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월남전은 남의 돈으로 치르는 전쟁이다 보니, 병력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없었다. 물자는 물론이고 월급도 미군에게서 받다보니 필요 없는 인원도 파병을 해서 머릿수를 채웠다. 위로는 소장 사단장 밑에 행정, 작전 부사단장도 각기 준장이어서 사단에 별이 3개나 되었다(덕분에 나는 행정 부사단장이 탁구 칠 때 공을 열심히 주워야 했다). 아래로는 사단 본부에 인원이 2명밖에 없는 참모부에도 상사 급의 선임하사가 있었다.

내가 생각할 때 제일 어색한 일은 한국에서는 연대급에서도 제일 할 일이 없는(파월 전에 연대 정훈과에 있어 본 내 경험으로) 정훈장교가 대대급까지 배치되었던 일이었다. 그것도 한국처럼 대대 병력이 한 곳에 주둔하지 않고 중대가 몇 Km 씩 떨어져 있고 헬기로나 이동이 가능해 일반 병사들을 만날 수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그런 사정이니 정훈장교가 할 일이 있을 리가... 실제로 나중에 내가 만난 대대 정훈장교 출신은 파월 기간 1년 내내 시간을 죽이기가 너무 고되었다고 했다.

나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산처럼 쌓여 있는 군수물자들을 보고 미국의 군수물자 조달 능력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책에서 보니 한국전쟁 당시 소모한 총알 대비 죽은 병사의 숫자를 보면 병사 한 명당 총알 한 가마니 정도를 소모한 셈이라고 하던데 월남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전쟁에서 새로 생긴 군사 용어가 '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 '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융단을 깔듯이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았다. 위험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융단폭격을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로 볼 수 있다.

미국이 월남에서 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 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 1.5배나 됐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7200억 달러 (당시 한국의 1년 예산은 10억 달러 정도)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렸다.

월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남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 전쟁배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베트남은 거인 미국을 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즉 미국의 자존심을 마구 구긴 대가로 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것이다. 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 국제 금융 혼란 등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월남전의 피해는 월남만이 아니라 이웃에 있는 캄보디아에게도 미쳤다. 우리가 흔히 '킬링필드'로 알고 있는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은 1969년~1973년간 벌어진 미국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제1학살과 크메르루주 집권기간인 1975년~1979년까지 벌어진 제 2학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국방연구원의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미군은 베트콩이 캄보디아 땅을 지나간다는 이유로 이 곳에 4년 동안 폭격을 퍼부었는데, 이때 사망한 이가 60만 명이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미국의 학살책임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낸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캄보디아 폭격을 거부하다 군사법정에 기소됐던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 부조종사)은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증언을 한 바가 있는 정도다.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 만 9129t 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아메리카가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 만 t의 3 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 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쓴 "킬링필드의 진실"

궁핍한 처지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틴 베트콩 쪽에서는 힘든 전쟁이었겠지만 미군 쪽에서는 남아도는 전쟁 물자를 쏟아붓는 전쟁이었고 그 편에 붙었던 한국군은 덕분에 호강을 할 수 있었다. 모든 무기와 보급품을 미국에서 지원 받았기 때문에 고국의 가난한 군대 사정과는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물건이 남아돌아 낭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능한 한 하나라도 더 빼돌려서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애국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월남에서 수송 업무를 맡고 있었던 업체에서 주월 사령관에게 수송물동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부탁했었다. 그런데 사령관이 지시한 방법이란 것이 기가 막힌 것이다. 전방부대에 야간 요란사격을 많이 하라는 지시였다.  포탄의 수송량과 탄피의 반송량을 증가시켜 수송물동량을 증가시키는 방법이었다. 한 마디로 미군과 수송용역을 맡은 업체가 더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포탄을 많이 쏘아 없애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은 귀국할 때 사방 1m 정도의 나무상자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이나 구입한 물품을 담아서 갈 수 있다. 월남에서 보내온 귀국박스는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 이전에 한국인들이 단체로 외국의 문물과 대중소비문화를 받아들였던 역사적 사건에 해당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다.

사병들은 월급이 적고 피엑스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도 한정되다 보니 사실상 자기에게 할당된 박스에 물건을 채워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 몫의 박스를 월급을 많이 받는 장교나 하사관들에게 주기도 했다. 수단 좋은 사병들은 휴대식량으로 나오는 C-Ration이나 하다못해 한국에 가서 고물로 팔 수 있는 신주로 된 포탄의 탄피를 넣기도 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지 물건에 욕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소수의 결벽증환자들을 제외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모든 군인들은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하나라도 더 챙겨가려는 정신무장 하나는 투철했다.

그러나 사실은 베트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말단 소총중대의 경우 중대장이라도 돈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사병들이 귀국 박스에 담아 올 수 있는 건 탄피와 맥주캔뿐이었다. 그러나 적과 싸우러 다니는 일반사병의 경우 탄피를 주울 수도 만들 시간도 없으며 탄피를 모으기 위해 할 일없이 실탄사격을 할 수도 없었다.

손으로 실탄을 분해해서 화약을 쏟아버리고 탄피를 모으기도 했으나, 뇌관을 처리하지 못해 귀국선 안에서 터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결국 나중에는 탄피를 귀국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탄피 말고 일반 병사들이 모을 수 있는 건 알루미늄 맥주 캔이었다. 병사들은 부대 내외 심지어 그 나라 1번 국도변에 도로정찰을 나가서도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맥주 캔을 줍기도 했었다. 본질적으로 보면 요즘 독거노인들이 폐박스나 헌 병을 주워 모으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것은 노인들이 폐품 줍는 것은 개인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전쟁하러 온 군인들이 폐품을 줍는 것은 나라의 가난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태그:#월남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