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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 둔화루 통더라이(彤德莱). 일 인당 평균 50위안(한화로 약 1만 원)이면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훠궈(중국식 샤브샤브) 체인점이다. 체인점답게 정갈한 편이고, 20대 전후반의 종업원들은 동작이 빠릿빠릿하다. 연기와 열기, 소음으로 가득한 실내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다행히 방 하나가 남아 있다. 나와 함께 간 여학생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다.

방 안 창가에 자리 잡은 나는, 식탁에 둥그렇게 앉은 여학생들과 그 옆에 서 있는 여종업원을 바라본다. 윤기가 흐르는 여학생들은 훠궈 탕 종류를 고르고 고기와 야채, 해산물, 면류, 음료수를 주문하느라 입이 바쁘다. 바싹 메마른 여 종업원은 장난감 휴대폰 같은 기계에 주문 내용을 입력하느라 손이 바쁘다.

여 종업원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훠궈 재료가 익는 동안, 여학생들은 3학년을 마친 소감과 곧 시작될 방학 이야기로 수다가 한창이다. 그들 중에서 한국어를 가장 잘 하는 Y는 한국에서 교환 학생으로 1년간 지낼 생각에 들떠 있다. 다른 네 명의 학생들도 한중 건축 워크숍 때문에 서울에 가게 되어 싱글벙글이다. Z는 한국에 가면 '건축보다 닉쿤'이라며 기대가 대단하다. 다른 학생들은 쇼핑할 목록을 늘어 놓는다. 공부 욕심이 많은 J는 벌써부터 대학원 시험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풋풋한 청춘들이 재잘거리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싱그럽고 예쁘다.

중국 철도 교통의 요충지 정저우역. 중국 대륙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역인만큼,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거나 명절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농민공들이 거쳐 가는 장소이다.
 중국 철도 교통의 요충지 정저우역. 중국 대륙의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역인만큼,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거나 명절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농민공들이 거쳐 가는 장소이다.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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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참 부럽다"

"이제 먹어도 돼."

여 종업원의 말에 여학생들은 부리나케 젓가락을 훠궈 속으로 집어넣는다. 내숭 없는 아이들이라 거침없이 폭풍흡입이다.

"너희들은 몇 살이니?"

여 종업원이 새우 접시를 올려 놓으며 묻는다.

"21살이야."

Y가 대답한다.

"너는?"

내가 여 종업원에게 묻는다.

"19살."

어쩐지 어려 보인다 싶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신입치고 일을 참 잘하네."

내가 살짝 칭찬을 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해산물 완자를 뚝뚝 떼어 훠궈 탕 속으로 집어넣는다.

"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했는데... 너희들이 참 부럽다."

여 종업원이 느릿느릿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부럽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또래에 대한 질투나 시기심이 없다. 그 표정은 뭐랄까, 그냥 멀찍이 떨어져 남 이야기 하듯,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평온한 체념 같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그녀는 인사를 하고 빈 접시들을 챙겨 나간다.

"..."

여학생들은 잠시 말이 없다. 젓가락질 속도도 느려진다. 방 안 공기가 텁텁하고 무거워진다.

"메이빤빠" 힘 없는 그들의 목소리

삶을 다 산 듯, 세상이 다 그런 거라며, 허무의 냄새까지 풍기는 20대들이 있었다. 동네 마트 점원과 단골 식당 종업원들은 젊음의 기운 대신 지치고 무기력한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살짝 "힘들지?" 말을 걸면 한결같이 "메이빤빠(没办法, 어쩔 수 없다, 방법이 없다)"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그들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내 제자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르게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손님이 뜸한 시간에 가 보면 이야기라도 좀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들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공산품 외에 쌀과 계란, 부식거리까지 파는 동네 마트 여 점원들은 그것들을 팔기 좋게 다듬고 진열하느라 바빴다. 그들이 들락날락하는 어두컴컴한 창고 구석에 낡은 철제 이층 침대와 구깃구깃 뭉쳐진 이불이 보였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는 썰렁한 계산대 앞에서 십대 후반의 여 점원이 파리한 얼굴로 쏟아지는 잠과 싸우고 있었다. 오후 두 시쯤 손님이 빠진 식당에는 어린 종업원들이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내 호기심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곳은 회식 후나 몸이 찌뿌드드한 날 어울려 가는 발마사지 업소였다. 그곳 직원들은 스스럼없이 한국 드라마 이야기며 한국인의 생활 수준을 종알종알 묻곤 했다.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정해진 시간 동안 남의 발만 마사지하기가 지루하고 어색하기 때문인 듯했다. 그 참에 나는 그들을 상대로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게 됐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온 시골 출신들이었다. 연령대는 대부분 20대, 간혹 10대 후반과 30대도 있었다.

"넌 꿈이 뭐니?"

내가 하는 첫 번째 질문은 항상 똑같았다.

"꿈?"

그 단어를 처음 들어본 듯 눈을 껌벅껌벅하다가 그들이 내놓는 대답도 한결같았다.

