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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 아저씨는 금오산 아래에서 오래 살아온 토박이여서 이곳에 얽히 사연들을 모두 꿰차고 있다.
▲ 벗나무로 디딜방아 받침대를 만들고 있는 장진수씨 장씨 아저씨는 금오산 아래에서 오래 살아온 토박이여서 이곳에 얽히 사연들을 모두 꿰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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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란 대대로 그 땅에서 태어나서 오래도록 살아 내려오는 사람을 지칭하며, 지역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1991년에 구미로 내려와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오래도록 살아온 진짜배기 토박이를 만나 지역의 옛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토박이를 만나면 내가 즐겨 찾는 금오산 인근의 유래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많이 물어 본다.

연달아 쉰 새해 연휴 탓에 뱃살이 물이 오를 때로 올라 팽팽해져 위기의식이 느껴져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형곡전망대를 지나 금오산 자연연수원 안 쪽 깊숙히 들어와 작은 산 하나를 넘어 다시 구미역 뒤편 동네를 거친 뒤 금오산 저수지 방면으로 되돌아왔다.

금오산 주차장 앞 백숙촌을 지나 형곡전망대로 달려 올라가던 중 포도원 바로 옆 가 건물 앞에서 목공 작업을 하고 있는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매번 이 앞을 지나칠 때마다 누가 이 포도원을 관리하는지 궁금했다.

특별히 목공기술을 배우시지 않으셨다지만 나무 결을 살려 다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 버린 목재를 이용해 장식용 디딜방아를 제작중에 있다. 특별히 목공기술을 배우시지 않으셨다지만 나무 결을 살려 다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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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작업에 몰입해 있는 아저씨가 한 숨 돌릴 짬을 기다렸다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벗나무와 대추나무로 디딜방아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포도원의 주인이고 4대째 이곳 금오산 아래에서 살아왔다는 장진수씨는 올해 69살이란다. 몇 달 전에 취재했던 금오산 정상 부근에 있는 성안마을이 떠올랐다. 지금은 성안마을은 사라지고 성안습지로서 유명해진 곳이었지만, 1977년도까지는 사람이 살던 곳이다.

취재 당시 성안마을 사람들의 일부는 산아래로 내려와 지금의 금오산 주차장 옆에 있는 닭백숙촌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나 장씨가 성안마을 토박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금오산 성안마을에 대해 기사를 쓴 후 대구KBS방송의 한 프로그램에 섭외되어 금오산 성안 마을을 안내하는 역할로 TV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하니, 장씨 아저씨는 금오산 주변의 모든 일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포도원 옆 가 건물로 나를 안내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 씨 아저씬 성안마을에서 살지 않았다고 하신다.

장씨는 자신이 금오산 가수라며 지난해 11월에 음반으로 만든 '아 구미 금오산'이라는 노래를 틀어 주었다.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했다는 이 노래 가사에는 실제로 금오산 언저리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담겨져 있었다.

명산인 금오산을 알리는 노래가 없어 아쉬움에 음반을 제작하셨다고 한다.
▲ '아 구미 금오산'이라는 노래를 직접 작사.작곡했고 음반을 틀어주셨다. 명산인 금오산을 알리는 노래가 없어 아쉬움에 음반을 제작하셨다고 한다.
ⓒ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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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아 금오산에 고요한 밤이면..."으로 시작하는 금오산 노래는 마치 <신라의 달밤>과 같이 몽환적이면서도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노래다. 가사에는 금오산에 있는 도선굴이며, 야은 길재 선생의 채미정을 비롯해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차례대로 이어져 나왔다.

장씨가 이 음반을 낸 이유에 대해 "우리나라 대부분의 명산들은 그 명산에 대한 노래가 다 있어, 그런데 절경인 우리 금오산만이 노래가 없어서 내가 만들었지!"라고 말한다. 정식음반은 아니고 개인 소장용인 음반이었지만, 금오산 아래에서 금오산을 사랑하는 토박이의 애틋한 마음과 사연이 담긴 노래라는 느낌과 함께 심금을 울리는 여느 트로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잔잔한 애절함이 서려 있었다.

