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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의 투표문제를 따지다 보면 꼭 '계급배반투표'라는 말이 나온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정치에서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고자 하는 진보정당의 발전을 제약하는 동시에 가난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주된 원인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배반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세태에서 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을 배반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일까?

한국 사회의 가난을 다룬 신명호의 <빈곤을 보는 눈>이라는 책은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투표하나"라는 소주제를 통해 이 문제를 다룬다. 비록 간략하긴 하지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계급배반 투표를 하는 이유

한국사회에서는 1960년대부터 저소득층 밀집해 사는 산동네야말로 집권당의 확실한 표밭이었던 것처럼 '계급배반투표'가 이례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부자 정당인 공화당에 몰표를 주곤 했다. 토마스 프랭크라는 저널리스트는 이러한 현상에 충격을 받고, 방대한 조사와 분석에 나섰다. 그 결과물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책을 내놓게 되었다.

책의 핵심은 공화당이 의도적으로 문화전쟁을 벌여 승리했다는 것이다. 공화당은 투표자의 마음에서 경제문제는 부차적으로 만들고 애국심 같은 문화적인 요인을 주된 판단사항으로 만드는 문화전쟁을 벌였다. 경제 문제를 정치와 분리시키면서, 정치의 진짜 문제는 낙태와 동성애를 찬성하고 애국심을 우습게 아는 진보주의자에게 있다고 공격했다. 경건하고 애국심이 충만한 진정한 미국인이라는 문화적 프레임을 만들어 민주당과 노조 등 진보집단을 애국심도 없고 잘난 척이나 하는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문화적 프레임에서 서민의 진정한 대변인은 공화당이었다. 이런 문화전쟁을 통해 공화당은 1980년대부터 세차례에 걸쳐 집권할 수 있었다.

<바른 마음>이란 저서로 유명한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화이트도 사회적 약자가 보수당에 투표하는 이유를 진보주의자들이 간과하는 세 가지 도덕적 본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그룹에 충성하고, 권위를 존중하고, 순결과 신성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반면 진보는 자기가 속한 그룹만이 아닌 개방적이고 평등한 성향이 있고, 권위에 반대하며 권력을 비판하고, 성의 순결 같은 보수적인 윤리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공화당은 진보가 간과하는 바로 이러한 본능에 호소해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위 논의들에서 공통점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따져서 투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경제적 이익보다는 인습적인 사고 등의 문화적 요소에 더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정치의식엔 문화적 요소의 영향이 크다

이러한 설명은 한국의 50대 이상 장년세대의 정치적 성향을 이해하는 데 유용해 보인다. 장년세대에게 가장 큰 영향은 유신시절을 통해 배운 경험일 것이다. 그 핵심엔 당시 '국민교육헌장'의 구절인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는 '충'이라고 요약될 국가중심적 사고가 있다.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철도노조파업에 대한 중앙일보 여론조사를 보면 50대는 80.4%가 공감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여, 반대로 약 65%가 공감한 3,40대와는 뚜렷한 대비를 보였다. 60대 이상은 90.5%가 공감하지 않아 차이는 더욱 커진다. 이처럼 장,노년세대는 파업이나 시위 같은 국가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 그것은 '충'에 기반하여 국가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개인적인 또는 집단적인 이익을 요구하기 이전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들이 충무공 이순신을 다룬 <명량>이라는 영화에 뜨겁게 반응한 연유도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장노년층의 콘크리트 같은 지지도 여기에서 나온다. 장년 특히 노년으로 갈수록 '박근혜 대통령'은 유신시절에 익혔던 국가에 대한 기억과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즉, 단순한 정치리더가 아니라 국가를 상징하는 지도자인 것이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울음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에 더 반응하는 것도 '국가를 우선'하는 사고 습관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그런 면에서 경제적인 계급이라는 구분은 실제 한국인들의 정치적 마음에는 존재하지 않는 학문적인 구분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그런 구분이 없는데 계급배반투표를 따져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그런 구분이 왜 형성되지 않았는지를 묻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투표불참의 문제와 연결된다. 한국사회에서 가난한 계층은 누구를 찍느냐의 문제보다는 아예 투표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낙구의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는 가난한 동네가 투표율이 낮다고 밝히고 있다.

먹고 살기 힘들어 투표하기도 힘든 가난한 사람들

"사실 최근 십수년간 투표를 한 적이 없다. 선거날에 근무를 해야 했다."

세월호 희생자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가 한겨레신문(2014.9.6)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스스로 시민도 아니고 영세민이었다고 말하는 김영오씨는 하루 2교대 근무로, 정규시간 8시간 근무에 잔업 4시간을 합쳐 하루 12시간씩 근무했고, 또 주말특근을 빠진 적도 거의 없다고 한다. 투표를 하기엔 삶이 너무 힘들었다. 생계에 바쁜 가난한 사람일수록 투표의 기회비용이 크고 그만한 기대를 없으면 투표장으로 가기 힘들다.

"정치의 가난, 가난의 정치 투표해서 뭐해? 없는 사람은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라는 한겨레신문(2012.5.16.) 기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라들이 잘살게 될 줄 알고 지지하긴 했는데 다 헛일이더라"는 기사 내용처럼 정치가 도움이 되었던 현실의 경험이 없다.

지난 10월 26일 브라질 대선에선 집권 노동자당 후보인 호세프 대통령이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노동자당이 지난 10여년간 펼쳐온 '보우사 파밀리아'등 빈곤 구제 프로그램의 수혜자들이 많은 북부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태국에서도 2011년 전 총리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이끈 푸어타이당이 승리한 배경엔 탁신 총리 시절 저렴한 의료보험과 빈곤층 채무유예 등 친서민정책을 통해 혜택을 본 서민들이 몰표를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정권은 아쉽게도 그러한 역사적 경험을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사회에서는 IMF 경제위기 극복 때문에 민주화와 경제적 양극화가 함께 진행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되었다.

또 하나 고려할 점은 위에서 언급한 미국 사례와 달리 한국 정치에서는 보수정당이 주로 경제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지난 대선도 그랬고, 지금도 정국이 대치되면 보수여당은 민생과 경제를 내세우며 돌파하려 한다. 그렇다고 야당이 그 민생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했다. 가난한 계층으로서는 보수정당에 더 눈길이 갈 만하다.

가난이 정치에서 희망을 찾아야

저자 신명호가 지적하듯 계급적 처지가 계급적 행동을 낳는다는 도식은 허술한 논리적 비약이다. 세상이 도식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는 도식을 따져 볼 일이다. 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양태에는 그럴만한 원인과 이유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걸 단지 의식수준의 문제로만 여긴다면 농부가 밭을 탓하는 일이다. 책에 인용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처럼 농사를 짓는 농부라면 밭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척박하면 척박함을 살펴 토양에 맞는 씨를 뿌리고 개간하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 주된 과제는 정치를 희망의 영역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사실 가난의 문제야 말로 정치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가난이 정치에서 희망을 찾을 때 진보정치도 희망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빈곤을 보는 눈> 신명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 2013년 12월, 304쪽, 1만5000원



빈곤을 보는 눈 -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자

신명호 지음, 개마고원(2013)


태그:#계급배반투표, #토마스 프랭크, #조너선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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