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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릉 쿠르릉 쿠릉."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막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밖에서 이상한 굉음이 들렸다. 무엇인가 거대한 것이 지나가는지 베란다 유리창이 미세하게 떨린다. 음모라도 꾸미는 듯 비밀스럽기까지 한 저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길다란 포신을 앞세운 탱크가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집 앞 도로에 탱크가...

전시된 탱크는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굴러가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신기했다. 그래서 다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지켜보았다. 강화로 이사 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니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때는 탱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신기해 했는데 지금은 훈련을 나가는 장갑차나 탱크를 보더라도 그때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흔하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접하다 보니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끔 무디어졌다. 

 외성탐방로를 걷고 있는 나들길벗들.
 외성탐방로를 걷고 있는 나들길벗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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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이 위치해 있다. 그렇다 보니 안보상의 필요에 의해 북쪽의 해안가에 철책을 쳤다. 또 군부대와 군사시설들도 곳곳에 들어서 있고 해안을 경계하는 병사들 역시 많이 주둔하고 있다.

과거에도 강화도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시대에도 강화도는 요충지였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수도를 옮긴 강화 천도 시기에는 새로운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물샐 틈 없는 노력들이 이어졌다. 그것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어찌 보면 강화도가 우리나라의 안전판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강화도는 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피난을 오던 곳이었다. 지금이야 하늘에서도 공격을 하니 강화도라고 해서 특별히 더 안전하지도 않겠지만, 옛날에 강화도는 그야말로 방어 시설이 잘 되어있는 금성탕지(金城湯池)였다.

육지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지만 물살이 센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니 빤히 건너다 보이는 곳을 쳐들어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몽골도 강화로 건너올 수 없었고 또 정묘호란 때 청나라 역시 바다 너머 김포에서 을러대기만 했을 뿐 쳐들어오지는 못했다. 

설혹 바다를 건넜다 할지라도 마땅히 배를 댈만한 곳이 없었다. 바닷가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거나 아니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이 펼쳐지니 들어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수성에 더해 고려시대부터 강화도를 방비하기 위한 시설물들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니, 말 그대로 보장지처(保藏之處))가 된 셈이다.

 강화 동쪽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
 강화 동쪽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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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를 중요시하면서 요새화 시킨 것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몽골은 주변 지역을 위협했다. 고려 역시 몽골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 인근에서 피살되자 몽골은 이것을 기회로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대항하였으나 수도 개경이 포위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화의를 성립하게 된다.

몽골군을 막기 위해 쌓은 강화 외성

몽골이 철군하자 고려 조정은 장기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새로운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내성, 외성, 중성을 쌓았다. <고려사>에는 고종 24년(1237)에 외성을 쌓고 37년(1250)에 중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에는 고종 22년(1235) 12월에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우가 주와 현에서 공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징발해서 강화 연안의 제방을 더 높게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몽골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온다. 그러나 강화도에 있던 고려의 중심 세력들을 굴복 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고려와 몽골은 화의를 맺는다. 몽골은 강화도가 눈엣가시처럼 생각이 되었는지 화의의 조건으로 강화 천도 시절의 궁궐과 성들을 다 부수기를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요구대로 강화도의 궁궐과 성들을 허물었다. 몽골의 사절들은 빨리 부수기를 독촉했다. 성을 허물어뜨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고 병사들의 한탄과 고통스런 울음 또한 그에 버금갈 만큼 컸다.

사적 제 452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쌓은 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길이가 약 3만7076척(약 12킬로미터)에 달하며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몽골의 요구에 의해 성을 파괴한 후로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조선시대에 와서 강화도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다시 쌓았다.

 조선 정조때 쌓은 강화외성의 흔적.
 조선 정조때 쌓은 강화외성의 흔적.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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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숙종 임금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강화도를 요새로 만들었다. 즉위 초 병조판서를 보내 지형을 살펴보게 한 뒤 고려시대 외성의 흔적을 토대로 강화 해안의 돌출부에 48개의 돈대를 설치했다.

숙종은 강화도를 하나의 큰 성으로 만들고자 했다. 강화 전 해안에 돈대가 설치되자 각 돈대를 연결하는 토성을 쌓도록 했다. 그래서 해안 방어상 중요한 위치에 있던 강화해협의 적북돈대에서 초지까지 약 40리에 이르는 토성을 쌓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거나 들어서 알고 있는 성은 돌로 쌓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성의 높이가 높을 뿐만 아니라 돌 한 개의 크기 또한 커서 그 규모에 경탄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강화의 외성을 볼 때는 잠시 석성(石城)은 잊도록 하자. 돌로 쌓은 성에 비교하면서 강화 외성을 보면 실망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외성의 진면목을 느끼려면

강화 외성은 흙으로 쌓은 성이었다. 그렇다 보니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무너져 내려서 지금 남아있는 토성 구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구나 토성을 따라 도로가 나면서 성은 더 왜소해졌다. 도로를 만들 때 흙을 돋워서 키를 높이다 보니 외성과 도로의 높이가 거의 비슷해져 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일러주지 않으면 외성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외성을 나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외성을 나무가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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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에서 더리미까지 흙으로 쌓은 외성이 남아있는데, 그곳은 '외성탐방로'로 지정해놓아서 성 위를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차도와 나란히 있는 탐방로를 따라 걸어서는 성의 면모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다.

