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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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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진의 죽음과 항의 투쟁

1977년 7월 2일 일간신문 사회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눈곱만하게 실렸다.

"2일 낮 협신피혁공업사(서울 영등포구 등촌동. 대표 문재인) 폐수처리장 배수로에서 작업 중이던 이 공장 근로자 민종진(32)씨가 유독가스에 중독돼 숨지고 함께 일하던 근로자 2명이 중태에 빠져 한강성심병원에 입원중이다."

한 문장으로 된 이 짤막한 신문기사는 한 사람의 죽음을 보도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서는 이 땅의 숱한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이름 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명의 노동자들이 죽고, 다치는 산업재해 문제를 정부 당국자나 기업주는 물론이고 사회에서조차 외면함으로써 노동자의 죽음은 개죽음이 되고 만다.

더구나 노동자 자신들도 옆의 동료가 산업재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기가 일쑤였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기업주나 정부 측에서 산업재해를 노동자 자신의 실수로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협신피혁에서 일하다가 숨진 노동자는 다름 아닌 청계피복노조 민족덕의 둘째형이었다. 민종덕은 노조활동을 바쁘게 하느라고 거의 집에도 못 들어가는 형편이었다. 형이 산재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노동운동을 한다고 여태껏 돌아다녔지만 이러한 문제 하나 미연에 방지하는 투쟁을 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민종덕은 즉시 호소문을 만들었다.

"……비단 공장에서 일하다 숨진 근로자가 저희 형뿐만은 아닙니다. 연일 안전사고로 인하여 이름 없이 죽어가는 근로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희 형의 죽음도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긴 합니다. 이처럼 근로자들의 비참한 죽음은 저희 형 한 사람에 국한 된 문제만은 아니기에 기업주와 행정 당국자들의 무책임과 비인간적인 처사를 여러분께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민종덕은 자신의 형이 어떻게 사고를 당해 죽게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문제의 그 폐수처리장은 서울시로부터 폐수 배출업소로 지정을 받은 유허가업소임에도 불구하고 경비절감을 위해 폐수시설을 가동치 않고 2일에 한번 씩 사람이 폐수가 빠져나간 뒤의 배수로를 청소해왔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추울 때는 배수로에 들어가 청소를 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이지만 날씨가 더운 여름에는 단 1~2분 사이에 유독가스에 질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는 이처럼 위험한 작업에 폐수시설을 가동하면 비용이 드니까 이것을 아끼기 위해 사람을 들여보내 폐수를 처리하도록 하여 숨지게 한 것입니다.

저희 형을 죽인 것은 과연 유황이나 메탄가스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경비절감을 위해, 1~2분 사이에 즉사하는 줄 알면서도 사람을 집어넣고 작업을 시킨다는 것은 살인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반문하고 나서 사장구속과 감독소홀의 책임을 지고 노동청장 퇴진 등을 요구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은 이 같은 호소에 적극 호응, 산업재해 문제를 가지고 싸우기로 결정했다. 청계노조 조합원을 비롯 경인지역 민주노조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고 민종진 씨의 죽음에 항의하는 노동자 일동'의 명의로 '노동자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넣지 말라!'는 제하의 성명서를 냈다.

"장시간의 중노동,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저임금, 하루하루 노동자의 건강을 갉아먹고 피를 말리는 인간 이하의 작업환경, 나날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살인적인 유해 위험시설, 이 속에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우리 힘없는 노동자들의 목숨이 헛되이 죽어갔던가!

5백만 노동자 여러분! 우리는 다 같이 노동자의 건강과 목숨을 헌신짝처럼 짓밟고 쓰레기처럼 무시하는 불의한 현실 아래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똑같은 억압 아래서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형제들인 것입니다. 이제 또 한 사람의 우리 형제가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결의'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1. 노동청장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나라. 2. 무책임한 강서경찰서 담당형사는 즉각 물러나라. 3. 살인 만행을 저지른 협신피혁공업사 사장(문재인)을 구속하고 폐수안전 시절을 가동할 것이며 근로기준법을 철저히 이행하라.

이소선은 조합원들과 함께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민종진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한강성심병원으로 갔다. 우선 유족들을 위로하고 조합원들과 함께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했다. 그 결과 우선 최대한 사회여론에 호소하고, 이 같은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노동자의 요구를 가지고 농성을 벌이기로 했다.

