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영학'이라는 대기업의 논리를 비판하는 글을 쓴 적 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라는 미명 아래 구조조정에 노출된 노동자,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과 임금 등의 처우가 다른 비정규직, 일을 하다 다쳐도 사각지대로 내몰리기 십상인 파견 근로자는 까무룩 숨겨두고 이윤 극대화만을 외치는 뻔뻔함을 자못 비장하게 지탄한 글이었다. 그 글을 읽은 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 예로 든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이 그렇게 사는 이유에는 개인의 탓도 있지 않겠느냐."

그들이 '그런 일'을 하며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열심히 살지 않은 그들의 잘못이지 어째서 기업 혹은 사회의 책임이냐는 물음이었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란 착각에, 미처 예상치 못한 반론이 나오자 나는 당황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무어라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그때 진짜 하고 싶었던 대답은 '가난이 게을러서'라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었다. 빈곤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성원이 함께 대처해야 하는 사회 문제임을 말하고 싶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도저히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들이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한 번 남에게 폐 끼친 일이 없었다는 세 모녀가 빈곤을 오롯이 개인의 문제로 감내하며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그것으로 모자라 마지막 월세를 넣은 봉투 위에 두 번씩이나 눌러쓴 '죄송합니다'를 보고 슬펐다기보다 차라리 분노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빈곤은 사회정책을 통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는 이 책의 목소리가 그래서 반가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상처를 남긴 이유>(김윤영,정환봉 공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상처를 남긴 이유>(김윤영,정환봉 공저)
ⓒ 북콤마

관련사진보기

국민 개개인의 빈곤은 사회정책을 통해 충분히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최후의 사회안전망인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올바르게 개선하면 국가가 국민에게 보장하는 기초생활은 충분히 가능하다. 빈곤은 국민 개개인이 게을러서 생기는 잘못이 아니다. 개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사회구조적 산물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해결해야 하는 '사회문제'다.(p.209)

이 책은 '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세 모녀에 대한 비난이 온당한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남을 해석하기 마련이기에 그들이 처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 모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냉혹한 현실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빚과 지병이라는 굴레가 그들을 위축되게 했을 것이고, 젊은 나이에 신용불량자라는 것으로 인한 자괴감이 있었을 것이다. 토익책, 일어책, 만화용지 등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뿐인 그들의 희망으로도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은 깊고 또 어두웠을 것이다.

가난은 운명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번개처럼 죽음에 사로잡혀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꾸준히 실패하고 다시 도전했지만 실패하는 현실이 반복될 때 절망은 천천히 나타난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도전할 일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린다. 사람은 결코 쉽게 죽지 않는다.(p.53)

여기에는 얼마쯤 한국 사회의 책임이 있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또 만약 일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택비, 교육비, 의료비 등 생활비용이 큰 탓에 누구나 가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요컨대 적어도 이 경우에 '왜 일하지 않았느냐'라는 비난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할 능력이 있다고 누구나 가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높은 실업률과 경제 위기로 주택비, 교육비, 의료비 같은 생활비용의 부담이 커지면서 빈곤의 늪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이들을 위한 마지막 구명정이다. (p. 89)

이 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만약 세 모녀가 기초생활보장 수급을 신청했다면 수급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천착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맹점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신청주의에 입각한 제도이기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신청을 꺼렸을 경우에 혜택을 받지 못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신청 자체가 어려워 제대로 부딪혀 보기도 전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만고 끝에 신청을 했더라도 그 상황을 상상하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경우를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라 덧붙인다. 예를 들어 부양의무자 기준은 부양의무자가 실제 부양하지 않더라도 수급자에게는 수급비가 깎이거나 중단되는 흉기가 되어 버린다. 이는 십수년 전 연락이 끊긴 가족이나 이혼한 전 부인, 전 남편에게 소득이 잡힌다면 얼굴을 붉히며 찾아가 가난을 밝히고 관계단절확인서 따위를 받아오게 만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 있지 않은 소득을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수급비에서 제해버리는 간주부양비와 추정소득 등은 수급자의 최저생계비를 위협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결국 세 모녀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신청했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일의 부담을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떠밀고, 어떻게든 돈을 덜 주려고 하며,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빈곤이라는 틀에 가둬두려는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국민의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 유지'라는 제도의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임은 물론 '살아가기에 필요하지만 참으로 치사한 제도'라는 한 20대 수급자의 지적이 딱 맞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무책임하게 '복지 제도를 알았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홍보가 문제'라고 치부해 넘길 일이 아닌 것이다.

세 모녀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뒤로도 또 다른 '세 모녀'들이 계속 있어 왔다.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비극적인 죽음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기록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는 저자의 뜻이 퇴색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 모녀가 가고 남은 이 아픈 상처를 잊지 않고 어루만져야 한다. 끝내 죄송하다며 삶을 마친 그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연말에는 광화문 농성장이라도 찾아가 작은 힘이나마 보탤 일이다.

그러나 쉽게 떠날 수 없다. 아직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가난한 이들이 함부로 죽지 않는 세상을 위해 우직한 걸음을 내딛는 광화문 농성장에 좀 더 많은 이들이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면 희망은 만들어질 것이다. (p.159)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송파 세 모녀의 죽음이 상처를 남긴 이유

김윤영.정환봉 지음, 북콤마(2014)


태그:#빈곤, #기초생활보장제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