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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어머니 서거 추모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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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9·9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신승철, 김주삼이 이미 4월에 출감했으니 구속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힘은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허약해진 조직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청계노조를 탄압하고, 동일방직노조를 어용화시킨 데 이어 자본과 권력은 또 하나의 70년대 대표적인 민주노조인 YH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YH주식회사는 가발을 수출하는 업체였다. 창업주인 장용호는 1970년, YH무역회사를 자신과 진동희의 공동명의로 등기하였다. 국내경영은 진동희 사장에게 전담시키고 자신은 개척을 핑계로 YH제품을 판매하는 '용인터내셔날 상사'를 미국에 설립하였다.

진동희 사장은 YH제품을 다른 회사보다 훨씬 싼 값으로 장용호의 회사에 수출했다. 장용호는 후불조건으로 사들인 300만 불 상당의 제품 값을 대금결제 시한인 3년(1975년)이 지나도록 갚지 않음으로써 사실상의 외화도피를 기도했다.

진동희는 사장으로 있으면서 장용호에게 특혜 수출을 하는 동시에 YH로부터 자본을 빼돌렸다. 1973년에는 YH해운을 설립하여 자신의 잇속을 채웠다. 국외와 국내에서 자본을 빼앗긴 YH무역은 점점 쇠퇴해가기 시작했다.

1976년 말, 가발경기 후퇴와 더불어 장용호로부터 수출대금이 상환되지 않자 은행부채가 급격히 늘어났다. 진동희는 YH해운을 대보해운으로 회사이름을 바꾸고 사장으로 옮겨가면서 박정원을 대표이사로, 김종혁을 재정관리 상무이사로 취임시켰다.

진동희 사장을 비롯 경영진들은 계속해서 외화도피와 부정행위,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해오다가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YH무역의 계속되는 적자로 인해 원리금 상환이 중단되자 조흥은행은 1979년 1월 10일 YH무역을 적색기업으로 단정하고 거래중지는 물론 면목동 공장을 차압하겠다고 경고장을 보냈다.

경영진의 폐업공고에 맞서 노동조합은 당연히 폐업철회를 요구했다. 경영진들이 이미 회사 돈을 뒷구멍으로 빼돌려놓고 빈껍데기만 남겨놓은 채 폐업하겠다고 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단물을 실컷 빨아먹고 뱉어 버리겠다는 심사였다.

이소선,  YH 기업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본가 본질 깨달아

이소선은 YH의 기업주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자본가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다. 그 끝없는 욕망, 그것을 채우기 위한 온갖 부정과 비리, 비인간적인 처사, 자기만의 잇속에서 희생당하는 노동자의 참상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기가 막혔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본 세상을 떠올렸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YH노동자들은 4월 13일 노조 총회를 열고 공장 안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노동청 차장 등이 YH무역 폐업공고 철회를 약속하자 곧 정상근무에 들어갔다. 이 약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지화가 되어버렸고, YH노동자들은 7월 30일부터 다시 무기한으로 농성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는 8월 6일 전격적으로 폐업공고를 했다.

노동자들은 이제 "정상화 아니면 죽음이다"라는 구호를 머리띠에 써서 두르고 8월 9일 아침 9시 30분을 기해 마포에 있는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187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에 돌입했다. 이때서야 YH노동자들의 문제가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방송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건이 나자 이소선은 서둘러서 신민당사로 달려갔으나 당사 주변에 경찰들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어서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와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월 11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라디오를 들어보니 신민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는 여공들이 경찰에 의해서 강제해산을 당했다고 하지 않는가!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아 들려나가는 광경, 국회의원들이 두들겨 맞아 피 흘리는 장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이 된 신민당사의 모습이 신문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1명의 노동자가 죽었을지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1979년 8월 11일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1979년 8월 11일 Y.H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 Y.H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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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으로서는 도무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발 죽은 사람은 없어야 할 텐데, 이소선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매시간 흘러나오는 뉴스에서 이소선의 기도도 소용없이 노동자의 죽음을 전했다.

'그토록 죽은 사람이 없기를 바랐건만…….'

보도에 의하면 노동자 김경숙은 왼팔 동맥이 끊긴 채, 4층 강당에서 떨어져 당사 후편 지하실 입구 아래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새벽 2시 반경 한맺힌 목숨을 마쳤다.

그 소식을 듣자 이소선은 자신의 가슴을 갈갈이 쥐어뜯었다. 맨 정신으로는 김경숙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한창 피어날 꽃다운 나이의 어린 여성노동자  김경숙. 척박한 이 땅에 태어나 착하고 진실 된 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었건만…….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피워보지도 못한 젊음을 노동자의 생존권투쟁의 제단에 바친 그의 넋을 어떻게 위로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부모들은 얼마나 가슴을 찢는 슬픔에 젖어 있을 것인가! 자식을 낳아보고, 자식을 키워보고 또 자식을 비참하게 잃어본 그로서는 누구보다도 그 심정을 알 수 있다. 이소선의 뺨 위로 눈물이 한없이 흐르고 있었다.

