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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 속 여러 '갑을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음지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던 '갑의 횡포'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열정 페이'를 받으며 일하는 수습 디자이너의 이야기는 물론 영화 <카트>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 또한 재조명됐다.

위와 같은 '갑을 관계'는 이공계 최고 학문의 터전인 대학원 연구실에서도 다르지 않다. 현재 국내 A대학​에서 이공계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ㄱ아무개씨를 지난 11월 16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 대학가의 카페에서 만난 ㄱ아무개씨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ㄱ아무개씨와 한 대학가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ㄱ아무개씨와 한 대학가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임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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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님이 알아서 잘 써주​시겠지만, 누가 읽어도 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돼요. 제 분야에서 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 랩실(연구실의 줄임말)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거든요."

그는 재차 '익명 보도'해줄 것을 강조했다. 먼저 대학원 연구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는 "적게는 몇 십, 크게는 몇백 이상이 왔다갔다 하는 편법들이 판을 쳐요. 일일이 나열하려면 하룻밤은 족히 걸려요. 다른 랩실도 마찬가지일 걸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연구실(아래 랩실) 연구생이 받는 급여는 크게 인건비와 장학금으로 나뉜다.

'쥐꼬리' 인건비라도 감사히... 강제로 고개 숙인 대학원생

인건비는 국가 혹은 기업에서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를 진행하는 대가로, 연구실 자체에서 지급하는 일종의 '수당'이다. 그는 이 수당을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받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보통 한 달에 10만~30만 원 정도 받는 것 같아요. 경력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이상 받기도 하고요. 편차가 꽤 커서 심하면 3배 이상 차이 나기도 해요. 교수님이나 치프(랩실 연구생 중 고참을 의미)에게 밉보이면 그보다 적게 받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인건비·연구비 실태에 대해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자 그는 펜과 종이를 꺼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연구비가 지급돼요. 국가 사업인 경우 (연구비) 활용이 엄격히 제한되기 때문에 횡령이 다소 어렵지만, 기업에서 맡긴 사업인 경우 얘기가 다르죠. 기업에선 연구비를 지불하면 그들이 원하는 아웃풋(결과)만 나오면 되니까요. 그래서 보통 '연구비 횡령'은 기업 연계 사업일 때 벌어지는 게 대부분이죠."

이어서 그는 연구실에서 횡행하는 편법을 설명했다.

"프로젝트에서 연구생을 연구자로 등록하고, 인건비가 입금되면 현금으로 인출해서 가져오라고 하거나 심하면 급여 통장을 가져가기도 해요. 말은 '모아서 재분배할 거다'라고 하는데... 여러 연구생의 인건비를 합친 금액이 얼마인지, 어느 곳에 정확히 쓰이는지 저희로서는 알 길이 없죠. 교수 혹은 치프의 재량이에요. 여기서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죠."

이어 연구비 횡령 사례를 직접 겪거나 목격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옆방 랩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수가 연구생에게 '연구비 중 200만 원을 자신의 아들 계좌로 보내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해요. 또 연구비는 재료비, 회의비, 세미나 참가 비용 등을 모두 포함해요. 그런데 그 비용을 제대로 된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죠. 예를 들면 세미나 참가는 자비로 내라고 한다고 들었어요. 보통 학회에 참여하려면 참가비만 적어도 10만 원이에요. 거기에 교통비, 식비까지 생각하면... 저희 입장에선 적지 않은 돈이라 아무래도 부담이 되죠."

그는 이런 상황에서 대학원생은 불평 한마디 꺼낼 수 없다고 전했다. 부조리한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교수, 치프의 말 한마디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건비뿐만이 아니었다. 금액 단위가 인건비보다 큰 장학금의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했다.

