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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받아쓰기 시험에서만큼은 유독 약했던 소년이었다. 그것은 남들보다 언어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내 불필요한 상상력이 곧잘 장애물이 된 탓이 컸다. 가령 '우리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십니다'라는 예시 문장이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기전에, '우리 엄마가 과연 꽃을 좋아했었나?' '어머니들은 원래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인가?' '그럼 혹시 남자가 꽃을 좋아하면 이상한것인가?' 같은 고민을 먼저 하였다.

당연히 정상스러운 받아쓰기가 될 리 없었다. 내가 쓴 답은 '우리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셨었나' 같은 식인 경우가 많았고, 그것은 당연히 오답처리가 되었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게스트는 바로 그 받아쓰기가 직업이 된 사람의 이야기다.

영주씨의 직업은 속기사다. 운전기사, 대리기사, 택배기사처럼 그녀 역시 탈 것을 이용해서 어떤 대상을 '이동' 시켜주는 일을 한다. 그녀의 탈 것은 자동차가 아닌 타자기이며 그녀가 이동시키는 대상은 사람이나 화물이 아닌 '말'이다. 말을 이동시켜주는 사람. 언어이동사. 이렇게 말하니 뭔가 그럴듯해 보인다.

그녀의 일은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기록으로 옮기는 조선시대 '사관' 같은 일이다. 당연히 철저한 객관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자신의 주관이나 견해를 넣는다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혹시, 어린시절의 나처럼 엉뚱한 상상이 더해져서는 안될 그런 직업이다.

말을 이동시켜주는 사람. 언어이동사.
▲ 속기사 말을 이동시켜주는 사람. 언어이동사.
ⓒ 강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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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속기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만난 것은 영주씨가 처음이었다. 그런직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은 거의 드물다. 공증사무실이나 법원 같은 특수한 곳.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굳이 가보고 싶지 않은 곳이 그들의 일터이기 때문에 그들의 직업은 더욱 베일에 갇혀있다.

직업이 직업인 탓이라서 그럴까. 영주씨는 파티 자리 안에서도 그다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적절히 호응해주고, 웃어주면서도 흐트러짐없이 계속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답답하게 입 닫고 술만 마시는 사람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적재적소에 알맞는 유머와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이따금씩 튀어 나오는 멘트들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단번에 휘어잡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잘 발달된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다. 故신해철씨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해철씨처럼 말을 잘하기 위해서 조언을 해준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말을 잘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잘 듣는 능력'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한국사람들이 가장 안되는 것이기도 하겠구요. 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고, 어떤 의도인지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구요."

정성을 다해서 듣고, 정성을 다해서 얘기하는 소통활동.
▲ 언어란 주고 받는 힘 정성을 다해서 듣고, 정성을 다해서 얘기하는 소통활동.
ⓒ 강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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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잘 말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내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대표와 음악치료사를 같이 행하는 내 직업 특성상 나에게도 매우 깊이 생각해야할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말로써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경험보다는 누군가를 말로서 제압하려고 했던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가능한 말을 아끼고 정제해서 꺼내려는 습관을 조금씩 키워나가고 있다. 물론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러한 태도를 고민하게 된 것만해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처음으로 만난 어느 속기사 게스트로부터 받은 소중한 가르침이다.


태그:#게스트하우스, #인간실격패, #강드림, #속기사, #대안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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