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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랑 못 살겠으니까 네가 나가든지, 이 집을 내놓고 둘 다 나가든지. 어떻게 할래?"

지난 7월, 6개월의 동거 끝에 결국 포기를 선언했다. 내가 나갈 경우 내 몫의 보증금을 줄 수 없다는 동거인의 말에 내가 제시한 방법이었다. 더 이상 동거인과  함께 살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었다. 빚을 내 동거인 몫의 보증금을 내주고 나 혼자 남았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동거인의 애완동물 때문이었다. 동거인 방에서만 키운다는 조건으로 들여온 고양이였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동거인 방 안에서만 고양이를 키우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때는 여름, 더위를 많이 타는 동거인은 자주 방문을 열어두었다. 말은 못하고 끙끙, 신경이 쓰였던 나는 그날 밤 동거인에게 고양이가 나온다고, 방문을 닫으라고 성질을 냈다. 꾹꾹 참고 있던 서로가 부딪혀 파바박, 불꽃이 튀었다. 한밤중, 육탄전 직전까지 갔다.

동거인과의 갈등, 네 탓이 아니고 내 탓이더라

세탁기와 건조대를 번갈아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세탁기와 건조대를 번갈아 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 장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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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아랫배부터 뜨뜻한 것이 올라와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실 문을 열어두어서 화가 난 게 아니었으니까. 이미 쌓여있던 불만들과 말하지 못했던 스트레스가 화근이었고, 나는 그걸 어쩌지 못해서 시비를 걸었을 뿐이다.

애초에 동거인이 고양이를 키우겠다고 했을 때, 방 안에서만 키우면 괜찮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건 함께 사는 우리에게도 또 고양이에게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 어정쩡한 타협은 동거인과의 관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냥 '착한 척'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이렇게라도 상황이 마무리 된 게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씁쓸했다. 이제까지 나는 누군가와 '물리적으로' 함께 살았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함께 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우친 순간이었다.

내 첫 동거는 (보증금 한 푼도 없이) 친구집에 얹혀살면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아서 청소는 가끔 하고, 저녁마다 치맥을 하거나 싸돌아다녔으며, 틈틈이 마트에 가서 인스턴트 3분 요리를 사재기 했다. 빨래는 급박하게 돌리고, 건조대에서 걷어다 입었다. 이사를 2번 같이 했고, 3군데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보증금을 까먹었다. 우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이후에도 2, 3명의 동거인이 더 있었다. 청소는 함께 가끔 했고, 빨래는 주로 동거인들이 했으며 나는 가끔 요리를 했지만 주로 빈둥거렸던 것 같다. 집안 일로, 혹은 경제적인 문제로 싸워본 적이 없다.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이제까지의 동거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배려를 받았는지 올해 동거인을 보내면서 알게 됐다. 그때까지 사실 내가 잘해서 동거인들과 잘 지낸 건 줄 알았다.

올해 초 동거인과 살기 전, 주변에서 많은 조언을 받았다. 주요한 이야기는 '사소한 것을 참지 말고 그때그때 이야기하고 풀어야 한다'였다. 모두들 아주 사소한 것으로 싸우게 되니까. 그때그때 풀지 않고 쌓아두면 나중에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내 동거가 깨진 이유도 정확히 그게 문제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나름 용을 써봤는데 완전히, 아주 철저히 실패한 셈이다. 애를 쓰는 게 오히려 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동거인과 나는 쉽게 편한 사이가 되지 않았다. 청소, 쓰레기 버리기, 빨래, 장보기, 공과금 내기 등등 이야기 나누고 조율할 것 투성이인데 나는 이런 것들을 동거인에게 편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편할 때 빨래를 하고 싶어서 매주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청소를 꼬박꼬박 하고 싶기는 한데 혼자 하는 건 괜히 억울한 것 같은 상황도 일상이 되었다. 가스레인지랑 싱크대는 닦아도 닦아도 이내 더러워지는 것 같고, 장을 봐도 내가 먹고 싶을 때마다 계란도 라면도 없는 것 같았다. 동거인의 방에서 들리는 <무한도전> 소리는 왜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는지.

