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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의 좌표인 한암 대종사(상원사 홈피 갈무리)
 한국 불교의 좌표인 한암 대종사(상원사 홈피 갈무리)
ⓒ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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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위기가 불교 개혁의 기회가 될 수 있을까. 한국불교학회는 10월호 학회지를 발간하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인 한암 큰스님을 재조명했다.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인 한암 스님을 비추는 것은 아마도 작금의 조계종 위기를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큰 뜻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이번 학회지는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의 '근대불교에서의 한암의 역할과 불교사적 의의', 이덕진 창원 문성대학교 교수의 '한암의 선사상과 계율정신'이 논문 화두로 나왔다.

상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

일제강점기(1941∼1945)에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인 조선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1876∼1951) 스님. 근대 한국불교의 대표적 선승으로 일제강점기 불법수호의 정신적 기둥이 된 선지식인이다. 스님은 당대의 사상적 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 수행 정진으로 조계종의 종조를 확립했다.

스님은 특히 선종과 교학의 병행, 선과 염불의 조화 등 극단적 가치에 편중되지 않고 널리 원융무애(막힘과 분별과 대립이 없으며 일체의 거리낌이 없이 두루 통하는 상태)한 선사상을 펼친 인물로 통한다.

스님은 스물두 살 때 금강산 유람도중 장안사에서 행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이후 참선수행에 나섰다. 1905년 스님은 양산 통도사 내원 선원의 조실로 후학을 지도하다가 서른다섯에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던 중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면서 오대산으로 자취를 감췄다.

스님은 오대산 상원사에 들어간 이후 27년 동안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1년 조계종이 출범하자 초대종정으로 추대되어 4년간 종단을 이끌었다.

절을 태우려 하자 '나까지 태우라'하며...

한암 스님이 몸을 불사르며 지켜냈던 오대산 상원사 전경(홈페이지 갈무리)
 한암 스님이 몸을 불사르며 지켜냈던 오대산 상원사 전경(홈페이지 갈무리)
ⓒ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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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법명은 중원(重遠)이며 한암은 법호이다. 1876년 강원도 화천군에서 태어났다. 1897년 금강산을 유람하다가 기암절벽의 바위 하나하나가 부처와 보살의 얼굴을 닮은 것을 보고 감격하여 출가했다.

스님은 금강산 장안사에서 수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금강산 신계사 보운강회에서 수도하던 중 지눌의 '수심결(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 읽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전국의 고승을 찾아 구도의 길에 올랐다. 1899년 정암사 수도암에서 경허(鏡虛) 스님으로부터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도를 깨달았다. 1905년 통도사의 내원 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1910년 평안북도 맹산군 우두암(牛頭庵)에 들어가 수행에 정진하였다.

스님에 얽힌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6.25전쟁 때 상원사를 지켜낸 일이다. 1.4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절을 불태우려 하자 스님은 법당에 머무른 채 불을 지를 것을 권하였다. 이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어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그리하여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만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암 스님, 조선불교의 표상이 되다

한암 스님은 오랜 선승으로 통하지만, 산사에서도 조계종의 미래를 준비했다. 승려교육의 제도적 시스템 확립, 선종교학을 통한 수행의 기초 구축, 승단의 역할 정립, 조선불교의 간화선 정통성을 위한 법맥과 계보 확립 등 당시 조선불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오직 스님의 성실함만으로 만든 결과였다.

스님은 사찰이 가진 특별함에 대해, 이 또한 선승이 버리지 못하는 집착이라고 일갈했다. 즉, 부처님 모신 법당 안에서 경을 읽고 외우는 주지 스님의 행동만이 수행이 아니라는 것. 수행의 길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으로 특별한 자의 특별한 일이 아님을 강조했다.

"우리나라에 불법이 들어온 이후 재가자와 출가자를 막론하고 참선하여 도를 깨친 이가 무수히 많습니다. 꼭 부처님 앞에서(사찰에서) 참선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무를 보는 복잡한 가운데서 득력하는 것이 적정한 곳에서 득력하는 것보다 10만억배나 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로지 당사자의 신심이 얼마나 견고한가. 그것이 관건입니다"

당시 한암 스님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작금의 조계종 상황과 많이 닮아있다. 승가 정체성의 혼미, 깨침의 개인적 안주, 막행막식(거리낌 없는 일탈)의 문제 등이 그러했다.

스님은 이를 올바로 잡기 위해 다섯 가지 계율을 정했다. 첫째 청정한 수행 공간을 확보, 둘째 청정한 승가공동체의 구축, 셋째 불교전통의 확립, 넷째 깨침의 대사회적 실천, 다섯째 계행의 중시였다. 특히 스님은 계행의 중시를 통해 삼학(=계학, 정학, 혜학)을 복원시키고자 했다. 이로써 불교가 지닌 선으로의 회복을 강조했던 것이다.

당대의 불교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한암 큰스님. 한국불교의 전통이 위협받고 법맥을 이어갈 큰스님들이 은둔자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 현 시점에, 그가 보여준 불교적 도덕공동체의 삶이 무엇인지 작금의 조계종이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인천불교신문> 공동 게재



태그:#한암 스님, #상원사, # 조선불교조계종, #대한불교조계종, #불교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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