"돈!"
"여기서 이 일을 하면 얼마나 벌 수 있니?"
"보통 한 달에 2500위안에서 3000위안 정도 벌고, 춘제(春节, 중국의 설)때는 손님이 많아서 4000위안 넘게 벌어."
"매일 춘제 같으면 좋겠네?"

꿈이 돈이라기에 그렇게 물었다.

"그렇게 되면 죽을지도 몰라, 힘들어서. 그런 날에는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물만 마시면서 버텨. 다른 사람의 피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 몸은 골병이 들어. 이 일이 얼마나 중노동인데..."
"그럼 다른 일을 찾지 그래? 공장에 취직해서 기술을 배우고, 경력이 쌓이면 한결 낫지 않겠어? 요즘 그런 곳(공장)은 사람 구하기 힘들어서 월급도 많이 올랐다던데..."
"지금 당장은 월급이 오른다 해도 앞으로 중졸에게 얼마나 기회가 있겠어? 그리고 요즘 누가 공장에서 일하려고 해? 안 가는 이유가 다 있다고. 기술도 기술 나름이고, 그런 데서 평생 썩고 싶은 생각은 없어. 여기 일하는 사람 중에도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온 사람도 많아. 그나마 이 일이 단기간에 돈 벌기는 제일 낫거든. 웬만한 대졸자 월급은 되니까. 보험 같은 게 없어서 탈이긴 하지만. 그래서 다들 서른까지 바짝 돈을 모아서 다른 일을 하려고 해."

꿈? 돈!... 휘어진 새끼 손가락이 말해주는 것

척박한 시골로 돌아가는 것보다 도시 생활이 좋다는 신세대 농민공.
 척박한 시골로 돌아가는 것보다 도시 생활이 좋다는 신세대 농민공.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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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은 어떤 것?"
"작은 식당이나 장사를 하려는 사람이 제일 많지만, 갈수록 힘들어져. 점포세가 너무 올라서."
"차라리 나중에 같은 일 하는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서 작은 마사지 가게를 차리는 건 어때? 그래도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그것도 옛날 말이야. 요즘 손님들은 구멍가게 같은 업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번쩍이는 체인점을 더 좋아하지. 체인점도 이젠 워낙 많아져서 경쟁이 얼마나 심한데. 어디든 우리 같은 사람이 끼어들 곳은 없어. 또 이 일을 나이 들어서까지 하려는 사람도 없어. 보라구, 이 손들. 마디마다 작은 혹이 있지? 새끼 손가락은 아예 휘어져 버렸어. 손만 보면 우리 직업을 알 수 있다니까."

그들의 손가락 마디에는 지압하느라 튀어나온 티눈 같은 작은 혹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이 일 하면서 가장 힘든 게 뭐야?"
"무시 당하는 거. 요즘은 덜하지만 가끔 우리를 깔보고 막 대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 날은 정말이지 당장 그만두고 싶다니까."

농민공, 그들의 눈물

그곳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시골 출신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온 농민공(农民工)이었다. 최종 학력은 중졸이 많았고, 제대로 중학교를 다닌 사람도 드물었다. 그들은 대개 집안일 거드느라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겨우 졸업장만 받은 후 도시로 나왔다.

처음에는 공사장이나 공장, 식당에서 일하다가 마사지가 돈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학원에서 서너 달 배운 후 일을 한단다. 마른 수건을 짜고 또 짜듯 생활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가르치는 중국 대학생들이 떠올랐다. 또래의 삶이 어쩌면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그것도 노동자가 주인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말이다.

그들은 월급을 받으면 생활비로 700위안 정도를 쓰고 나머지는 저금하거나 고향집으로 부친다. 여대생이 파마와 염색 한 번 하는 돈으로 한 달 생활을 하는 셈이다. 6위안짜리 란저우(兰州) 라면 한 그릇값이 아까워서 매일 사 먹을 수도 없다. 업소에서 대주는 공짜 음식은 맛도 없지만 양이 적어 돌아서면 배가 고프다. 남녀로 구분된 합숙소는 잠만 잘 수 있도록 철제 이층 침대들로 빼곡하다.

그곳에 온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안쪽 침대를 쓰지만, 새로 온 사람은 문 바로 앞 침대를 배당받는다. 체취, 코 고는 소리, 잠꼬대, 하나 있는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그나마 결혼을 안 했으니 합숙소에라도 들어올 수 있다. 한 업소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사람은 드물고, 대개 2년마다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닌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으니 그들은 어느새 자기 연민이 일어나는지 한숨을 내쉬면서 연신 "메이빤빠"를 내뱉는다.

농민공의 역사는 개혁 개방과 더불어 시작됐다. 중국 정부가 집중적으로 개발했던 동부 연해 지역과 경제특구 도시들, 특히 광저우, 선전, 주하이가 있는 광둥성은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도시화, 산업화, 공업화가 진행될수록 농촌은 주요 정책에서 소외되어 살기가 어려워졌다.

