'이란 큰 글자를 쓴 옷을 입은 사람들은 글자 표시와는 다르게 북으로 가는 길을 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매를 얼마나 맞았는지 다리를 절룩거리며 차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문에 의하면 수용소 내에서 동료들끼리 사전에 집으로 갈 생각이냐 물어보고 집이 그리워 고향으로 간다고 대답하면 그를 끌어다가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북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그냥 가도록 놔두지, 왜 매를 때리나, 어차피 북으로 가려고 결심한 사람이 가지 못해 남한에 남게 되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고 그러면 남은 우리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텐데…'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은 신사답게 보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로 때리고 욕설을 해서 보내면 북한에 남은 우리들의 가족들에게도 그만한 보복이 돌아올지 몰라 걱정도 되고 마음이 아파왔다. 

거제도에 봄이 돌아왔다. 들에는 또 다시 꽃들이 피고 산천이 푸르러졌다. 우리는 날마다 수용소 안에서 놀며 세월을 보냈다. 나는 그때에 성경책을 읽고 성경공부, 영어공부, 기타 공부를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수용소 안은 매우 조용하고 친근함이 넘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를 광주로 옮긴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우리보다 81 수용소가 먼저 육지로 이동했다. 우리 82 수용소는 5월 10일경 고현리로 와서 하룻밤을 지내고 그 다음 날 배로 떠난다고 하였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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