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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작품 해제

이 작품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이다. 나는 그 길에서 고향 출신의 한 순결한 파르티잔을 만났고, 그분이 위만군의 총탄에 불꽃처럼 산화한 북만주 깊은 산골짜기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친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임시 긴급교직원회의

 

여름방학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일과 도중 갑자기 임시 긴급교직원회의가 열린다는 전달이었다. 그런 일은 좀처럼 드물기에 교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2층 큰 교무실에 모였다. 나는 그 무렵 다른 교무실에서 있었기에 그날 임시 교직원회의 때는 교장 자리와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그날 교장 선생님의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진 걸로 보아 예사로운 회의가 아님을 눈치챘다. 교감 선생님 역시 상기된 얼굴로 그날 임시 교직원회의를 열게 된 까닭을 말했다.

 

교장이 재단 이사장에게 불려갔다. 재단 이사장은 어느 학부모가 보낸, 협동조합 이익금 잘못 사용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편지를 교장에게 건넸다. 그 편지를 전해 받은 교장은 자기반성은커녕 학교에 내려오자마자 곧장 임시 긴급교직원회의를 열게 하고, 그 편지 전문을 교감에게 대신 읽게 했다.

 

"… 이 편지를 청와대, 검찰청, 언론기관으로 보내려다가, 차마 내 자식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을 고발할 수가 없어 정아무개 재단이사장님에게 보내오니 시정바랍니다. 만일 이를 시정치 않으면 관계당국에 고발조치할 것입니다.  …."

 

그 편지를 보낸 이는 지난 학년도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협동조합 이익금으로 교사들이 연수라는 이름으로 해외여행 간 이야기와 함께 다가올 여름방학에는 중학교 교사들도 해외연수를 가는 것에 대한 그 부당성을 아주 조리있게 말했다. 그리고 중학교 해외연수비 일부를 육성회 임원들을 통한 모금하는 것에 대한 반발 등을 학부모 처지에서 아주 신랄히 지적했다. 그 편지 낭독이 끝나자 교장은 격앙된 소리로 교사들에게 다그쳤다.

 

"이 편지의 제보자는 학부모의 이름을 빌렸지만, 이는 내부고발자 소행이다. 아니면 우리 선생님 가운데 누군가 그 학부모에게 고자질한 결과다. 학부모의 편지 문장력이 매우 뛰어나다. …."

 

서당 훈장이 습자 시간에 먹물을 묻힌 아이는 제쳐두고 깨끗한 옷을 입은 아이에게 먹물을 묻히지 않았다고 서당에서 쫓아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날 임시 긴급교직원회의에서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교장과 교감은 내 뒤통수에다 대고 내부 고발자의 소행이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순간 그 타깃이 나를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내가 일어나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재단이사장에게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군지 모른다.

 


강원 산골로 내려오다

 

임시 긴급교직원회의는 아주 싱겁게 끝났다. 결과적으로 교장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블랙 코미디였다. 하지만 일부 교사들은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내부 고발자로 나를 지목한 듯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 사실이 제삼자를 통해 내 귀에까지 전달되고 항의까지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그 뒤로도 동료들에게 '내가 아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게 웃기는 일이라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전 현직 대통령, 국무총리, 최소한 장관급 이상 고위직의 부정이나 비리, 독재를 지적하거나 비판하지 그 이하는 건드리지 않고 있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요, 내 스스로 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상사나 동료교사들에게 별별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입을 닫고 살았다. 그때 나는 큰 아이가 대학교에, 둘째가 고교에 재학 중이기 때문이었다.

 

일부 교사는 내 앞에서 빈정거리거나, 내 뒤통수에다 '삐딱하다' '모나다' '혼자 잘난 체하다' 는 등의 말들을 불쑥불쑥 내뱉으며, 실실 웃고 헛소리쳤다. 아주 새파란 후배 교사마저도 빈 교실로 나를 부른 뒤 "당신 혼자 잘난 체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지금도 그때 당한 수모만 생각하면 새벽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에 다수결이 경우에 따라 옳지 않는 것도, 아무리 좋은 사회제도라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가 부정부패해 비리를 저지르면 말짱 허사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왜 이 나라가 그동안 여러 번 정권이 바뀌면서 사정의 칼날을 휘둘러도 부정부패 비리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 까닭도. 
 

