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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진달래꽃, 이 소설의 주인공 허형식 장군은 고향의 진달래꽃을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진달래꽃, 이 소설의 주인공 허형식 장군은 고향의 진달래꽃을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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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말

오늘의 구미는 615평방미터에 인구 40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내륙 산업도시이지만, 한 세기 전에는 선산군 구미면으로 인구 1만 명 안팎의 자그마한 고을이었다. 고을 남쪽으로는 해발 976 미터의 금오산이 이 지방의 수호신처럼 우둑 솟아있고, 고을 동쪽으로는 함지박을 덮어놓은 모양의 천생산이 숱한 전설을 지닌 채 고을문화를 살찌우고 있다.

낙동강은 금오산과 천생산 사이를 큰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내리고, 그 유역에는 기름진 구미 해평 평야가 수천 년이래 이곳 사람들의 곳간이 되어왔다. 우리나라 어느 산하인들 애절한 얘기가 없으련만 이 구미에도 유사 이래 많은 얘기들을 안고 있다.

허위 13도창의군 군사장(좌),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우 )
 허위 13도창의군 군사장(좌), 장택상 전 수도경찰청장(가운데), 박정희 전 대통령(우 )
ⓒ 왕산기념관/창랑기념사업회/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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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현대사만 보더라도 구한말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집안, 13대째 만석꾼 영남제일의 대부호로 해방 후 수도경찰총장, 초대 외무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장택상 집안,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일군(만군) 육군 중위로 해방을 맞은 뒤, 다시 국군 소장으로 5·16쿠데타를 일으켜 네 번이나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 집안 등 이들 세 집안은 모두 반경 2킬로미터 이내의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지호지간이다. 아마도 이 세 집안의 이야기도 언젠가는 전설로 낙동강에 흘러갈 것이다.

필자는 구미면 원평동에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이 마을에서 살고 구미초등학교와 구미중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어린 시절 어른들부터 들었던 얘기와 그동안 내가 직접 본 얘기, 그리고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간 얘기들을 소설이라는 틀에 담아보고자 한다. 그 첫 시도로 왕산 집안의 슬프고도, 아프고, 억울하고도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지금 펼쳐가고 있다.

에로부터 숱한 인물을 낳은 구미 금오산
 에로부터 숱한 인물을 낳은 구미 금오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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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왕산 허위의 순국 비보를 듣고, 가장 먼저 수제자 박상진(朴商鎭)이 달려왔다. 그는 1884년 경남 울산 태생으로, 청년시절 영해의병진 신돌석(申乭石) 장군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로, 16세에 왕산 문하에 들어가 정치, 군사 등 경세를 배웠다. 스승 왕산의 권유로 양정의숙(養正義塾)에 입학하여 다시 신학문을 익혔다. 1907년 왕산이 정미의병을 일으키자 부친을 설득하여 5만원의 거금을 스승의 군사자금으로 제공키도 했다.

"대감 죽은 데는 안 가도 대감 말이 죽은 데는 간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고약한 염량세태의 세상인심을 말한다. 천하 왕산이 경성감옥에서 순국을 당하자 형장은 썰렁했다. 왕산의 장남 학(壆)은 의병활동으로 피신 중이었고, 사위 이기영은 형장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옥리들의 서슬이 퍼랬기 때문이다.

형장의 왕산 시신을 선뜻 나서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제는 그들이 처형한 왕산 의병장의 회상(會喪, 사람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일)을 엄하게 단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산 수제자 박상진은 물불 가리지 않고 허겁지겁 경성형장으로 달려와 대성통곡하며 감옥의 전옥과 옥리들에게 호통을 쳤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순국한 열사이신데 네 놈들이 이토록 욕을 보이시다니…."

그러자 경성감옥의 전옥은 박상진의 기세에 눌려 말했다.

"시신은 모셔 가십시오. 다만 한 가지만은 약속해 주셔야겠습니다."
"뭐요?"

울음을 멈춘 박상진이 전옥에게 물었다.

"시신을 모셔가되 소리 소문 없이 장례를 치르십시오. 자칫하다가는 줄초상이 날지도 모르오."
"알았소."

만주로 망명하다


왕산허위유허비(원래는 금오산 도립공원 어귀에 서 있었으나 현재는 왕산기념관 옆에 서 있다.)
 왕산허위유허비(원래는 금오산 도립공원 어귀에 서 있었으나 현재는 왕산기념관 옆에 서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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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왕산의 고향 구미 임은동에서 옮겨 집안사람들과 고향사람들에게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에서 다시 장사지냄)을 치르게 했다.

이 장례를 일제 밀정들이 살폈지만, 그 감시 속에서도 인근 고을사람들과 애국지사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제야 상주를 비롯한 집안 및 고을사람들은 절차를 갖추어 장례를 지낸 뒤 금오산 뒤 지경리 산봉우리에다 받들어 모셨다.

세기를 앞지르는 밝은 눈으로 백성을 걱정하고
삼천리를 휘덮는 매운 뜻으로 원수와 싸웠다.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니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1975. 10. 21. 왕산허위선생유허비문에서 (정휘창 지음)

왕산 허위는 구미 임은허씨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 집안의 기둥이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순국했으니 이는 일제의 세상에서는 대역죄인으로 곧 멸문(滅門, 집안이 망함)의 화를 당할 처지였다. 왕산의 장례가 끝나자 일제경찰 및 헌병들은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왕산의 가솔들은 경상도 진보로 이사를 가거나 대다수는 압록강을 건너 낯선 땅 만주로 망명의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압록강 철교, 오른편의 끊어진 다리가 당시 망명객들이 건넜던 철교다.
 압록강 철교, 오른편의 끊어진 다리가 당시 망명객들이 건넜던 철교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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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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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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