아르바이트한다고 장학금 깎아... 기준이 뭐길래

일부 이공계 대학원 랩실에서 기승하는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일부 이공계 대학원 랩실에서 기승하는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 cli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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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대학이 제공하는 장학금은 '성적 장학금'과 '교수 추천 장학금', 그 외 기타 장학금이 있다. 전자는 성적순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되고, 후자의 경우 교수 1인당 1명의 학생을 추천해 그 학생이 장학금을 받게 되는 방식이다. ㄱ아무개씨는 ㄴ아무개 교수의 연구실에 소속돼 있다. 그는 ㄴ아무개 교수에게 추천을 받아 '전액 장학금'을 수령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전체 학비의 약 70%만을 장학금으로 지급받을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말 당황스러웠죠. 뭐가 잘못된 건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고민 끝에 학과장을 뵙고 여쭙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전산상 오류일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학과장실을 찾아간 ㄱ아무개씨에게 돌아온 것은 황당한 대답뿐이었다. 평소 생활고에 시달리던 ㄱ아무개씨는 주말에 따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학과장은 '전액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학비를 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담당 교수인 ㄴ아무개 교수와 사전 협의도 없이 추천 학생에서 ㄱ아무개씨의 이름을 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학과장 자신의 연구실 학생의 이름을 슬쩍 넣었다.

"알바비는 고작 몇 푼인데... 순간 150만 원 정도의 차액이 생겼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할 판이었죠. ​​화가 나서 정말 싸울 뻔했어요. 근데 학과장의 말이 더 웃겼어요."

ㄱ아무개씨의 말에 따르면 학과장은 "그럼 내가 일단 연구비로 차액을 내 주겠다. 대신 나중에 급여를 받게 되면 나에게 다시 갚아라"고 했단다. 그 뒤로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그는 "지도 교수님께 말씀 드려 결국 해결은 됐다"라며 더 이상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였어요. 아마 비슷한 일을 겪고도 해결되지 못한 대학원생들이 훨씬 많을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말단 대학원 연구생들은 공식 '셔틀'?

랩실에서 말단 연구원의 위치는 '슈퍼 을'이다.
 랩실에서 말단 연구원의 위치는 '슈퍼 을'이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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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는 연구생이 가진 '을의 신분'에 대해 털어 놓았다. 랩실에서 말단 연구생은​ 일명 '셔틀'이라고 한다. 커피 셔틀, 식사 셔틀, 심지어 남자들만 있는 일부 랩실의 경우 '소변 셔틀'도 있다고 했다.

"일부 남자 연구원들은 화장실조차 가기 귀찮아서 1.5리터 페트병을 책상 밑에 두고 소변을 봐요. 병에 좀 찼다 싶으면 말단 연구생이 병을 수거해서 병을 비우고 다시 가져다 놓는 거죠. 더 문제인 것은 연구생이 경력이 쌓이면 랩실에서 치프가 되는데, 본인도 겪었으면서 어느새 그들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교수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케일 정도의 차이겠네요. 치프는 코 묻은 돈을 빼돌리는 느낌이라면 교수님은 좀 더 큰 단위의 돈을 만지는 느낌이에요. 별반 다르지 않아요, 연구생 입장에서는."

치프의 편법도 만만치 않았다. ㄱ아무개씨의 말에 따르면 치프는 자신이 관할하는 활동(재료 구입 등)에서 적게는 몇만 원, 많이는 몇십만 원을 빼돌리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가령 10만 원 어치의 재료를 구입한 후, 100만 원을 결제한 뒤 가게 주인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70만 원을 돌려받는 식이다.

이렇듯 랩실 내에서 크고 작은 편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대학원생들은 이를 '어쩔 수 없이' 함구한다. 나중을 생각하고 그저 인내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할 곳도 없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물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말한 대학원 랩실의 문제는 바뀌기가 정말 어려워요. 당사자인 연구생들이 '슈퍼 을'이거든요. 한 번 교수님께 밉보이면 전공 분야 자체에서 살아 남기가 어려워요.

내 미래가 달려 있으니 다들 더러워도 참고 쉬쉬 하는 거죠.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중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현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바라요. 이러한 작은 움직임이 모여 언젠가 지금보다 나은 랩실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에요."


태그:#대학원, #갑질, #연구비 횡령, #오줌셔틀, #교수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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