나는 묵묵히 몇 해를 버텼다. 아내가 그즈음 말 없이 표정이 굳어진 남편의 낌새를 눈치 채고 먼저 용단을 내렸다. 아내는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말무더미 마을에다 폐가 직전의 집을 한 화가로부터 10년 기한으로 거저 빌려 손수 고치면서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그만 이즈음에 후배를 위하여 물러나세요."

 

아내는 에둘러 말했다. 남편에게 가족을 위해 더 이상 굴욕적으로 살지 말라고 거듭 충고했다. 나는 2003년 1학기를 마치고 조기 퇴직하려다가, 그래도 내심 애초대로 정년퇴직을 하겠다고 한 학기를 더 버텼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자존심을 구길 수 없어 마침내 사표를 냈다.

 

나는 "버려야 새 것을 얻는다"는 한 스님의 말처럼 그동안 40여 년간 서울생활의 인연을 떨치고, 담담한 마음으로 교단을 끝낸 즉시 강원도 산골마을로 내려왔다.

 


침술원 이야기

 

나는 이번에 재발한 어깨 통증은 어쩌면 치유 불능 상황에 이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십 년 전에 오십견을 고쳐주던 서울 신촌의 한방병원이 떠올랐다. 하지만 침을 하루 이틀 맞아 완쾌할 것 같지 않은 데다가 교통도 불편하기에 그 병원에 가는 일은 단념했다. 아내가 이 고장 토박이에게 수소문하자, 이웃 마을의 한 침술원을 소개해 주었다. 요즘은 웬만한 산골길도 다 포장이 돼 있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여태 포장이 안 된 흙길로, 차가 서로 비켜갈 수 없도록 좁았다.  

 

그 침술사는 머리가 허옇게 센 70대의 노인으로 옛날 이야기 속 산중 도인의 모습이었다. 당신도 젊은 날 한때는 서울에서 사업도 한 적이 있었다고 얘기하면서, 당신이 일부러 이 산골을 구해 손수 흙집을 지었다고 했다. 침술원은 집 전체가 나무와 흙뿐으로, 온통 흙 냄새와 소나무 냄새를 풍겼다. 집 내부도 온통 황토와 나무였고 지붕조차도 너와로 이었다. 침술사 부부는 아흔의 아버지를 봉양하며, 소문 듣고 찾아온 환자들에게 침을 놓아주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침술원은 깊은 산골에 있는데도 환자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뒤꼍에 주차한 차량 번호를 보니 강원도뿐 아니라 경기도, 경북 번호판까지 보였다. 나는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린 뒤 순번에 따라 침을 놓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 방은 마치 동굴 같은데도 밝고 안온했다. 지붕 한가운데 유리로 창을 냈고, 창이 통유리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자연 채광으로 방안은 산골 집답지 않게 매우 밝았다.

 

침술사는 참 환자를 편케 대해 주었다. 그는 나를 눕힌 뒤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명의일수록 발병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내고, 거기에 따르는 적확한 진료와 처방을 하기 때문이다. 침술사는 문진이 끝나자 팔과 손등, 그리고 고개와 머리에다 침을 꽂은 다음 어깨에다가 침으로 흠집을 내고 부항기로 피를 뽑았다. 그런 뒤 팔과 등에다가 쑥으로 뜸질을 했다. 나는 진료를 받는 동안 눈을 감은 채 마음속으로 빌면서 두 손을 모았다.

 

"60년을 살았다면 적게 산 인생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여태 한 편밖에 못 썼다. 만일 이제 다시 내 팔이 낫는다면 오직 작품 쓰는 일에 전념을 하겠습니다. 가능한 다음 세대에게 나라를 빼앗긴 시절의 진짜 애국자와 지난 역사를 아주 쉽고 바르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겠습니다.…." 

