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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물매화, 높고 깊은 천황산에서 자란 고귀한 꽃이다.
 물매화, 높고 깊은 천황산에서 자란 고귀한 꽃이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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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동 학살사건

1920년 10월, 일본군은 이른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그들은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에서 조선독립군 초멸(剿滅)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독립군 활동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인 사회에 잔혹한 탄압을 가하는 동시에 조선 독립군의 모체인 항일단체·학교·교회 등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무고한 조선인 학살과 조선인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일본군들은 서간도, 북간도 전역의 조선인 부락을 구석구석 습격하여 방화할 뿐 아니라, 그들 마음대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지목해 무장하지 않은 조선인조차 참살하기도 했다.

장암동(獐巖洞)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용정에서 시오리 가량 떨어져 있는 산비탈 마을로 1909년부터 조선인에 의해 개척되었는데 그 일대에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 되었다. 이 마을 주민은 대부분 기독교인들로 우리 독립군을 후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불 타기 전의 명동학교와 학생들
 불 타기 전의 명동학교와 학생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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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운 명동학교(1999. 8. 촬영)
 다시 세운 명동학교(1999.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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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곳의 영신학교(永新學校)는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의 온상으로, 1919년 용정 3·13 만세 운동 때도 영신학교 교직원들은 장암동 주민들과 함께 반일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장암동을 불령선인 진원지의 하나로 간주하고 호시탐탐 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20년 10월 30일,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4사단의 스즈키(鈴木) 대위가 인솔하는 보병 72명, 헌병 3명, 경찰 2명은 남양 수비대와 합세하여 6시 30분경 장암동 마을을 포위하였다. 이들은 마을 전 주민을 협박해 교회 마당에 모았다. 그 가운데 청·장년 33명을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강제로 교회 안에 가두고 타작도 하지 않은 조 짚단을 교회당 안에 채운 뒤 석유를 뿌리고는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곧 불길에 휩싸였다. 일본군은 군도로 불길을 못 이겨 밖으로 뛰쳐나오는 청·장년들을 현장에서 모두 찔러 죽였다. 가족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그들이 돌아간 뒤 숯덩이가 된 시체를 찾아 겨우 염을 하여 장사 지냈다.

야수 같은 일본군은 며칠 뒤 다시 장암동 마을로 찾아왔다. 그들은 자기들의 만행 증거를 없애고자 유족들을 모아놓고 무덤을 파서 시체를 한 곳으로 모으게 했다. 그들은 그 시체 위에다 조 짚단을 다시 쌓아놓고 석유를 부어 불을 지르고는 시체를 뒤적이며 재가 되도록 소각해 버렸다.

이렇게 이중으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유족들은 그들이 물러간 다음, 시체를 가릴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33인 합장 무덤을 만들었다. 이 밖에도 연길현 의란구, 화룡현 송인동 등 경신년 그해 잔인한 학살 현장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일본군은 아주 악질적으로 조선인 부녀자를 잡으면 으레 강간 후 살해하였다.

다시 세운 명동교회(1999. 8. 촬영)
 다시 세운 명동교회(1999.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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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의 피해

1920년 10월 20일 시로다(白田) 중위가 인솔하는 22명의 토벌군은 용정의 명동촌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한편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날 아침, 그 전투에서 참패하고 내려오던 일본군 패잔병들은 백운평 마을을 덮쳐 주민들을 무참히 보복했다. 백운평 마을 사람들이 독립군들에게 밥을 해서 날라다 주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부흥향 청산리마을 표지석(1999. 8. 촬영)
 부흥향 청산리마을 표지석(1999. 8.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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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들은 청산리 백운평 마을의 사람들을 한곳에 세워다 놓고, 그 중 남자들이라면 젖먹이 아이들까지 모조리 학살하여 불태워버렸다. 이 마을 주민 중에서 단 한 사내만 살아났는데, 그는 여자 옷차림으로 변장해서 간신히 죽음을 모면했다.

경신참변으로 조선인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임시정부의 간도 파견원이 보고에 따르면 1920년 10월, 11월 두 달간 피해만 해도 인명 피살 3600여 명, 체포 150여 명, 불에 태워진 집 3500여 동, 학교 59개교, 교회 19개, 곡물 5만 9천여 석이 불타버렸다. 당시 장암동 마을 참상을 목격한 한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을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했다.

1920년 10월부터 시작한 일본군의 경신 만행은 12월 말까지 3개월간 집중적으로 저질러졌고, 그 후에도 잔류 부대가 남아 이듬해 5월 말까지 이어졌다.

이와 같은 참변은 북간도를 침입한 일본군 토벌대에 의하여 북간도 전역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서간도 지방에서도 '중일 합동수색'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 5월부터 자행되었다.

한편 독립군 단체는 1920년 연말에 국경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하여 흑룡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갔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우리 독립군들은 거의 궤멸 당하는 수난을 겪었고, 그로 인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무장 독립 투쟁 노선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경신참변은 우리 독립 운동사의 최대 비극으로, 이후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다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역에서 숨을 거뒀다. 

개원현 이가태자

경신년 그해는 심한 가뭄으로 씨도 뿌리지 못한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제 토벌대가 서 북간도 일대를 휩쓸어 그곳에 살던 애국지사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선 독립가족단들은 봉천성을 벗어나고자 길림성 오상현, 영안현이나 흑룡강성 등으로 발길 닿는 대로 뿔뿔이 망명 도주했다.

허형식 큰집은 영안현 철령허로 갔지만, 아버지 허필은 위기 땐 가족단이 분산하는 게 이롭다고 마칠봉 가족과 함께 우선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로 갔다. 그때 허형식 나이 12세였고, 춘옥이는 14세였다.

전혀 새로운 세상이 두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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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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