조합원들은 유가족의 호소문과 '노동자들을 더 이상 죽음으로 몰아넣지 말라'는 유인물을 각 공장, 대학교, 사회단체 등에 배포했다. 그리고 밤에는 수많은 조합원들이 퇴근을 한 뒤 영안실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민종진의 죽음을 항의하는 투쟁이 전개되자 민주세력은 즉각 동참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본가와 정치권력 그리고 어용노총으로부터 탄압을 당하는 노동자들일수록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다. 동일방직, 인선사, 방림방적, 대협, 화창물산, 한국갈포, 대일화학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노조결성 투쟁과 민주노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 중에서도 인선사의 유령노조사건은 이 땅에 어용노조가 얼마나 뿌리 깊게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가를 말해준다.

서울 성수동에 있는 노트 앨범 제조업체인 인선사는 종업원 수가 1천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업장이었다. 반면에 작업환경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매일 13시간씩 강제로 일을 시키고 7, 8년 근무해도 일당 950원에 불과한 저임금이었다. 연월차 유급 휴일제마저 없었다. 또한 안전시설이 미비해 작업과정에서 재단기에 손을 잘리기가 일쑤였다.

노동자들은 1977년 4월 21일 전국화학노조 인선사 지부를 결성한 뒤 지부장에 박문담을 선출하고 상무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튿날 지부장 박문담은 노조설립신고필증을 받기 위해 화학노조에 들렀다가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선사는 이미 1975년 3월 30일자로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전국출판노조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이 기록에는 단체협약체결일이 1975년 5월 10일, 지부장은 안병국(영업부 과장), 조합원수는 536명으로 되어 있었다.

노조결성에 앞장섰던 조합원들은 4월 2일 출판노조를 찾아가서 항의했다.

"조합원이 모르는 노동조합이 존재할 수 있는가? 회사의 간부인 과장이 어떻게 지부장이 될 수 있는가? 조합비도 안 낸 노동조합을 여태까지 인정해 왔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매달 조합비를 받아왔으며 조합이 잘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너희들은 노동조합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회사와 지부장, 출판노조를 비난하기 위해 온 것이냐? 공장장이 지부장을 하는 조합도 있다."

출판노조는 인선사 노동자들의 항의에 말도 안 되는 엉뚱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때부터 인선사는 노동조합결성을 주도했던 사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지부장 박문담 한테는 사직을 강요하고, 다른 조합원들은 부당징계, 부당전출을 하는 등 계속해서 탄압을 가하였다.

박문담을 중심으로 노조결성을 주도한 노동자들은 출판노조가 사용주와 결탁하여 현장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을 사전에 막기 위해 유령노조를 묵인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유령노조는 해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당한 노동자들의 주장에 출판노조는 이들을 제명하고, 회사는 사직을 강요했다.

출판노조에 대한 비난이 가중되자, 출판노조는 유령노조인 인선사 지부를 기만적으로 개편하고 이병인 위원장은 임기 1년을 남긴 채 중앙위원회에 인책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집행부를 개편하였다.

그러나 새 집행부 역시 유령노조를 추인하는 형태로 승인하였다. 인선사 노조의 정상화를 위해 싸워온 노동자들은 여전히 회사에서 쫓겨나 있었다.

해고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복직과 출판노조의 어용성을 고발하기 위해 출근투쟁, 법정투쟁, 그리고 사회 민주세력과 연대하여 불매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끈질기게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지부장인 박문담은 태광산업에서 노조활동을 해오다가 해고된 이후에도 그 동안 여러 사업장에 취업해서 노조를 많이 만든 능력 있는 조직가였다. 그는 이 같은 활동을 하면서 항상 노동교실에 들러 이소선과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청계조합원들하고도 아주 친밀하게 지내온 터였다.

이처럼 각 사업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많은 노동자들이 한강성심병원 영안실에 찾아와서 청계노조 조합원들과 함께 농성을 했다. 그 결과 8일 새벽, 회사 측이 일간신문에 공개사과문을 게재할 것, 보상 문제의 원만한 해결 등의 요구를 관철시킴으로써 농성이 일단락되는듯 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청계피복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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