이외에도 다섯곡이 CD에 더 실려있다고 하셨지만 '금오산'에 관한 노래를 듣고나니 제대로 된 토박이를 만난 느낌이 들어 이것저것 물어볼 것들을 떠올리며 얘기를 나눴다. 장씨는 담근지 20년 된 포도주도 있다며 한 잔 마시기를 권했고, 하루 종일 달려 허기졌는지라 내심 속으로 기쁜 마음에 포도주를 맛나게 마시며 나름 포도주에 대한 품평도 했다.

비닐 하우스를 개조한 가 건물 내에는 다양한 크기의 항아리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속에는 포도주 외에도 감식초 등은 발효제를 넣지 않고 장씨만의 방식으로 숙성시켜 상품화해 판매하고 있다며 제품의 효능에 대해서도 자신감 있게 알려준다.

장 씨 아저씨는 포도주가 숙성되듯 한 곳에서 오랜시간 머무르며 금오산과 함께 인생을 살아와 금오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신다.
▲ 20년 숙성된 포도주와 각종 과실 원액들이 저장된 항아리 장 씨 아저씨는 포도주가 숙성되듯 한 곳에서 오랜시간 머무르며 금오산과 함께 인생을 살아와 금오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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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1976년에 구미 금오산 아래 최초의 백숙집을 만들었고, 자신이 원조라며 지나간 옛 이야기들을 하나 둘 씩 꺼냈다.

"이곳이 개발되기 전에 내가 키우던 토종닭으로 백숙을 만들어 조금씩 팔았는데 공단지역에 소문이 나서 회식하러들 많이 오다보니 백숙집을 차리게 되었지"라며 "내가 이곳 백숙집 최초로 봉고차를 사서 손님들을 태워주며 장사했지. 그후론 다른 집들도 모두 날 따라했고"라는 사실을 알리며 금오산 아래 식당가들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장씨가 말하길 1990년 전까지는 이곳 백숙집들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후부터 개발되어 현재의 금오산 아래 주차장 부근의 식당가들이 생겨나면서부터는 예전만 못했고 이곳 토박이 주민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해 백숙집을 운영하던 옛 토담집은 모두 헐렸고, 장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개발하는 곳의 땅을 사야만 했고, 새마을금고에서 대출을 받아 건물을 짓는 등 금전적인 부담을 크게 떠 안게 되었다고 했다.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 전부 마음에 안 들어. 옛적 토담집들을 그대로 두고 있는 그대로 개발했으면 지금은 더욱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라며 옛적 일이 떠올라 못내 아쉬운 마냥 혀를 끌끌 찼다. 더불어 "마을 사람들이 백숙집 장사를 하기 위해 거액을 대출 받아 건물 짓느라 수십년 동안 돈 갚느라고 고생만 하다가 세월이 다 가버렸어"라고 말했다.

장씨는 농사 지을 땅도 없어 하늘만 쳐다보고 살던 사람들이 무슨 돈벌이가 있었겠냐며 어렵게 살았던 옛 일들을 회상했다. 금오산 주변의 일들에 대해 잘 아는 장씨에게 금오산 아래 경북환경연수원에서 500미터 가량 올라가면 위치해 있는 금오산 아래 유일한 초가집의 유래와 살던 인물에 대해서도 궁금해 물어보았다. 역시나 막힘이 없이 옛적의 일들을 술술 말해 준다.

