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랑은 아프다. 아픈 것은 청춘이다. 해서 어느 학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욕 들어 먹었다. 청춘이 아파야 한다고 말한 그 이면에는 고통과 아픔을 무작정 견디라는 강압이 숨어 있다.

그건 또 하나의 억압이요 굴종을 의미한다. 우리의 가련한 청춘들에게 무작정 고통을 견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고통을 겪어야 성숙한다고, 그런 아픔을 겪어야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외치는 것은 소용없다. 송유미 시인의 말처럼, '고통 밖에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남해 노도에 갔지요.

뾰족한 가시들 다투어 허공을 할퀴고 있었지요.

구운 굴비 한 마리 올려놓고

삼단머리채 풀고 우는

한 많은 파도 소리도 있었지요.

탱글탱글 가시 손톱 끝에 피 흘리는 봄도 보았지요.

고통 밖에 없는 사랑이 사랑이냐고

- <탱자의 편지> 중에서

자연 과학자나 분석 철학자의 시각으로 대상과 언어를 조각보처럼 직조하는 시인, 송유미. 지난 2012년 벽두에 내놓은 <당나귀와 베토벤>에 이어 '기억의 형상화'를 담지하고 있는 시집을 또 하나 상재했다. 우선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다.

그건 아쟁소리였어. 바람이 옥수수밭을 파도처럼 흔들 때마다 아이들의 앙상한 팔과 다리가 탄피처럼 날아다녔어. 미친 엄니가 옥수수 밭에 불을 질렀어. 무서운 불길에 하늘이 까맣게 탔어.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 중에서

송유미 시인의 시집 표지
 송유미 시인의 시집 표지
ⓒ 김대갑

관련사진보기


왜 동화일까? 송 시인은 왜 하필이면 미친 엄니가 불을 지른 옥수수밭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그 광경을 동화라고 노래했을까? 이 시의 화자는 숯 검정을 칠한 아이들이 기차 꽁무니에 매달려 서울로 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소리의 눈물이 아쟁 소리 따라 멀어져 가는 동화. 팩트는 이런 것이다. 화자는 그 슬픈 동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이다. 옥수수밭을 흔들어 대는 바람이 주인공이었고, 아이들은 조연이었다. 화자는 그저 멀거니 구경만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외된 상태였던 것이다. 아웃사이더. 마치 이 시대 청춘들이 기성 세대가 저질러 놓은 그 무질서의 혼돈 속에서 아웃사이더가 되어 고통과 아픔을 겪는 것처럼 말이다.

송 시인의 전작, <당나귀와 베토벤>은 거울의 반대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는 여정이었다. 이제 <검은 옥수수밭의 동화>는 그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서 또 다른 자신을 더 한층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어쩌면 이번 시집은 무의식 저 너머에 있는 초자아의 세계를 그려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나귀와 베토벤>처럼 이번 시집도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에서 절창을 꼽으라면 단연코 <검은 옥수수 밭의 동화>가 될 것이다. 제2부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는 <탱자의 편지>를 유심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송 시인의 내면 세계는 어쩌면 이 두 시에 응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3부 '야곱의 사다리'에서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선형과 비선형의 세계를 다룬 <유클리드의 산보>가 한 폭의 유화처럼 펼쳐져 있다. 마지막으로 제4부 '나비의 땅'에서는 <청계천, 푸른 달을 마시다>처럼 시인의 몸이 물이 되어 푸른 달을 마시는 장면이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다.

송유미 시인은 어쩌면 사랑을 늘 갈구하는 목마른 양치기인지도 모른다. 그가 방황하는 대지에는 부처의 손끝과 예수의 관용이 은하수처럼 아련하게 흐른다. 아프니까 청춘인 것이 아니라 청춘이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맑은 영혼의 소유자. 늘 경계의 위치에 서서 관조하는 시인의 가치관은 지금 이 시각에도 검은 옥수수밭을 흔드는 바람인 것이다. 그녀는 그 바람 소리 너머 고통과 아픔을 견뎌내야 하는 청춘들에게 작은 위로 한마디 던지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참지 말고 고통이라고 말하라'고.  


태그:#송유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