공동주거, 하우스메이트, 셰어하우스 그 사이 어디쯤?

처음부터 답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마주 앉아 해결책을 찾았던 적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자 하고 앉으면 더 싸움이 커졌다. 양보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님 우리가 정말 달랐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건 내가 동거인에게 착한 사람인 척 하고 싶은 것과 동시에 별로 양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함께 살면서 힘든 건 나와는 너무 다른 동거인 때문이 아니었다. 대신 완전 치졸하고 치사한 나를 자꾸 만나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치사해질 수 있는지 알면 알수록 경악스러웠다. 또 그걸 동거인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 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내 바닥을 그대로 보여주었더라면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이후 몇몇 지인은 나에게 그러기도 했다. 방 따로 쓰고, 화장실, 거실, 부엌 나눠쓰는 것만 하라고. 공과금 딱 반씩 내고, 공공구역 청소만 번갈아 가며 하고, 얼굴 마주칠 때만 인사하고 서로 사생활에 끼어들지 말라고. 나도 집에서는 그냥 잠만 자고 조용히 지내라고. 그렇게 살면 머리도 안 아플 텐데 뭘 그렇게 친해지려고 하냐고. 그저 '집만' 같이 쓰라고.

꼬박꼬박 월세를 내야하는 세입자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동거인을 구함으로써 월세가 줄어드는 건 엄청 큰일이다. 한 달 생활비가 반토막 나느냐 마느냐가 달렸으니까. 어디 월세 뿐인가. 함께 함으로써 좀 더 쾌적한 공간, 넓은 부엌과 거실, 교통의 편리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러니까 많이들 함께 살기를 결정하겠지.

친구와 함께 사는 사람들도 많고, 요즘은 하우스메이트를 구해 살거나 셰어하우스에 가서 사는 사람들도 많은 듯하다. 재미있는 건 같이 사는 모양새가 참 다양하다는 것. 한 사람이 차지하는 개인 공간의 크기, 함께 하는 공간의 크기, 함께 고민하는 책무, 집안 일의 분담 방법 등등에 따라 각기 다른 집들이 만들어진다.

함께 살기가 좋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으니까

 내가 그린 혼자먹는 저녁밥, 이왕이면 함께 먹는 밥이 맛있다.
 내가 그린 혼자먹는 저녁밥, 이왕이면 함께 먹는 밥이 맛있다.
ⓒ 장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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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머리로는 공과금 딱 반씩 내고, 공공구역 청소도, 쓰레기 당번도 공평하게 반반 나누고, 반찬통에 서로의 이름표를 붙이고, 마주치면 인사만 하며 지내는 건 영 재미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실컷 월세 내고, 힘들게 사는데 내 집도, 내 방도 아닌 잠만 자는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나도 동거인도 자기 집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상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혼자 사는 당신은 왜 굳이 그 월세를 혼자 부담하고 사는지, 왜 함께 사는 것을 고민하지 않는지, 반대로 이미 함께 살고 있는 당신들은 서로에게 얼마만큼의 거리를 가지고,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함께 사는 일에 젬병이라는 걸 깨달았는데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다. 그게 누군가가 보기에는 '좀 피곤한' 일이라고 해도. 작은 방을 한 칸씩 차지하고 혼자 앉은 우리가 만나서 함께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 지붕 아래 같은 솥에 지은 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으면 한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으니까.

가끔은 좀 피곤하기도 할 거고, 치사한 나를 자주 만나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니 종종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방문을 닫고 혼자 앉아 밥을 먹는 것보다 당신에게 내 치사함의 바닥을 쪽팔리지 않게 내보이는 방법을 연습하고 싶다.


태그:#동거,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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