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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영화제 피움(FIWOM)'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 대상 폭력의 현실과 심각성을 알리고 피해자의 생존과 치유를 지지하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지난 2006년 한국여성의전화 주최로 시작됐습니다. '질주'를 주제로 하는 제8회 영화제에서는 어떤 영화,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9월 25일부터 28일까지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에서 13개국 29편의 영화로 만나게 될 제8회 여성인권영화제 '질주'의 이야기, 지금 시작합니다. - 기자 말

여성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원한다

"내가 미혼인 채 임신한 게 알려지면 날 묶어놓고 때려죽일 거예요. 그냥 목숨을 끊고 싶어요."
"임신 7주차예요. 성폭행을 당했어요. 수치스러워서 경찰서에 가지 않았어요. 가족들이 알면 의절당할 거예요. 유산할 때까지 배를 때려볼까 생각했어요."

여성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기 위한 권리는 각 여성이 처해있는 사회적 조건, 성적 권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성의 지위가 낮은 국가, 또 여성들이 단지 성적 대상이나 사회적 재생산의 도구로만 여겨지는 사회일수록 여성의 건강권은 지켜지지 않는다. 정부와 사회 공동체는 여기에 제대로 된 관심과 지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여성의 건강권이 지금보다 나아지려면 법적 보장이나 약의 구입 가능 여부, 병원에서의 치료 가능성 정도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성적 권리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사할 수 있으려면 사회경제적 조건도 갖춰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건강권도 제대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를 위해 여성들이 제대로 된 의료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다.

이런 점에서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이 보여주는 이들의 활동은 지금까지 '여성의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의 이분법적 논쟁으로만 집중되면서 낙태 합법화 여부에만 초점이 맞춰져 왔던 구도를 넘어, 여성의 성적 권리와 건강권 문제에 새로운 도전과 영감을 주고 있다.

네덜란드의 배 타고 전 세계 위험에 빠진 여성들을 구하러 가다

파도 위의 여성들 <Vessel> 2014
 파도 위의 여성들 <Vessel> 2014
ⓒ Diana Whitten 감독 다이애나 휘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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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의 여성들'은 그린피스 활동을 하던 중 국제수역에서는 선박이 속한 국적의 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합법적으로 낙태가 가능한 네덜란드의 배를 이용해 각국의 여성들을 지원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레베카의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그린피스에서 활동하는 동안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자가 낙태나 불법 낙태 시술을 시도하다가 과다출혈이나 쇼크 상태로 실려 왔던 여성들을 보았다. 그리고 '파도 위의 여성들' 활동을 하면서 이들은 세계 각국의 여성들로부터 이런 지원 요청을 받았다.

"지옥에 발을 들여놓고 5주째 살고 있는 것 같아요. 낙태시켜 주는 사람은 있는데 안전하지가 않아요. 그리고 죽을까봐 무서워요."
"낙태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암시장 가격을 감당할 수 없고 수입은 전부 남편이 관리해요."
"아이가 이미 둘인데 다른 아이를 먹일 돈이 없어요."

법은 낙태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위험과 책임 전가할 뿐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들로 인해 10분마다 한 명꼴로 여성들이 죽고 있으며, 1년이면 그 숫자가 4만 7천 명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낙태가 불법인 나라에서 누가 낙태 시술로 죽었는지 통계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독한 약물을 마시거나 뾰족한 막대기, 옷걸이 같은 도구로 자가 낙태를 시도하다가 죽어 나간다. 오죽하면 낙태 합법화 캠페인에 사용되는 상징이 옷걸이가 되었겠는가.

누구와 사귀고 언제쯤 결혼할 것인지, 누구와 성관계를 할 것인지, 심지어 어떤 옷을 입을지조차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고, 남성들의 콘돔 사용은커녕 제대로 된 피임 정보에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그 모든 책임과 위험을 홀로 감당하고 있다.