도시와 농촌의 필요에 따라 이농 현상이 일어났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농민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공장 노동자, 건설 현장 인부, 식당 종업원, 가정부였다. 농민공의 값싼 노동력은 중국이 국제 시장에서 다른 국가가 따라올 수 없는 경쟁력이었다. 그 덕에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세계 각국으로 중국 제품을 수출하게 됐다. 농민공은 그런 중국의 역군임에도 그들의 삶은 줄곧 척박했으며 온갖 차별에 시달려왔다.

도시민과 농민 구분하는 '후커우 제도'

고급 음식점과 거리가 먼 서민들이 한 끼를 때우는 길거리 음식점
 고급 음식점과 거리가 먼 서민들이 한 끼를 때우는 길거리 음식점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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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차별은 신분과 거주지를 증명하는 '후커우(户口)'제도다. 후커우는 1958년 마오쩌둥이 '후커우 등록 조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전 국민을 도시민과 농민으로 구분하고 거주 이전을 통제했다. 기본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거의 불가능했고, 특히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아이는 부모의 후커우를 물려받았다.

후커우 문제는 개혁 개방 이후 이농 현상이 심해지면서 터지기 시작했다. 도시로 몰려든 농민공은 농촌 후커우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도시 후커우를 가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취업, 교육, 의료, 주택, 양로, 각종 복지 혜택에서 제외되고 임금도 훨씬 낮다. 그 중에서 교육 차별은 농민공의 대물림 현상을 낳고 있다. 도시에서 농민공의 자녀는 정식 공립학교에 다니기 어렵고, 때로는 별도의 수업료를 더 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농민공의 자녀는 부모와 떨어져 호적지에서 조부모와 살거나, 도시에 살더라도 교육의 질이 한참 떨어지는 '농민공 학교'에 다닌다.

차별적인 후커우 제도가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중국 정부는 사회 통합뿐 아니라 더 많은 농민을 도시로 끌어 들여 도시화율을 높이기 위해서 후커우 제도를 개혁하려 하고 있다. 실각한 보시라이가 서기로 있었던 충칭시는 2010년에 농민공 300만 명을 선별해 충칭시 후커우를 줬다. 같은 해 광둥성에서도 60명의 농민공이 도시 후커우를 받았다. 하지만 그 숫자는 새발의 피다. 사실 전국적으로 후커우를 개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다. 지방 정부 입장에서는 주택을 포함해 각종 사회 보장 예산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도시 후커우를 가진 기득권층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개혁개방이 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농민공 내부에도 세대 차이가 생겼다. 농민공 1세대는 밑바닥에서 온갖 험한 일을 하면서 고용주에게 착취를 당하고 살았다. 그들은 하루 빨리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집을 짓고 다시 농사일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빨리 벌어서 도시를 뜨는 것이 소원이었던 농민공 1세대는 장기적인 근로 조건에 대한 인식이나 권리 의식이 약했다. 임금 체불로 고향에 갈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시위나 파업을 벌였지만 정부는 사회 질서를 해친다며 농민공을 억압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인 신세대 농민공은 다르다. 일단 그들은 농사 경험이 적고 1세대와 달리 도시 생활을 지향한다. 계속 도시에 살기를 원하지 가난하고 답답한 농촌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중졸이지만 부모 세대보다 학력이 높은 그들은 먼지 풀풀 날리는 공사장이나 단순 노동이 반복되는 공장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왕이면 도심에서 덜 힘들고 더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고, 또래처럼 가끔은 멋도 내며 소박하나마 도시 생활을 즐기고 싶어한다.

그동안 1세대 농민공과 신세대 농민공이 일하는 여건도 달라졌다. 중국의 산업 구조가 중공업과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개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신세대 농민공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처지도 아니다. 컴퓨터를 아는 젊은 신세대 농민공은 인터넷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악덕 기업주를 고발한다.

그들은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고 보다 나은 근로조건을 얻기 위해 단결하고 파업을 한다. 여론이 형성되면 정부도 예전처럼 농민공을 마구잡이로 탄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농민공이 수만 명 이상 일하는 곳에서나 드러난다. 공장이 밀집된 광둥성에서 대규모 시위 사태가 일어나야 언론에 나오는 식이다. 해당 업체가 외국 기업이 아니면 인터넷 감시 경찰이 여론을 차단한다.

관광도시인 칭다오에서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농민공은 소규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모래알과 같은 존재들이다. 칭다오 외곽에 공장 지대가 있지만 젊은 농민공은 도심으로 몰려들고,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일터에서 문제가 생기면 '메이빤빠'를 읊조리며 홀로 이직을 하고 만다.

그렇게 조직이 없는 농민공과 취약 계층은 무력하고 외롭다. 여기저기서 얻어터져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다. 악에 받친 사람들은 자해 등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표출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농민공들도 있다. 그들이 저지른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 사람들은 지탄을 퍼붓지만, 정작 그들에게 범죄를 가르쳐 주고 죄책감마저 못 느끼게 해 준 것은 궁핍한 도시 생활과 사회적 차별이다. 노동자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주의 국가, 그곳에서 농민공은 같은 중국인이면서도 이민자처럼 살고 있다.


태그:#신세대농민공, #칭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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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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