맨 정신으로 김경숙의 죽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날도 신민당사에까지 가보았으나 경찰이 막고 있어서 싸움만 실컷 하고 되돌아 왔다. 그 다음 날에야 겨우 신민당사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4층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을 보니 핏자국이 아직도 선연히 남아 있었다. 그 핏자국을 보니 이소선의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그는 덜썩 주저앉아 그 핏자국을 매만지면서 통곡을 했다.

"세상에! 노동자는 이렇게 때려죽여도 되느냐!"

누구를 향한 외침인지도 모르게 그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가 우는 것을 보고 함께 온 사람들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함께 울었다.

"노동자의 피땀을 긁어모아서 정부가 움직이고 살면서 노동자의 피를 이렇게 흘리게 하고 목숨을 끊어도 되는 거냐!"

Y.H노동자 고 김경숙
 Y.H노동자 고 김경숙
ⓒ Y.H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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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은 소리를 지르며 신민당사를 헤집고 다녔다. 정부 관계자나 기업주가 옆에 있다면 이빨로라도 물어뜯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YH노동자들의 투쟁을 야만적으로 진압한 정부는 노동운동탄압의 고삐를 더욱더 조여가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자들을 '도산계'라고 이름 붙여놓고, '도산계'는 국제공산당하고 연결되어 있어 기업을 도산시킬 목적으로 산업현장에 침투한 세력이라고 흑색선전을 퍼뜨렸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노동운동을 짓밟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야당인 신민당에게까지 탄압의 칼을 들이댔다.

마침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박 정권은 그야말로 말기적인 광기를 부렸다.

아니나 다를까. 10월 16일 부산·마산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데모가 거세게 일어났다. 즉각 군대가 투입되어 부마민중들의 항쟁을 짓밟았다.

이소선은 이 악독한 독재가 무너져야 노동자들의 고통이 해결 될 텐데 그날이 언제 올까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6일, 그날도 이소선은 노조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노동조합은 조직이 극도로 쇠잔한데다가 정부에서는 YH사건 이후 탄압의 칼을 목에 들이댔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에 날마다 고민에 휩싸여 지냈다. 낮에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노동교실에 가서 조합원들을 만나서 조합원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야산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늘에 초승달이 처연하게 떠 있었다.

'그놈의 달 참 처량도 하다. 그렇지만 저 달은 이제 차 오를텐데, 우리들의 삶은 어이하여 이다지도 앞이 안 보일까. 하루하루가 팍팍하기만 하고 태일이가 원하는 날은 아득하기만 하니…….'

이소선은 밖에서 활동할 때는 잊어먹지만 집으로 들어갈 때는 으레 집안 살림이 걱정이 되었다. 징역 살고 나와 보니까 그의 집안 살림은 거의 거덜이 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작은 딸 순덕이가 은행에 다니고 있어서, 그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니 가장으로서 책임을 못한 자신은 아이들 볼 면목이 없다.

'유신독재 때문에 우리 아들 태일이도 죽고 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노동자가 탄압을 받고 있는데, 우리들의 피와 살을 다 깎아 먹는 유신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날이 언제일까? 달아 너는 알고 있냐? 속 시원히 내게 말 좀 해다오. 어째서 우리 노동자들은 매일 당하고만 살아야 하냐?'

이소선은 버릇처럼 중얼거리며 달빛을 따라 걸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기 전에 빨래를 해놓으려고 가게에 비누를 사러 갔다. 좌판 근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있었다.

"아줌마, 나 비누 좀 줘요."
"이 아줌마가 지금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아니, 비누 달라고 했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무슨 일이 났어요?"

사람들은 그가 묻는 말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서 이소선도 뉴스를 자세히 들어보았다. 라디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나오고 난 뒤 간간히 "고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나즈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 박정희라니? 아니, 그럼 박정희가 죽었단 말이야?'

"죽은 사람한테 고 아무개라고 하는데 박정희가 죽었다는 말이요?"

라디오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얼굴도 돌리지 않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소선은 얼른 비누를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라디오를 자세히 들어보니 박정희가 틀림없이 죽은 것이다.

'우리 노동자를 탄압한 박정희가 죽다니! 박정희가 죽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태일아, 박정희가 죽었단다. 그러면 독재정권이 무너진단다! 우리 노동자들도 어깨를 펴고 살아갈 수 있겠구나. 태일아, 너도 하늘에서 보고 있냐? 이 어미는 너무나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구나.'

이소선은 서둘러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드디어 억눌린 자, 갇힌 자가 다 풀려나올 수 있겠다. 이제는 살았다! 짓눌린 그의 가슴이 확 트였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날듯이 노조사무실을 향했다.

전태일의 얼굴에 조합원들의 모습이 겹쳐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 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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