폭력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다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나라일지라도 성폭력의 위험은 어디에나 있다. 남성들에 의한 폭력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로 인해 원치 않는 임신하는 여성들 또한 도처에 있다. 전 세계 어떤 나라에서든 여성들의 성적 권리는 문화적·경제적 조건이나 의료 시설이 부족한 지역 조건, 연령, 혼인여부, 장애 등 다양한 조건들 속에서 수시로 벽에 부딪히고 피임을 하는 일은 이러한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족의 요구 때문에 피임이나 출산 여부를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들, 건강 상태나 삶의 시기, 조건 등으로 인해 아이를 낳아 기르기 어려운 수많은 여성들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100% 안전한 피임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들 속에서 과연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들의 결정이 오로지 여성 개인의 이해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사회적 압박과 통제, 불평등한 관계들은 삭제된 채 낙태의 위험과 책임을 여성들이 모두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낙태를 처벌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법은 결코 낙태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오직 그 위험을 여성들에게 전가할 뿐.

파도 위의 여성들, Vessel, 2014
 파도 위의 여성들, Vessel, 2014
ⓒ Diana Whitten 감독 다이애나 휘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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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파도 위의 여성들'은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로 했다. 배를 타고 각국을 다니며 여성들이 조기에 비교적 안전하게 낙태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약을 알려주고, 이 약의 복용법과 부작용, 건강과 안전을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최대한 쉽게 만들어 배포하는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또 위기 상황에는 언제든지 실시간으로 상담할 수 있도록 핫라인과 온라인 상담 지원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각국의 연결 단체와 지원을 받은 여성들이 현지에서 직접 다른 여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교육 프로그램과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들의 홈페이지에서는 약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안전한 섹스를 위한 정보에서부터 각국의 여성 건강 지원 단체들과 나라별 낙태 관련 법 현황, 약의 구입 가능 여부, 온라인에서의 가짜 낙태약 판매에 관한 정보까지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캠페인 자료와 약의 안전한 복용을 위한 자료들은 전 세계의 다양한 언어들과 쉬운 그림으로 제작되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여성의 주체적 힘을 믿는 사회, 옷걸이 대신 정보와 권리를!

낙태 합법화 캠페인 포스터.
 낙태 합법화 캠페인 포스터.
ⓒ 낙태 합법화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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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의 여성들'이 하고 있는 활동은 여성들이 스스로 안전하게 낙태를 하고 자신의 생명과 몸, 삶에 대해 실질적인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피임이나 낙태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낙태 시술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법적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는 나라들에서도 여성들이 낙태를 위해 약을 이용하거나 적절한 의료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비싼 시술 비용과 까다로운 절차 등으로 인해 여전히 수많은 제약들에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들의 활동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가장 좋은 상황은 여성들이 굳이 전문가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자원과 정보, 사회적 권리와 성적 권리들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몸과 삶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또,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사회·경제적 제약 없이 전문적인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여전히 그 벽은 높기만 하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들의 삶과 건강에 직결되어 있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 사회에서 살아나갈 새로운 생명을 제대로 책임지고 키우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여성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그 판단을 반복하고 직접 자신의 몸과 삶을 통해 책임을 져 왔다. 그러나 이 무거운 책임을 함께하는 대신, 여성들을 통제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여온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은 여성들의 판단과 책임감을 믿지 않고 그에 합당한 권리를 보장하려 하지 않는다.

'파도 위의 여성들'을 창립한 레베카는 말한다. 

"나는 아이가 둘 있어요. 그래서 좋은 부모가 되려면 얼마만큼의 노력이 드는지 알죠. 그런 노력을 들일 수 없거나 들이길 원치 않으면 비참하게 고통을 안게 되요. 내 철학의 토대는 고통을 줄이는 것이에요. 안전한 낙태를 할 권리는 여성의 고통과 동시에 가족과 사회의 고통을 줄여줍니다.

여성들에게 약물 낙태의 자율권이 주어지면 낙태에 반대하는 이들이 심어놓은 법률적 제약의 힘이 약해질 거예요. 그런데 그건 여성 개개인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활동해 왔어요. 여성들은 이런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거예요."

덧붙이는 글 | *필자 나영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GP네트워크 팀장입니다.



태그:#여성인권영화제, #낙태, #파도 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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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의전화는 폭력 없는 세상, 성평등한 사회를 위해 1983년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이주여성문제 등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으로부터 여성인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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