1980년대 초까지 살았던 이곳 초가집의 주인인 김차경 할머니는 다재다능했던 분이고 풍물놀이에 능하셨던 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옛적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보존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누나의 이름과 똑 같아서 늘 관심이 가는 곳이다. 게다가 이름이 영향을 끼치는지 김차경 할머니는 풍물놀이에 조예가 있으셨고 현재 우리 누나 또한 공연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 경북환경연수원 방면에 위치한 김차경 할머니 초가집터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옛적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보존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누나의 이름과 똑 같아서 늘 관심이 가는 곳이다. 게다가 이름이 영향을 끼치는지 김차경 할머니는 풍물놀이에 조예가 있으셨고 현재 우리 누나 또한 공연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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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금오산 주차장에서 형곡전망대까지는 도로가 잘 나있지만, 내가 구미에 처음 왔을 당시에는 계곡물만 흐르던 산골짜기였다. 1992년에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오토바이를 장만했던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계곡물 옆 조그만 길을 따라 현재의 법성사 인근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은 곳에 절이 들어서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웠던 기억이 있다.

법성사에 대해 물어보니 역시나 잘 안다. 장씨는 젊은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법성사를 짓기 위해 벽돌을 날랐다며 법성사를 지은 장본인이라고 한다.

1962년 7월 해운사 주지로 부임한 지우 스님이 현 절터에 토굴을 마련하여 수행한 것이 법성사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경내에 통일신라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좌상을 보수하여 봉안하고 있으며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 금오산 아래 법성사 1962년 7월 해운사 주지로 부임한 지우 스님이 현 절터에 토굴을 마련하여 수행한 것이 법성사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경내에 통일신라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여래좌상을 보수하여 봉안하고 있으며 약사여래좌상에 대한 조사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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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장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고, 얘기를 듣다보면 금오산에 대해 살아있는 역사의 뒷편 이야기를 양파껍질 벗겨 내듯 들을 수가 있으리란 확신이 들기도 했다.

장씨는 법성사를 거쳐 형곡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이 개발되기 전에 도로 내기를 반대했었다는 사연을 얘기하며, 만약 장씨의 의견대로 현재 길이 아닌 계곡을 가로질러 산쪽으로 길을 냈더라면 계곡물 흐르는 것도 잘 관람할 수 있고, 관광지로서 볼거리를 풍부히 만들었을거라며 아쉬움도 털어낸다.

장 씨 아저씨는 금오산이 무분별하게 개발되던 것을 반대했던 이야기와 옛적 금오산 아래 초가집 풍경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 도로가 나기 전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 해주는 장 씨 아저씨 장 씨 아저씨는 금오산이 무분별하게 개발되던 것을 반대했던 이야기와 옛적 금오산 아래 초가집 풍경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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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듣다보니 차츰차츰 금오산 토박이 장씨는 금오산과 함께 평생을 유유자적히 살아온 분이라는 생각이 들게된다.

수년 전까지 계곡가든이라는 백숙집을 오랫동안 운영해 오며 금오산과 함께 살아온 장씨는 구미시평생교육원에서 아코디언과 노래 등을 배워 노래봉사도 다니며 남은 여생을 살아가고 있다. 백숙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넘긴 후로는 이곳 포도원에 이따금 들러 소일거리를 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단다.

지나가던 길에 장씨를 만나 새로운 인연의 고리를 만들게 된 나로서는 이 다음에 다시 들러 금오산에 대해 더 많은 사연들을 청해 듣고 싶다는 말과 함께 다시 보기를 희망했다. 나는 또다시 형곡전망대 너머 집을 향해 달려갔고, 법성사를 지나치며 장씨의 옛 시절의 이야기가 떠올라 다시금 법성사를 힐끔 쳐다보며 산을 넘어 가게된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유통신문>과 <한국유통신문>의 카페와 블로그에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금오산자연농원, #금오산 장진수 가수, #한국유통신문 오마이뉴스 후원, #구미김샘수학과학전문학원 이꽃임 수학선생, #금오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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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빨간이의 땅 경북 구미에 살고 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체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우리네 일상을 기사화 시켜 도움을 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힘이 쏫는 72년 쥐띠인 결혼한 남자입니다. 토끼같은 아내와 통통튀는 귀여운 아들과 딸로 부터 늘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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