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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 P(39·필리핀)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내러티브 리포트(Narrative Report)입니다.... 기자주

필리핀에서 20년, 한국에서 20년. 나는 반(half) 한국인이다.
▲ 건설 현장에서 미스터 봉 필리핀에서 20년, 한국에서 20년. 나는 반(half) 한국인이다.
ⓒ 노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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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었다

창문을 열자 겨울 냄새가 밀려 들어온다. 고향에선 느낄 수 없었던 찬 공기에 코끝이 시리다. 나뭇잎 위에 하얗게 내린 서리가 여전히 낯설다. 일이 없는 토요일이지만 사장님의 잔업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젯밤 먹다 남은 김치찜으로 아침을 대충 해결한 뒤 문밖으로 나선다. 작업 현장은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다.

'오늘 아침 서울 기온은 영하 8도,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씨입니다.'

라디오 소리를 들으며 버스에서 내린다. 찬바람에 얼어붙은 다리가 더디게 움직인다.

"그렇게 입고 안 추워? 어째 나보다 더 추위를 안 타는 것 같아."

먼저 도착한 동료 임씨가 얇은 점퍼를 가리키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한국에 들어온 첫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반팔이 익숙했던 몸은 이국땅의 낯선 날씨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찬물 샤워는 고문에 가까웠다. 웃풍이 들어오는 고시원에선 이불 10개를 덮고 버텼다. 연탄이 유일한 난방 수단이던 그곳에서 내게 연탄 사용법을 알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불법 사람'의 빨간 목장갑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해 용접과 목공 일을 배웠다. 건설 현장에서 목수로 일한 지 10년째다. '불법 사람'이지만 불안하진 않다. 출입국 관리소 직원은 암묵적으로 단속하지 않는다. 우리 없이는 공장도 현장도 돌아가지 않으니까.

망치를 든다. 간만의 주말 근무가 졸음을 몰고 온다. 10년 전, 18시간 근무도 버텨냈지만 세월과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보다. 몽롱한 정신에 그만 손가락을 내리찍는다. 빨간 고무가 덧대진 목장갑이 붉게 물든다. 동료 유씨의 시선이 장갑으로 향한다.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다. 손톱이야 빠지고 다시 나는 거니까.

지혈하러 휴게실로 간다. 박 사장은 치료비를 줄 테니 병원에 가라고 말한다.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불법 사람'은 건강보험 대상자가 아니다. 사장이 구급함을 건네준다. 작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내게 고향에 다녀오라 했다. 그러나 체류 기간이 지난 '불법 사람'은 이동할 자유가 없었다. 고국에 들어간다는 건 한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눈물을 삼키며 사장이 빌려준 장례비를 송금했다.

물론 좋은 사장님만 있는 건 아니다. 10년 같이 일한 이 사장은 밀린 임금 1500만 원을 끝내 주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나를 기다리는 10명의 6개월치 생활비가 한순간에 날아갔다. 고용노동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불법 사람'의 말엔 힘이 없었다. 회사가 파산했다는 이유로 이 사장은 5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10년간의 믿음도 그렇게 끝이 났다.

1,500만 원 임금을 떼인 이후 매일 노동시간과 일당을 수첩에 기록하고 있다.
▲ 노동 기록 1,500만 원 임금을 떼인 이후 매일 노동시간과 일당을 수첩에 기록하고 있다.
ⓒ 노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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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얻다

반창고를 붙이며 바라본 손이 낯설다. 곳곳의 굳은살과 생채기들이 지나온 세월을 대변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손이 거칠었던 건 아니다. 한국에 오기 전 필리핀 비사야 주립대학에서 법을 공부했다. 부모님의 이혼 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평일에는 도서관에서 사서로, 주말에는 망고 장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수입이 생기자 동생들이 하나둘씩 학교에 나갔다. 환해진 가족들의 표정을 보자 더 큰 돈을 벌고 싶었다. "빨리빨리 일하면 돈은 많이 벌 수 있어." 한국 공장에서 일하던 친구의 말에 솔깃했다. 당시 임금 차이는 7배였다. 나는 법을 버리고 '불법 사람'이 되기로 했다.

1995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낯선 한국인들은 낯선 이방인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막한 공기가 맴돌았다. 마늘 향이 가득한 공기 속에 필리핀 냄새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했다. 내 것을 버리고 그들의 것을 취해야만 했다.

코가 익숙해지자 김치를 먹을 수 있었고, 한국인과 식판을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늘어나는 식사 횟수만큼 한국어 실력도 늘어갔다. 필리핀 문화를 포기하자 '적응 잘한 이주자'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뱉어내는 욕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이름이 아닌 '새끼'로 부르는 그들을 향해 따지기도 했다.

"사장님 욕 좋은 거예요? 나쁜 건데 왜 자꾸 나한테 말해요?"

소리치고 대들면 잠시 누그러질 뿐이었다. 반복되는 작업만큼 되풀이되는 욕설에 지쳐 버렸다. 그렇게 나는 욕과의 전쟁에서 백기를 들었다.

푸른 하늘 저편에는

작업을 마친 후 아무도 반기지 않는 집에 들어선다. 사진 속 웃고 있는 아내와 딸들이 눈에 들어온다. 2000년 2월 23일, 아내를 처음 만났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아내가 한국에서 맞은 첫 번째 생일이었다. 첫눈에 반한 우리는 1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딸이 왔다. 때마침 스카이프(무료 영상통화) 알림음이 울린다.

오늘도 우리는 스카이프를 통해 만난다.
▲ 가족사진 오늘도 우리는 스카이프를 통해 만난다.

14살 사춘기 소녀는 학교 생활을 들려주느라 바쁘다. 문득 눈앞의 딸아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살을 맞댄 기억이 까마득하다. 30일, 딸과 함께 보낸 시간이다. 데유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없었다. 무국적자가 되기 전 필리핀에 보내야 했다. 엄마 없이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2004년 아내도 한국을 떠났다.

그 후 우리가 공유하는 추억은 없다. 영상으로 안부를 물을 뿐이다.

"아빠 언제 와? 보고 싶어."

아빠 품이 그리운 아이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곧 갈게. 우리 딸 먹고 싶은 거 없어?"하고 화제를 돌리는 것밖에 없다.

"사랑해" 인사를 끝으로 홑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누웠다. 적막감과 공허함이 방안을 채운다. 내일은 일요일, 혜화동 성당에 가는 날이다. 성당 길목에서 열리는 '리틀마닐라' 시장을 떠올리자 어렴풋이 고향 냄새가 난다. 타갈로그어를 쓰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며 눈을 감는다.

'Magandang gabi(잘 자요)'.

[한국살이 20년, 경계인의 삶 ②]

덧붙이는 글 | 20대 청춘! 기자상 응모글



태그:#불법 사람, #이주노동자, #미스터 봉, #경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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