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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에서 새벽에 갓 짜낸 생우유를 배달 받아 그것을 따뜻하게 데워 입 안 가득 머금는다. 우유의 진한 향기와 맛이 감동적이다. 학교에서 퇴근한 후, 다방에 가서 좋아하는 클래식을 들으며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집에 돌아와 잘 가꾸어진 화단을 내다보며 클래식과 커피를 즐기는 것도 큰 행복이다. 다가오는 겨울에는 꼭 스키를 배워보리라.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사와야겠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 원두도 찧어와야지…."

이효석의 수필들을 참고해 재구성한 그의 하루이다. 다방이라는 단어가 예스럽긴 하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 정도 삶이라면 꽤나 호사다.

이효석 문학관 내부에 설치된 것으로 그가 가장 윤택한 생활을 했던 평양 '푸른집'의 내부를 본뜬 것이다. 피아노, 축음기,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 등이 그의 생활양식을 잘 보여준다.
▲ 평양 '푸른집' 내부 이효석 문학관 내부에 설치된 것으로 그가 가장 윤택한 생활을 했던 평양 '푸른집'의 내부를 본뜬 것이다. 피아노, 축음기,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 등이 그의 생활양식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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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 '모던'했던 그곳

그의 이러한 서구적 취향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때 그리고 함경북도 경성 시절 주을 온천에서 서구식 생활을 직접 경험한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았던 1930년대다. 이때는 이미 일제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배경이 있었기에 그의 서구적 취향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가 서구적 생활을 향유한 곳은 당시의 서울 '경성(京城)'이 아니라 함북 '경성(鏡城)'과 평양이었다. 지방에서 누린 서구식 문화가 이 정도인데, 당시 서울이었던 경성은 얼마나 근대적이고 번화한 곳이었을까.

무려 36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만 생각하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대인 중 염상섭의 <만세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일제의 지배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문명을 향유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1907년생인 이효석이 별다른 저항 없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효석이 살았던 평양의 '푸른집'을 본떠 봉평에 만들었다.
▲ 평양 '푸른집' 외부 이효석이 살았던 평양의 '푸른집'을 본떠 봉평에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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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호의 <대중적 감수성의 탄생>에 따르면 1930년대 서울이었던 경성은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조선인 거주 지역인 북촌과 일본인 거주 지역인 남촌으로 나눠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에 종로와 본정(명동)의 상권이 형성됐다.

이때 경성에는 무려 6개의 백화점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인이 설립한 미쓰코시 백화점과 조선인이 설립한 화신백화점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우 360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짐작된다.

당시 조선인들은 이러한 백화점을 통해 근대적 소비문화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조선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한 상품시장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다.

채만식의 <탁류>에서 계봉이가 젊음을 뽐내며 백화점 직원으로 일했던 것도, 이상의 <날개>에서 주인공이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서 비상을 꿈꾸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1930년대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조차도 취직할 곳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경제가 악화된 때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은 근대적 소비는커녕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근대적 소비는 당대의 부유층에게나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효석은 전문학교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 살뜰한 아내와 부유한 처가가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준의 근대적 소비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효석을 포함하여 당시에 근대문명을 소비했던 지식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당대의 많은 모더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치부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식인으로서 역사의식이 없음을 질타해야 하는 것일까. 어느 쪽으로 판단을 하든지 이효석의 삶이 1930년대를 살았던 지식인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흥미롭다.

서구문명에 매몰돼 버린 이효석

이효석 문학관과 마주 보고 있는 북카페 '동'은 이효석이 함북 경성 시절 먼 길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았다고 하는 다방 '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수필 <고요한 '동'의 밤>의 모티프가 된 곳이다.
▲ 카페 '동' 이효석 문학관과 마주 보고 있는 북카페 '동'은 이효석이 함북 경성 시절 먼 길에도 불구하고 자주 찾았다고 하는 다방 '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수필 <고요한 '동'의 밤>의 모티프가 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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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구적 취향은 여인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평양 창전리 '푸른집' 시절에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 다니엘 다리유의 사진을 걸어놓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컸는지 <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Miss 다니엘 다류>라는 수필을 쓰기도 했다. 한편 그의 서구 여인에 대한 동경은 수필 <내가 꾸미는 여인>에도 잘 드러난다.

"조선적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경지나-그러므로 이상이라도 있겠으나-르누아르의 '프랑슈'나 '말토'쯤의 여인이면 이상에 가깝다 할까. 하필 '프랑슈'나 '말토'를 드는 것은 그들의 높은 지적 계급을 원함으로써이다." (<내가 꾸미는 여인> 중에서)

이 수필에서도 엿보이는 바이나 그는 서구의 것은 '우월한 것'으로, 조선의 것은 '열등한 것'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서양의 미에 비하여 우리의 것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편견도 아무 것도 아니다. 인간이나 생활의 미에 있어서 이곳의 것이 그곳의 것에 비길 바 못 된다고 말하여도 그것은 반드시 독단과 편기(偏嗜)에서 나오는 말만이 아닐 듯하다... 미의 특정한 기준이 다른 것은 없겠으나 바다빛 눈과 낙엽빛 머리카락이 단색의 검은 그것보다는 한층 자연율에 합치되는 것이며 따라서 월등히 아름다움은 사실이다."(<화춘의장> 중에서)

서구에 대한 동경이 서구의 기준으로 조선을 평가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 지식인은 이효석만이 아니다. 급격한 근대문명의 유입으로 기존 조선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던 탓일까.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런 태도는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낙후된 조선의 현실 속에서 세련된 근대문명은 충분히 그들을 홀렸을 테다.

그의 서구지향적 태도는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조선에 대한 환멸이 불러온 반작용이었다. 이는 그가 오랜 시간 고향을 외면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고향 상실감을 회복하고자 서구적인 것에서 고향의 이미지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자기부정에 다다른 그의 생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태그:#이효석 문학관,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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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로 세상이 바뀌지 않아, 하지만 그냥 있을 순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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