외성은 성 아래로 내려가서 밑에서 위로 올려다봐야 비로소 성의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바다 건너 김포에서 강화를 바라보자면 해안을 따라 쌓은 외성 때문에 안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모습만 보고 섣불리 강화외성을 판단하지는 말 일이다.

외성은 해안을 따라가며 쌓았기 때문에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따라 무너지고 깎여 나가는 곳이 생겼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지만 돌로 쌓아도 마찬가지였다. 허물어지고 무너질 때마다 다시 쌓기를 반복하면서 근세에까지 유지되었다.

영조 때 강화유수였던 김시혁은 토성인 외성을 벽돌을 이용한 전성으로 쌓자고 주장했다. 영조 19년인 1743년에 중국 연경의 전성을 모방하여 구운 벽돌로 외성을 쌓게 되었다. 벽돌을 이용한 외성의 개축공사는 1744년 7월에 끝났다. 그러나 다음 해의 장마 때 성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자 다시 돌로 성을 쌓았고, 이후 강화 외성은 벽돌을 구워 쌓은 전성과 석성의 혼합된 상태가 되었다.

외성의 유지와 보수에는 많은 노력이 들었던 것 같다. 정조 3년인 1779년에 강화유수가 왕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 이러한 고충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벽돌로 쌓은 성은 곧 무너져 갑곶 주변의 수 리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 그동안 벽돌을 돌로 바꾸어 쌓고 있는데 1년에 3백보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마다 이렇게 축조했지만 50리 중 겨우 그 절반을 축조했고 옥포의 석성은 또 무너졌사옵니다. 지금의 이 성역은 빙빙 도는 고리와 같아서 민력이 항상 수고롭기만 할 뿐 편할 날이 없습니다."

 길 아래로 내려와서 올려다본 외성의 모습.
 길 아래로 내려와서 올려다본 외성의 모습.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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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쌓고 보수하는 공사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왕에게 이런 탄원을 했을까. 한 곳을 보수하면 또 다른 곳이 무너지고 허물어졌으니, 이는 마치 둥근 원을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이 끝이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백성들의 고충이 말할 수 없이 컸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오두돈대 옆에는 구운 벽돌로 쌓은 외성이 남아 있는데 이는 지금으로부터 270년도 더 전인 영조 임금 때 쌓은 것이다. 뒤를 이은 정조는 수원의 화성을 벽돌로 쌓았다. 강화 전성을 쌓으면서 축적된 기술력으로 마침내 50년 뒤 수원의 화성을 완성 시킨 것이리라.

철책은 현대의 외성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물러남에 따라 벽돌로 쌓은 전성도 견디지를 못하고 더러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성 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 덕분에 일부나마 남을 수 있었다. 나무가 자라면서 성의 벽돌들을 품어 버렸다. 그래서 오두돈대 옆 전성 구간에 가보면 돌출된 나무뿌리 속에 벽돌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앙코르와트의 석조유적들처럼 강화의 벽돌로 쌓은 외성도 시간과 함께 나무와 하나가 되어 버렸다.

무너지고 허물어져 내리면 다시 쌓고 또 쌓았던 강화 외성이다. 그렇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800년 이상을 버티어 왔다. 비록 웅대하지는 않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기리고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은 외성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출발지인 갑곶돈대에서 종착점인 초지진까지 17킬로미터를 걷는 내내 강화 외성과 더불어 간다. 강화외성은 단순히 강화를 지키는 데 끝나지 않고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방비책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강화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일선이었고 그 맨 앞에 외성이 있었던 셈이다.

 민통선 안의 철책을 따라 걸었던 '민통선 평화걷기'의 모습.
 민통선 안의 철책을 따라 걸었던 '민통선 평화걷기'의 모습.
ⓒ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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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무너지고 허물어져서 흔적만 남아있는 강화외성이지만 그 시절에는 얼마나 장대했을까. 또 성을 쌓고 방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인가.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강화외성을 보면서 옛날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바닷물에 쓸려 나가면 연구하고 보완해 나가던 옛 사람들의 지혜와 수고로움을 외성에서 느낄 수 있다.

어찌 생각하면 현재에도 외성을 수리하고 보완하면서 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외성은 과거처럼 흙이나 돌로 쌓지 않는다. 강화 해안을 따라가며 쳐놓은 철책이 바로 현대의 외성이 아닐까.

과거의 성이 밖에 있는 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면 현대의 철책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 외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철책 밖으로 넘어갈 수 없다. 철책은 네 발 달린 생명체의 출입을 금지한다. 두 발 뿐인 새들은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 드나들 수 있지만 네 발 동물들은 그것을 통과하지 못한다.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철책을 넘어갈 수 없다.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가며 있던 외성은 그 존재만으로도 적의 침입을 막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처럼 현대의 외성인 철책 역시 날카로운 가시를 촘촘하게 달고 적의 접근을 완강하게 불허한다. 강화도의 외성은 형태만 달리 했을 뿐 지금도 여전히 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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