 

한 파르티잔의 사진 액자

 

33세 젊은 나이로 북만주 깊은 산골짜기에서 위만군(괴뢰 만주군)의 총알을 벌집처럼 맞고 장렬하게 산화한, 한 파르티잔의 사진액자를 내 글방 서가에 모셔둔 지 5년이 지났다. 내가 그 분의 사진을 어렵게 구해 액자에 담아 글방 서가에 모실 때만 해도 곧 그 분을 모델로 작품화할 생각이었다.

 

2000년 중국 헤이룽장성 현지답사를 마치고 귀국한 뒤 곧 집필을 시작했으나 보름 동안 200매 남짓 쓰고는 그만 벽에 부딪쳐서 중단하고 말았다.

 

그 뒤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채, 여태 컴퓨터 내 문서 함에서 마치 예금이 몇 푼 남지 않은 휴면계좌처럼 잠자고 있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애써 구한 자료가 대부분 한어(중국어)라서 우리말로 번역한다고 조선족 동포를 만나러 다녀야 했다. 그렇게 비싼 돈을 들여 자료를 번역해도 1910~40년대의 북만주의 정서가 쉽사리 내 머리 속에 잡히지 않았다. 체험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글이 쓰이질 않았다. 작가에게 글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주문이 줄줄 나오지 않는 무당과 다름없다. 나는 더 이상 그 작품을 쓰지 못하고 이날 입때까지 무거운 부담 속에 세월만 보냈다.

 

진료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자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새 나는 잠을 아주 달게 잤다. 언저리에는 침도, 뜸도, 부항기도 모두 치워져 있었다. 나는 겉옷을 입고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벌써 깨셨어요. 한잠 주무시라고 나왔는데…. 침을 맞고 한 잠 자면 더 이상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침술사가 아내와 함께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가 나를 맞으며 말했다.

 

"아주 맛있게 잘 잤습니다."

 

나는 대답을 하고 벽시계를 보니 한 시간은 더 잤다. 나도 침술사 부인이 건네준 따뜻한 녹차를 마신 뒤 아내를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침술사는 나에게 사흘에 한 번꼴로 침술원에 오라고 했다.

 


징검다리 돌덩이 하나

 

나는 그 뒤 네댓 차례 침술원에 다니면서 진료를 받자 어깨 통증이 거의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차도를 말하자, 침술사는 이제 그만 와도 좋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절대 어깨를 무리하여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람은 "뒷간에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고 한 말처럼, 그 뒤 나는 곧장 '들꽃' 집필을 시작하지 않고 내내 딴 일 - 주로 텃밭 가꾸는 농사일과 뒷산에서 군불용 땔감을 마련하는-로 소일했다. 내 잠재의식 속에는 늘 그분의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짓눌렀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다시 붓을 들지 못한 것은 게으름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일제강점기 때 만주 독립운동사, 특히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연구 부족에다가 자료 준비 부족, 그리고 나 자신이 그런 고결한 분의 이야기를 제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 등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면에 늘 잠재된 내부고발자라고, 동료나 후배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그 울분으로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다시 심한 열병으로 한 닷새 몹시 앓았다. 회복기 병상에서 한 혁명가의 전기를 읽다가 이런 대목을 발견했다.

 

"네가 모든 것을 다 이루려고 하지 말라. 너는 시냇물의 징검다리 돌덩이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 다음은 네 후배나 후손이 할 것이다."

 

이 얼마나 폐부를 찌르는 말인가. 꼭 나를 두고 한 말로 들렸다.

 

"그래, 나는 지하 깊숙이 묻힌 그분의 행적 일부나마 이 지상에 드러낸 것만으로 만족해야 돼. 그 다음은 후배나 후손들의 몫이야."

 

나의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를 위하여 선산군 도개면에서 금오산이 빤히 보이는 구미면 원평동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그러신 뒤 날마다 어린 손자에게 금오산이 낳은 걸출한 충절의 선비를 말씀하셨다.

 

"진정한 강자는 위기에서 일어나는 사람이다. 국화는 서리를 맞고 피기에 사군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나는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동안 마련해 놓은 자료와 내 문서에 잠자고 있는 '들꽃' 원고파일을 '불러오기'로 화면에 띄웠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이 '들꽃'은 주 2회 연재로 매주 월, 목요일에 송고할 예정입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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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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