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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언론에 유출된 청와대 내부 문건에서 'VIP 측근' 정윤회란 이름과 함께 등장한 십상시(十常侍). 이것은 정윤회씨와 함께 정권을 움직이는 청와대 내·외부의 실무진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십상시의 상시(常侍)는 중상시(中常侍)라는 관직의 약칭이었다. '궁중에서 항상 보좌한다'는 뜻인 중상시는 황제를 보좌하는 관직으로서,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後漢, 25~220년) 때는 내시(환관)들로만 충원됐다. 십상시는 '중상시에 속한 열 명의 내시'란 뜻이다.

십상시는 후한 말기인 영제 황제(집권 168~189년) 때 국정 농단을 일삼다가 국가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들의 대표 격인 장양의 삶을 담은 <후한서> 장양 열전에 따르면, 십상시는 실은 열 명이 아니라 열두 명이었다. 편의상 열 명으로 묶고 십상시라 부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에 익숙한 기독교 문화권 같았으면 '십이상시'라고 불렀을 것이다.

장양(張讓, 135~189년)은 이전 시대인 환제 황제(집권 146~167년) 때 권력 핵심부에 들어갔다. 일곱 살에 내시가 된 그는 열두 살 때부터 환제를 주군으로 모셨다. 이것이 그에게는 인생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보다 세 살 많은 환제와 친구처럼 지내면서 황제의 측근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런데 장양과 환제의 관계는 단순히 신하와 주군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동성애를 나누는 사이였다. 내시인 장양이 권력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요인도 작용한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은밀하게 이루어졌지만, 순제 황제(집권 125~144년)의 부인인 양(梁)태후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런데 태후는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태후는 장양의 약점을 빌미로 장양을 스파이로 만들고, 자기의 정적인 환제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양은 결국 환제에게 돌아갔다. 동료 내시들의 설득을 받아들인 장양은 양태후를 배신하고 양씨 외척을 몰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양씨 가문이 몰락한 뒤에 등장한 등(鄧)황후의 미움을 받고 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등황후가 그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와 환제의 특수 관계에 있었다.

황제를 유흥에 빠뜨리고 나라를 쥐락펴락

후한시대 내시(환관)의 초상화. 사진은 종이를 발명한 내시로 알려진 채륜의 초상화다. 후대 사람이 그린 것이다.
 후한시대 내시(환관)의 초상화. 사진은 종이를 발명한 내시로 알려진 채륜의 초상화다. 후대 사람이 그린 것이다.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중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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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이 궁에 복귀한 것은, 환제의 죽음을 계기로 두 명의 황제가 1년도 안 돼 교체되고 뒤이어 영제 황제가 새로운 황상으로 등극한 뒤였다. 즉위 당시 영제는 열세 살이었다.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직접 권력을 행사하기는 힘든 나이였다.

이런 점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은 것이, 황제보다 21세 연상인 장양을 비롯한 십상시였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황제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다. 황제가 유흥에 빠져 정치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황제가 유흥에 빠지고 내시들이 정권을 담당하더라도 국가가 그럭저럭 유지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그렇게 한가로운 때가 아니었다.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지방분권이 심각한 나머지, 지방 할거의 양상까지 나타나던 때였다. 지방 세력인 호족들의 할거 때문에 황제의 명령이 지방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던 때인 것이다.

지방 호족들이 황제 권력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십상시는 황제 권력을 사수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만 열을 올렸다. 국가나 황실의 운명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시야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황제가 그저 유흥에만 빠져 지내기를 희망했다. 이런 그룹이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를 장악했으니 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십상시가 국정 농단을 일삼던 영제 시대에, 후한 정부는 결과적으로 중요한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지방 할거를 막겠다고 벌인 일이 도리어 지방 할거를 더욱 더 촉진시켰던 것이다. 이 시기에 중앙정부는 지방 장관인 자사(刺史)의 명칭을 주목(州牧)으로 바꾸는 동시에, 주목이 군사감독관인 감군사자(監軍使者)를 겸하도록 했다.

이것은 지방관이 행정권과 군사권을 함께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지방 호족을 좀 더 효율적으로 견제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이 조치는 도리어 지방관들이 중앙에 반기를 들게 만들었다. 지방 할거 양상이 심화되던 때였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이 조치를 악용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켜버렸던 것이다.

위의 조치는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것은 후한의 몰락을 한층 더 가속화시키고 말았다. 십상시가 국정을 농단하던 때에 이런 실책이 나왔다는 것은, 이들이 정치 흐름을 거시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기 그룹의 권력 강화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였으니,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VIP'의 리더십이 약해지면... 어디서나 나타난다

소설 <삼국지>를 소재로 한 삼국지 벽화 거리. 인천시 중구 선린동의 차이나타운에 있다.
 소설 <삼국지>를 소재로 한 삼국지 벽화 거리. 인천시 중구 선린동의 차이나타운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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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할거가 국가 분열을 촉진하는 상태에서 이것을 막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황제를 약화시키고 정권을 잡는 데만 전념하는 십상시가 정부를 좌지우지했으니, 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영제가 죽자마자 십상시는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고, 위기를 타개할 목적으로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다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후한서> 장양열전에 따르면, 장양은 황하에 뛰어들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십상시 그룹을 내쫓고 최고 권력을 차지한 인물이 소설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동탁이다. 그 뒤에 권력을 잡은 인물이 그 유명한 조조다. 조조가 등장한 뒤로 중국은 위·촉·오 삼국시대로 이행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십상시의 국정 농단이 후한의 몰락과 삼국시대의 등장을 가속화시킨 셈이 되었다. 

동탁과 조조 같은 인물들의 등장은 중국이 통일 시대에서 분열시대로 이행한다는 징표였다. 통일에서 분열로 이행하는 이 시대의 혼란상이 너무나 흥미진진했기 때문에, 정사 <삼국지> 말고 소설 <삼국지> 같은 책이 두고두고 인기를 끄는 것이다.

동탁과 조조의 등장을 촉진한 것은 십상시의 국정 농단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십상시가 있었기에 소설 <삼국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십상시가 황제를 잘 보좌해서 후한이 되살아났다면, <삼국지>의 분열시대가 도래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훨씬 더 늦게 도래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십상시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소설 <삼국지>를 선사한 은인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제2의 십상시는 언제 어디서든지 출현하여 국가의 몰락과 분열을 재촉할 수 있다. 만약 'VIP'의 리더십이 약하고 국가재정이 삐거덕거려 정부가 재정 지출을 집행할 수 없고, 공무원이나 군인들이 보수에 대한 불만으로 정권에 저항하며 민간 사회가 제도권 정치에 저항하는 상황에서 이런 그룹이 등장한다면, 국가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통치자의 리더십이 약해지고 재정이 위험해지고 공무원·군인들이 저항하며 민심이 정권을 떠나는 상황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 말기에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만약 그런 시대에 제2의 십상시가 출현해서 국정을 농단한다면, 그런 시대 다음에는 소설 <삼국지> 같은 분열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시대가 바뀌고 역사가 바뀔 때는, 으레 이런 집단이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등장한 십상시 그룹은 지속적 관찰을 요하는 흥미로운 집단이다.


태그:#십상시, #장양,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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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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