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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공 이순신 묘소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
 무의공 이순신 묘소로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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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의 성공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한 명장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한데 그와 거의 비슷한 시대를 살다 간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이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은 충무공과 한글 이름이 같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참전, 여러 차례에 걸쳐 승리를 이끌어낸 무장이다.

이 무의공 이순신의 묘소가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그의 묘를 찾은 것은 지난 16일 오후였다. 햇볕이 따갑게 쏟아지는 날, 그를 만나기 위해 나섰다. 양철원 광명시 학예연구사가 동행했다. 양 학예연구사는 무의공의 삶에 상당히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는 향토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지나 찾아간 무의공의 무덤은 소박했다. 봉분은 방형분이고, 앞에는 문인석, 망주석, 상석, 향로석과 함께 문방석이 놓여 있었다. 문방석이 놓인 이유에 대해 양철원 학예연구사는 "당시에는 무신들이 문신들을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의공 역시 한 때는 문신을 꿈꿨던 것 같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스물다섯의 나이에 무장의 길로 나섰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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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공 무덤 앞에는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으나,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묘갈은 비석과 같은 것으로 처음에는 비석과 구분되었지만, 후대에 와서는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묘갈은 비록 사라졌으나 거기에 적혀 있던 내용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묘갈의 글은 오리 이원익 대감의 손녀사위인 허목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무의공 무덤과 뚝 떨어진 자리에 또 하나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무덤 앞에는 작은 크기의 문인석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부인의 무덤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양철원 학예연구사가 건네준 '완천군의 갈-묘비명' 해석본에 "부인 파평윤씨가 78세에 세상을 떠나자 같은 자리에 합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니 부인은 무의공과 합장이 되어 있을 것이니, 그 무덤은 다른 이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작은 봉분은 무의공 소실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된다. 소실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판서 남이공의 장첩이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날 무의공 무덤을 찾은 이는 우리 말고도 또 있었다. 무의공 묘소로 가는 길에서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과 마주친 것이다. 어르신은 무의공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셨다.

무의공 이순신 묘소로 가는 길
 무의공 이순신 묘소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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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면서 "다음 날, 노인들과 단체로 역사답사를 할 예정이라서 미리 현장을 확인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어르신은 충현박물관과 무의공 묘소를 답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무척 반가웠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 오리 이원익 대감과 무의공 이순신 장군을 잘 알고 있고, 역사문화답사를 하기 위해 광명시를 찾아오신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의공의 무덤 주변을 둘러보는 어르신을 보면서 무의공은 잊지 않고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서 절대로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의공 이순신의 흔적, 우리나라 해군에 남아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 있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역시 죽어서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긴 위인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충무공 이순신에 비해서 유명도가 떨어진다 해도 그가 조선시대의 명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 해군에도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잠수함이 있기 때문이다.  양철원 학예연구사는 무의공 이름을 딴 잠수함 '이순신함'을 방문한 적이 있단다. 무의공의 후손들이 1년에 한 번씩 잠수함을 방문할 때 동행한 적이 있다. 무의공의 이름을 붙인 잠수함이 있다는 것은 그의 이름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에 있는 문방석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에 있는 문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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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나라 해군에는 충무공 이순신 이름을 딴 구축함이 있다. 조선시대의 명장인 두 이순신 장군을 우리나라 해군에서도 길이 기리고 있는 것이다.

무의공이 태어난 해는 1554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45년에 태어났으니, 무의공이 충무공보다 9살이 적다. 무의공은 지금의 광명시 일직동인 금천에서 태어났다. 무의공의 무덤 또한 일직동에 있으니, 그의 문중이 이 지역에 많이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양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무의공은 선조 때인 1578년,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신의 길로 들어섰다. 선조는 활쏘기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를 선조는 무척이나 아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적의 모함을 여러 차례 받아 관직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양철원 학예연구사의 평가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충무공 이순신과 닮은 점이 많은 것 같다. 처음에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조선시대 대학자인 김성일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무의공이 충무공을 처음 만난 것은 1591년이었다. 이 때 무의공은 방답진첨절제사가 되어 부임하는데,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해 만나게 된 것이다. 무의공이 충무공을 상관으로 모시게 되었다. 덕분에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에 세워진 망주석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에 세워진 망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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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공은 1592년, 충무공을 따라 해전에 나서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옥포해전, 합포해전, 고성해전, 노량해전, 사천해전 등이다. 무의공은 당항포 해전에서도 승리를 이끌었다. 그럼에도 무의공은 해전에서 세운 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 같다.

충무공이 선조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일에 전력한 자인데도 상을 주는데 있어 홀로 순신만이 빠졌으니 이는 싸운 공은 있어도 싸운 상은 없다"는 장계를 올린 것에서도 드러난다. 충무공의 장계 덕분에 무의공은 상을 받게 된다. 

무의공은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이 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했다. 충무공 사망 이후 무의공은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 했다. 포도대장이 되었지만 무고한 사람을 장살(杖殺)했다고 해서 파직되었고, 이후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다음 해에 병마절도사가 되었지만 파직되었고, 수원부사가 되었다가 또 파직됐다. 무의공이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배경에는 그를 음해하거나 모함한 정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양철원 학예연구사는 "무의공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일생을 더듬어 올라가는 게 쉽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양 학예연구사는 '무의공 이순신의 생애'를 짧게나마 정리해 보관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진지한 광명시 향토사학자의 면모가 엿보였다.

양 학예연구사는 "무의공의 장수 능력은 객관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에 감히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라며 "선조의 신임이 무척이나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평가했다.

무덤은 초라하지만... 그의 생애는 결코 초라하지 않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 문인석
 무의공 이순신 장군 묘소 앞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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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학예연구사는 무의공의 성격에 대해서는 "무인답게 활달하고 시속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풀이했다.

신도비명에 따르면 그는 변방에 있을 때 사람을 통솔하는데 쉽게 하고 부하를 대하는 태도도 용서하고 신분이 낮은 하졸들에게도 반드시 음식을 나눠 먹이므로 부하들이 전투에 사력을 다해 나섰다고 한다. 반면 법을 어기고 사적인 것을 쓰는 사람을 보면 가차 없이 대하는 것이 권력과 지위에 거리낌이 없으니 중요한 자리에 있는 자가 좋아하지 않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단지 선조가 그 마음을 알아주어 발탁했다. - 양철원 학예연구사의 <무의공 이순신의 생애>에서

이런 성격이었으니 그를 모함하는 정적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무의공이 끊임없이 모함과 견제를 받은 것에 대해 양 학예연구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한 권력의 공백기에 새롭게 권력을 잡은 북인 중심세력이 종친이면서 무인으로 직접 참전해서 공을 세운 무의공을 견제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무의공은 양녕대군의 6대손이다.

무의공은 1610년 9월에 병마절도사로 근무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광해군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무의공은 세상을 떠난 뒤에 잊히지 않고 인정을 받았다. 인조 때는 좌찬성으로, 효종 때는 우의정과 완천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서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무의공 이순신 장군의 무덤은 초라하고 퇴락했지만 그의 궤적을 따라가보니 그의 생애는 결코 초라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태그:#이순신, #무의공, #충무공, #광명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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